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라보예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 중 선호하는 쪽은 고진이다.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말의 내용보다는 문체(Style) 때문이다. 지젝은 각종의 사례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여기저기 종횡무진 한다. 그로 인한 풍성함은 예기치 않은 섬광 같은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너무 어지러워서 단번에 그의 글을 쫓아가기가 어렵다. 고진은 그에 비하면 범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은데, 매우 잘 조직화되어 있고 깔끔하며 무엇보다 선명하다. 이 정도의 선명함은 글 잘 쓰는 다른 많은 학자들(자연과학자를 포함해서) 사이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이다.

 

한병철의 이 책이 그렇다. 물론 책이 얇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가 논증하는 바가 분명하고 선()적인 문체로 인해 몰입이 쉽게 된다.

 

 

1. 면역학적 시대와 신경증적 시대를 구분하는 것이 새롭진 않다. 어디서인지는 몰라도 어디선가 많이 듣던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경증적 시대를 긍정의 과잉, 활동의 과잉으로 규정하면서 면역학적 시대의 처방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은 내 속의 뭔가를 출렁이게 했다.

 

2. 그의 선()적인 글들이 다른 선, 또는 면과 부딪히는 지점 또한 아주 분명해서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보드리야드, 아렌트, 세네트, 아감벤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제대로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또는 잘못 본 것들에 대해 논박하는 부분은 챙챙 소리 내며 일대일로 칼 싸움을 하는 무사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들이다.

 

3.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해석하는 챕터는 아리까리 했다. 아감벤의 해석, 즉 바틀비를 메시아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 논박하는 대목은 나로서는 좀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필경사 바틀비>를 읽었을 때 나는 한병철의 관점도 아감벤의 관점도 모두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감벤은 한병철의 관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어디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느냐의 차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건 그냥 감이다. 한병철이나 아감벤처럼 조목조목 파고든 얘기가 아니라) 바틀비를 읽고 내가 남긴 리뷰를 지금 다시 보니, 나는 아감벤에게 한 발 정도 더 무게를 두고 읽었음을 알 수 있었다. 허나, 한병철이 말 한대로 바틀비가 메시아적 희망을 향해 열려(아감벤적 해석)” 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나는 바틀비를 메시아적으로 해석했으되, 그 메시아는 도래했어도 희망이 되지 않는, 될 수 없는 존재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바틀비를 복종적 주체로 해석한다. 물론 이렇게 해석한 이유도 알겠다. 하지만, 한병철의 바틀비 해석에서 내가 아리까리 하다고 생각한 점은 <필경사 바틀비>의 화자. 즉 바틀비를 고용한 변호사의 관점에 대한 해석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필경사 바틀비>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요한 것은 화자의 입장 변화다. 처음에 그는 다른 조수(터키(이 책에서는 칠면조), 니퍼스(이 책에선 니퍼))와 동일하게 바틀비를 대했다. 하지만 결국엔 , 바틀비여! , 인간이여!”를 외치게 된다. 그것은 화자의 어떤 심정적 변화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탄인 동시에 고발(한병철)”이기도 하겠지만, 화자의 변화이기도 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그런 변화가 희망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게 또한 나의 관점이다. 즉 나의 관점은 바틀비가 메시아복종적 주체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종의)불가해한 인간 존재의 가능성은 그것을 보는 사람(작품에서는 변호사, 작품 밖에서는 독자)들로 하여금 뭔가 꿈틀거리게 한다는 점이다. ‘먼 별은 그것 자체로는 그냥 불타고 있는 수소나 헬륨에 불과하겠지. 그렇지만 그 별을 보는 나에게는 뭔가 시사점을 주지 않나? 그러니 한병철의 해석은 너무 바틀비에 고정되어 있어서 독자나 화자의 입장 변화를 생각하지 못한 해석 같아 보이고 아감벤의 해석은 바틀비에 너무 종교적, 인류학적 의미를 둔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