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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ㅣ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맘에 드는 한국소설을 만났다. <<달려라, 아비>>의 김애란을 만난 후 처음이다.
그림자 :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가 한 번 이상씩 겪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절망의 다른 이름. 여주인공인 은교가 처음 그림자를 이야기할 때 그것은 굉장히 리얼한 것의 은유적 표현이라 여겨졌지만 곧 남자주인공인 무재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그림자를 경험했었다는 이야기가 전개됨으로써 왠지 기묘한 환상과도 연결된다. 그런 리얼과 환상의 연결은 더욱 더 그 ‘희망 없음’의 절박함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에서 하늘로 날아 올라간 누군가 마냥. 현실에선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함을 절절히 느끼게 해 준다.
공간 : 도입부에 나오는 숲, 철거가 진행되고 있는 크고 낡고 미로처럼 꼬여 길 찾기 어려운 상가,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섬. 은교와 무재의 집, 은교 아버지의 집 등등.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공간 설정 자체가 이미 품고 있는 서사가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져 있다. 나는 이런 공간성에 대한 작가들의 감각들을 눈 여겨 보는 편인데 김애란도 그렇고 황정은도 그렇고, 간결하지만 리얼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런 센스가 돋보인다.
대화의 투 : 은교와 무재의 대화방식은 실제 있을 법하지 않는 어투다. 하지만 무어라 말 하기 힘든.. 책의 뒤에 붙어 있는 신형철의 비평에서는 ‘윤리’라는 말을 쓰던데.. 그래 그런 말을 써도 되긴 하겠다. 그렇지만 좀더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섹스에 대한 욕망’을 완전 잠재운 듯한.. 절대 중요하지 않다는 어투. 뭐랄까.. 아다치 미츠루의 H2 같은 만화에서 주인공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하는 말들. 즉 우정의 말투다. 그래서 오히려 은교와 무재가 섹스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건 유머로 다가와 아주 선(善)하게 들린다.
연애 : 은교와 무재의 연애.. ‘사랑’이라는 말은 둘에게 사용하기엔 좀 노골적으로 들린다. 연애라는 은근슬쩍 한 단어가 뉘앙스에 더 적합한 기분이다. 절망의 과정 중에서도 독자로 하여금 풋. 하고 웃음짓게 만드는 이들의 연애이야기는 딱 사춘기 첫사랑 같은 풋풋함이 풍겨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어둠에 질척거리지 않게, 저 멀리 아주 희미하게 깜빡이는 별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현실의 두 세 발자국 바깥에서 그것의 심장을 꿰뚫어 보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