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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심장부에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평점 :
그녀. 마그다의 언어는 관념적이다. 지적이다. 그런데도 못 배웠다고 하고 여자일 뿐이라고 하고 90파운드 밖에 안 나가는 덜 생긴 노처녀일 뿐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그녀가 처음에 아버지를 향해 도끼질을 하던 그 시점부터 그녀의 그 언어를 사랑하게 됐다.
세 가지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마그다가 아버지와 그의 새 부인을 도끼로 살해하는 사건. 그리고 하인의 아내를 자기 침실로 끌어들인 아버지를 총으로 쏜 사건. 마지막은 그 갈색피부 하인 헨드릭에게 그녀 마그다가 강간 당하는 사건.
아버지가 두 번 죽는다. 이로써 나는 그녀 마그다의 정신상태 또는 글쓰기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미쳤거나 소설을 쓰고 있거나 둘 중 하나. 어쩌면 총을 쏜 사건을 예비하여 그녀의 애증을 강조하는 장치라고 여겨지게도 만드는.. 결국 어떤 것이 소설적 사실이든 그 원인은 마그다에 의해 말해진 이른 바 ‘간격의 비애’ 때문이라고 추측되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녀가 사는 농장은 남아프리카의 외딴 곳. 이웃집조차 아주 먼 곳. 아버지는 딸에게 무심하고 딸은 아버지에게 이상증세로서의 애증을 갖고 있다. 아버지와 살갑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고 갈색 하인들과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다. 그녀는 이중으로 왕따다. 딸과 주인이라고 불리는 왕따.
그녀가 친부를 도끼로 살해하는 장면에서 나는 어떤 윤리적 꺼리낌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순수하게 단순한 묘사에서 강렬한 미적 아름다움만을 느꼈을 뿐. 어느새 나는 화자인 그녀에게 말려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고 하인 헨드릭의 아내를 꼬시고 다시 그녀가 아비를 총으로 쏘는 사건을 맞이했을 땐 혼란스러웠다. 이제 어떤 것이 이 허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연대기적으로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이 이야기가 황당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녀의 형식인 토막글과 관념적인 언어가 매칭되면서 기이한 설득의 연결고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이 토막글의 진의를 믿을 수 없게 되긴 했지만 아름답게 정제된 그녀의 사변적 언어에 이끌려 계속 나아갔다.
이렇게 결속된 그녀 마그다와 독자인 나. 이후 나는 하나의 분노와 하나의 배신감을 느끼는사건을 접하게 된다.
분노. 헨드릭에 대한 분노였다. 헨드릭이 그녀를 강간한 것은 그의 아내를 범한 그녀 아비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 그녀가 아비를 죽인 후 나타난 농장의 경제적 파탄(매달 주던 급료를 주지 못하게 된 그녀의 사정)때문이라는 것. 난 거기서 남자들 사이에서 주인과 하인으로 나타나는 위계질서의 음울한 현실. 욕지기가 나올 것 같은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직시하게 됐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 그것은 이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
배신감. 그녀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냄새 나는(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마그다가 헨드릭에 대해 한 말이다.) 갈색 헨드릭에게 강간 당한 후 그를 원하게 되는 그 상황. 소설의 맥락상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녀는 ‘살갑게 대화를 나누는 관계’에 목말라 있고 그 사건은 그러한 관계를 (병리적일지라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런 배신감을 느꼈다. 정제된 언어, 미친듯한 실행. 그것 때문에 나는 그녀의 어느 한 부분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헨드릭과 그의 아내가 야반도주한 이후 그녀는 철저히 혼자 살게 된다. 그녀 스스로 마녀가 된 듯하다고 말하는 상황(이런 것으로 봐서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그 허허벌판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 늙어버린 한 여자. 소설은 하강하여 공허로 치닫는다. 아버지의 뼈와 함께 죽는 운명을 택한 그녀. 마그다.
포크너의 <에밀리를 위한 장미>를 읽었을 땐, 미친 여자.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마그다는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느낀다.
그녀는.. 존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