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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구두
헤닝 만켈 지음, 전은경 옮김 / 뮤진트리 / 2010년 11월
평점 :
얼음구멍, 얼어붙은 바다 가운데의 섬, 집 안 개미집, 숲 속 연못, 해무(海霧) 속의 배. 반복되어 나오는 낱말과 이미지들은 내게 ‘우물’을 떠올리게끔 했다.
외할머니가 사는 동네 한가운데에 우물이 있었다. 정월대보름이었는지 추석이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 밤, 우연히 우물을 내려다 보게 되었다. 그 밑바닥에 물에 비치는 보름달이나 별이 보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우물 한가운데 일렁이는 짙은 어둠이 친근하면서도 기이하게 무서웠던 기억은 뚜렷하다. 이것은 명징하게 기억하는 어렸을 적 몇 안 되는 이미지 중 하나다.
십여 년이 흐른 후 누나가 천안의 성정동에 유아복 가게를 차렸을 때, 나는 그 동네 이름에서 뭔가를 느꼈다. 성정동의 성정은 星井이었다. 별 우물. 깊은 바닥의 우물과 높은 하늘의 별. 상반된 듯 모순된 듯 보이면서도 기이한 대칭으로 짝을 지은 그것은 어렸을 적 기억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면서 이전의 이미지에 뚜렷한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그때쯤 만난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의 소설에는 거의 언제나 ‘우물’의 이미지가 주요하게 반복되고 있다. <<태엽감는 새>>에서는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고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 이미지는 빈번하게 나온다. <<1Q84>>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두 개의 달이 떠오른다는 광고 카피를 처음 대했을 때 내가 떠올린 것도 다시금 우물 이었다. 하루키를 통해서 내 어릴 적 우물의 기억에.. 뭔가의 스토리가 덧붙여 졌고 녹아 들어 갔다. 그것은 고독, 평안, 회복이었으며 무엇보다 나 자신 이었다.
헤닝 만켈의 이 소설에서 만난 얼음 구멍과 섬과 개미집과 연못과 해무 속 배와 캠핑카와 日本刀는 나의 ‘우물’과 같았다. 하지만, 미처 내가 느끼지 못한 것을 작가는 더 끄집어 냈다. 그리움.
여기, 구멍과 대칭점에 있는 게 이탈리아 수제 구두다. 구두 자체의 의미와 선물로서의 의미가 동시에 덧붙여진다. 발 치수를 재는 데만 두 시간이나 소요될 만큼 정성을 다해 만드는 구두, 그런 구두를 수십 년간의 원망에도 불구하고 선물하는 루이제의 태도. 관심과 정성 그리고 용기.
휴. 너무 교훈적인 걸 떠올린 것 같다. 하지만 구멍과 구두. 이것은 별과 우물처럼 짝을 이뤄 멋지게 조응을 이루고 있었다. 내 ‘우물’은 또 다시 한 뼘 정도 자란 것도 같다.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