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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수집가 - 어느 살인자의 아리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정창 옮김 / 예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루트비히는 태어나면서부터 소리와 함께였다.
세상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 먼저 함께한 다른 아이들과 달리, 젖을 먹이는 유모의 숨소리부터 소리를 인지하고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루트비히는 세상 속 모든 소리를 자신 안에 저장하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저장과 분석에도 성이 차지 않아 새로운 소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맨다. 넓은 세상인만큼, 자신이 모르는 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어린 루트비히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던 루트비히는, 마침내 자신안에 자리잡은 소리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저장 된 소리를 자유자재로 꺼내서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게 된 루트비히는, 자신의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된다. 비로소 불안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게 된것이다.
세상 모든 소리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루트비히였지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듯한 생각을 가진다. 자신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는,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그 소리를 발견한다. 사랑의 소리를!
-내가 무심코 발견한 소리는 모든 소네트의 아다지오나 안단테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였다. 지난 십일 년 동안 그토록 찾아 헤맸음에도 자취를 감추고 완강하게 버티던 소리였다. 지상의 모든 의지를 꺽어버릴 수 있는 소리,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생기있게 만드는 소리, 서로가 서로를 안게 만드는 소리, 우리의 삶이 영원히 끝나지 않게 만드는 소리, 그것은 바로 사랑의 소리였다.
마침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랑의 소리'를 찾은 루트비히는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활용한다. 그리고 사춘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만난 첫사랑 여인에게 사랑의 소리를 들려주며 유혹한다. 그리고 이어진 둘의 아름다운 사랑. 하지만 그 사랑은 저주가 되어 루트비히에게 돌아온다. 루트비히와 함께 사랑을 나눈 첫사랑 소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미처 손써 볼 틈도 없이.
그 후 루트비히는 사랑을 나누는 여인을 모두 절정의 순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루트비히는 비로소 사랑의 소리를 갖게 되었지만, 사랑의 소리는 저주가 되어 루트비히에게 돌아온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루트비히는 자신이 '트리스탄의 후예'임을 알게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아름답지만 저주로 가득했던 사랑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매혹적인 사랑의 소리를 주는 대신, 사랑을 갖지 못하게 함을 알게 된 루트비히는 절망한다. 그리고 자신을 놓아버린다.
세상의 소리를 가진 천재는, 평범한 일상을 꿈꿨을 뿐이다. 유명한 가수가 되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 것, 그리고 그 여인과 함께 자식을 낳고 오래도록 살아가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저주는 루트비히의 모든 것을 앗아가버렸다.
루트비히의 정액 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독은, 사랑의 소리와 함께 수많은 여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렇게 저주 속에 자신을 내맡긴 루트비히는 자신의 이졸데 '마리안네'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영원한 저주 속에서 자신만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다 결국 죽음을 택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후손인 루트비히와 마리안네도 자신들의 사랑에 안타까워 하다가 영원한 죽음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정염과 상처들, 제 희생은 곧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증거이자, 영원한 사랑보다 더 진정한 사랑의 증거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사랑은 인간의 욕망을 뛰어넘은 사랑이자. 지상의 모든 남녀의 가슴속에 자리한 제한적이고 한계적인 사랑을 극복한 사랑이였기 때문입니다.
수백명의 죽인 희대의 살인마였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털어놓는 루트비히의 육성은 모든 일을 이해하게끔 만들었다. 모든 것을 가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버린 그-절정의 순간에 모든 것을 걸기보다, 죽음과 맞닿아있는 절정의 순간을 향해 사랑을 걸었던 그의 모습이 눈앞이 어른거렸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절묘한 장면교차와 더불어 실제 존재했던 루트비히의 모습까지 겹쳐지며 책은 사랑과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이야기꾼 트리아스는 그렇게 독자들을 소리의 세계로 안내하는 것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소리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