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레젭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가 스스로를 자기의 입이 아닌 다른 이들의 입으로 드러낸 1장의 그 문장들을 직접 읽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 얘기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고 느꼈다. 그건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차분하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안개처럼 깔린다. 이 어둠은 잔잔하고 낮은 어둠이다.

 

파트마를 이야기해야 하겠지. 그러자면 셀라하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흔 살 노파가 된 파트마는 이미 죽은 지 오래된 남편 셀라하틴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자기의 가슴에 새겨진 아픈 상처를 곱씹고 또 곱씹는다. 사랑과 원망의 영원회귀. 셀라하틴은 <<한밤의 아이들>>의 아담 아지즈를 떠올리게 한다. 서양의 지식을 신봉한 서양식 의사였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 자신의 아내조차 계몽시키지 못하고 만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모습이다. 아마 20세기 초 구라파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초기 계몽적 지식인 상당수가 그러했을 그런 모습. 그런데 셀라하틴은 아담 아지즈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실패한다. 셀라하틴은 보다 경직되어 있고 보다 수줍은 성향이고, 맞다. 파트마의 말마따나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약하다. 그렇기에 폭력적이다. 수십 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파트마에게 지속적으로 끼친 영향은 정신적인 폭력에 다름 아니다. 셀라하틴도 죽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도안과 며느리도 죽고 이제 고요한 집에서 하인 레젭과 함께 사는 늙은 파트마. 베니션 블라인드가 달린 방에서 장롱에 집착하며 침대에 누워지내는 늙은 몸. 그녀의 회상은 검은 튤립 퀸 오브 나이트처럼 거의 광기에 가까운 마력으로 소설 전체를 휘감는다. 처음에는 혐오로 나중에는 안쓰러움으로 마지막엔 조금은 냉담해진 눈으로 보게 된 사람.

 

소설에는 레젭과 파트마를 포함한 다섯 명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모두 공통의 버릇이 있다(아마도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겠지만). 할 말을 미리 마음 속으로 시뮬레이션 하는 것. 중학생 때 읽었던 이현세 만화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까치가 마치 영화 대부의 한 장면에서처럼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정확하게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저는 어렸을 적부터 가장 친한 사람들에게도 늘 해야만 하는 말만 했고 하고 싶었던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때 까치가 너무나 고독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도 그러니 모두 고독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곧바로 뒤집힌다.

 

메틴과 하산.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10대 사내아이들. 전혀 다른 배경에 살고 있지만 닮은 데가 있는 아이들. 처음부터 나에게 경멸감을 불러 일으킨 사람들. 이 두 아이들을 보고 먼저 떠올린 단어는 키치였다. 키치라는 단어가 이렇게 딱 들어맞기도 어렵겠다 싶었다. . 하지만, 또 다른 화자인 파룩의 글에서 이런 표현을 만나게 된다. ‘역겨운 표면적인 취기’. 이 표현은 딱 키치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 아닌가. 작가는 내가 경멸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역겨운 표면적인 취기라고 말해 놓고서는 표면적인 것을 좋아한다.’(모순되는) 말을 한다. 내가(독자가) 어떻게 나올지 대비하고 있었다는 듯.

 

메틴은 부자를 꿈꾼다. 하산은 권력을 꿈꾼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기분 나빴던 두 순간을 이들이 만들어낸다. 자기의 똑똑함을 자신하는 메틴은 술에 취해 사랑하는 제일란을 강간하려고 한다. 자기는 장차 큰 일을 할 것이라던 하산은 사랑하는 닐귄을,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혼자 남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배신(정확히 말하면 닐귄에 대한 배신은 아닐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고 얘기해야겠지)한다. 그리고 닐귄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만다. 소설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인데 작가는 파룩의 글을 통해 표면적인 것을 긍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똑바로 보라는 말이겠지.

 

그래 똑바로 보자. 돈과 권력, 여자의 사랑을 갈구하는 메틴과 하산은, 어느 모로 보나 바보 같은 내 10대 시절과 거의 비슷한 모습이고, 더 화가 치미는 것은 그네들보다 이제 거의 두 배의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 또한 거기서 그렇게 많이 나아진 점은 없다는, 욕지기 나는 현실이다. 내가 그들을 경멸한다면 그건 나 스스로를 경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 그렇기 때문에 긍정해야 하나? 내가 걔네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아니 그렇진 않을 것이다.

 

레젭과 파트마는 사건을 이끌어 가는 인물들이 아니다. 묘사되는 인물들이지 행위 하는 인물들은 아니다. 사건을 이끌어 가는 것은 키치적 인간, 메틴과 하산이다. 레젭과 파트마가 그 아프고 슬픈 삶으로써 보여주는 것은 어떤 두께지만, 그것은 닻과 같이 사람을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종류인 것이다. 역겨운 표면적인 취기에 빠져 있는 메틴과 하산이, 그 한심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역동적으로 만드는 캐릭터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작가는 경멸해야 할 일면과 긍정해야 할 다른 일면에 대해 똑같이 보라고 말한다.

 

그 이중의 면을 똑같이 보기가 어려웠다. 2권 후반부는 읽는데 괴로웠다. 심중의 저항력이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어둠의 두께와 두께를 갖지 않는 표면의 밝음(이건 모리스 블랑쇼의 말에서 차용) 모두를 좌뇌로는 이해해도 우뇌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레젭에 대한 파트마의 폭력, 파트마에 대한 셀라하틴의 폭력, 제일란에 대한 메틴의 폭력, 닐귄에 대한 하산의 폭력.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진 자리에 유일하게 남는 이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폭력의 관계가 고요한 집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처음의 자세-다섯 명의 화자들에 대한 감정이입-를 고쳐 잡고 조금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보게 됐다.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우리를, 여기를 보게 됐다. . 자신들 밖엔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 . 바로 등신 같은 우리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