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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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고 싶던 인물로서 기억되는 작가는 운이 좋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되었던 도스토옙스키, 햄릿이 되었던 셰익스피어, 돈키호테라는 이름으로 살고 싶어 했던 알론소 키하노가 되었던 세르반테스. 더불어 소설가로서의 본성 외에 다른 본성을 소설에 반영할 수 있었던 작가도 운이 좋다. <검은 책>에서 화가 같았던 오르한 파묵. <광대 샬리마르>에서 기자 같았던 살만 루슈디. <이민자들>의 제발트는 고고학자나 역사학자. <로마의 테라스>에서 키냐르는 몸므가 된다. 그리고 판화가로서 소설을 써냈다.

 

몸므는 에칭 판화가다. 에칭, 드라이포인트, 메조틴트 기법을 자유로이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키냐르는 그 음각(陰刻)의 판화 같은 유연하면서도 강한,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문장을 파낸다. 그림을 새기기 위해 온몸으로 밀어내듯 쓴 글이다. 그 문장들이 때때로 전혀 다른 차원을 건너뛰어 내 영혼에 새겨지는 듯 하다. 케테 콜비츠의 <카를 리프크네히트에 대한 추모>와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 여성 판화가가 그린 강렬한 투박함, 남성 판화가가 그려낸 섬세한 관능. 케테 콜비츠를 떠올려서인지 몸므-키냐르의 스타일이 더 짜릿하게 느껴진다.

 

몸므는 떠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한 나니의 곁을 도주하듯 떠난다. 하지만 그 탈주선은 커다랗게 타원형을 그리며 지구 주위를 도는 달처럼, 언제나 첫사랑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귀환선이기도 하다. 시간이 흘러, 자기를 찾아온 아들을 인정하지 않은 그의 태도에서 탈주와 귀환. 그 강렬한 욕망 사이, ‘사이(간격)’를 잃지 않으려 참아내는 예술가의 한 단면, 고독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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