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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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몇 채가 서로를 기대듯 모여있던 어렸을 때 가장 오래 살았던 전셋집의 집주인네는 봉투를 만들었다. 과수원용 배 봉투나 사과봉투 같은 것들. 봉투를 만드는 종이들이 아주 아주 많이 쌓여있었는데, 그 종이들 중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이 미국의 전화번호부 책들이었다. 엄청 두껍고 종이 질이 좋은, 하얀색과 노란색 페이지가 겹겹이 쌓인, 미국의 수많은 지역의 전화번호부들. 일이 없고 심심할 때 나는 수시로 그 전화번호부 한 권씩을 가져와 뒤적였다. 각종 살림도구들에 대한 광고, 집을 수리할 때 쓰는 각종 도구들, 그리고 인테리어 제품들 광고가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그때 내가 제일 좋아했던 이미지는 미국의 주택 외관이나 내부 인테리어를 묘사한 정밀한 그림들이었다. 그 멋진 집들은(당시에 생각하기에는 서울에도 이런 집들은 없을 듯 했다) 내 상상력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아모스 오즈의 <<시골 생활 풍경>>을 읽으니 그때 보았던 정밀화 들이 떠오른다. 어휘와 문장을 따로 자세히 보면 실제 아모스 오즈가 정밀하게 묘사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주르륵 읽으면, 남의 집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 생경한 시선으로 그 집의 특징들을 잡아내듯 그렇게인상적으로 그려내고 있음을 느낀다. 집안의 가재도구나 베란다, 부엌, 방이나 거실의 구조 등에 대해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마을의 길, 광장, 버스정류소, 저수탑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마을(텔일란)의 분위기. 점차 여름 리조트화 되어 주말이면 사람들로 북적이고 포도주 상점, 미술품 화랑, 극동 지방의 가구를 파는 상점, 치즈와 꿀과 올리브를 파는 노점들이 성업하는 그 분위기에게 까지 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에 사는 사람들. 8편의 단편 중 7편에 등장하는 텔일란 사람들의 일상사가 또한 그렇게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단편 <상속자>의 마무리 부분은 당황스러웠지만, 길리 스타이너, 페사크 케뎀과 라헬 프랑코, 요시 새슨과 야르데나, 베니 아브니와 나바, 코비 에즈라와 아다 드바쉬, 달리아와 아브라함 레빈의 이야기들에는 쉽게 몰입했다.

 

길리 스타이너는 오지 않은 조카 기드온 때문에 한밤중에 세탁물을 꺼내 다림질을 하고, 세탁물을 개고, 제자리에 정리하고 운다. 독설가 페사크 케뎀이 한밤중에 듣는 땅 파는 소리는 같이 사는 아랍인 학생 아델도 딸 라헬도 듣게 된다. 환청이 전이된다. 요시 새슨은 길거리에서 낯선 여자를 보았지만 진짜 본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베니 아브니는 나에 대해 걱정하지 마요. 라는 아내가 전한 쪽지를 받는다. 마을 거리를 걷는데 잡종 개 한 마리가 30피트 거리를 둔 채 따라다닌다. 아내를 기다린다. 아다는 뺨이 눈물로 뒤덮인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계속 먹고, 마시고, TV를 응시한다. 코비는 마을의 거리를 배회한다. 달리아는 저녁 노래 모임에 몸을 바치고 남편 아브라함 레빈은 점차 말수가 적어진다. 그들의 위층 세 번째 방은 지금은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다.

 

고통이 각자의 고통이듯 고독 또한 각자의 고독이다. 실망에 익숙해지는 일은 언제나 눈물 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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