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고리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수전 손택은 제발트를 가리켜 ‘비탄에 잠긴 정신’이라고 했다.
<<토성의 고리>>는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을 한 컷의 사진으로 친다면 그의 사진은 가장 하얀 부분이더라도 옅은 회색으로 인화된, 그라데이션이 아주 정확한 사진들임을 느낀다. 현대의 많은 훌륭한 소설들이 그 한 구석에라도 윤곽이 흐릿해지며 마치 공중에서 엷게 사라지는 듯한 가벼움 같은 것들을 장치해 두는 반면에 제발트는 가벼울 만한 것에게도 짙은 무게감을 부여한다. 그런 무게감은 확실히 비탄이라고 불릴 만하다고… 끄덕거리게 된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제목에까지 ‘토성’이 들어가 있다. 멜랑콜리의 상징.

밀란 쿤데라는 ‘커튼을 찢는’ 것에 대해 말했었다.
<<토성의 고리>>의 화자는 영국의 서퍽 지역을 여행한다. 한물간 도시, 잊혀진 저택, 길도 제대로 찾기 힘든 시골, 관광객이 사라진 해변 등등. 제발트는 이런 공간적 물성(物性)에 가리워진 것들을 시간의 지식으로 홀연히 걷어내고 있다. 로우스트로프라는 이젠 잊혀진 항구에서 한 때는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젠 어획고가 바닥난 청어 얘기를 풀어 가다가 영국의 반역범으로 처형된 로저 케이스먼트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시 그와 콩고에서 만났고 로우스트로프 항구를 들락거렸던 조셉 콘래드의 아프리카에서의 끔찍했던 경험들을 전한다. 그리고는 카프카의 삼촌까지 연결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한 자연과 사람과 장소와 인간성의 파괴를 가감 없이 써 내려간다. 그저 황폐해져 버려 이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들의 역사를 통해 역사책에 흔히 표기된 시대에 따른 제국들의 영토 지도처럼,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허상의 지식들을 찢어 버리고 인류가 자행한 비극에 대한 날것의 진실을 접하게 된다.

윤리의식과 잊혀진 진실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 내가 그의 작품들을 소중히 여기게 된 이유다. 조문객의 신중함이랄까, 극히 애석해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태도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런 윤리의식 때문에 그가 말하는 사실과 허구를 모두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 소설이 이런 분위기를 띄면 독서하기엔 대단히 갑갑하고 따분하기 일쑤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은 데, 그건 그의 시선이 다음에는 어디로 향할지 또 어떻게 새로운 사실과 허구로 연결할지… 호기심을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의 진실 포착 능력이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는다.


‘강가를 따라 걸어가면서 패배자들의 투쟁과 깊은 절망의 끔찍함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방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의 비전은 언제나 영혼을 흔드는 강력한 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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