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내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때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를 엮은 끈을 점점 더 가까이 잡아당겼다. - P32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 아니다. 끝없이 발버둥 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 뿐이다. - P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킨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국에 사는 이 책의 주인공 흑인 여성 ‘다나’는 백인 남성인 ‘케빈’과 결혼을 하고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줄 집에 막 이사를 마치고 한참 짐 정리에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둘 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기에 이사하다가도 떠오른 단편 아이디어 이야기를 나누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보통의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다나는 갑자기 현기증과 함께 울렁거림을 느끼고 정신을 잃는다. 눈을 떠 보니 낯선 곳에 백인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강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 혼란스러움에 대한 질문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아이부터 구하는 그녀.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현기증이 그녀를 다시 케빈이 있는 자신의 집으로 되돌려놨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도 이어지는 이 믿기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녀가 현기증에 정신을 잃고 도착했던 그곳은 자신의 조상이 살아가는 1800년대이다. 그녀는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 개선을 위한 시민운동이 일어났던 1950~60년대 시기를 지나 인식이 어느 정도(?) 개선의 색을 띠는 1970년대를 살아가는 다나가 하필 백인들의 ‘물건’이라 불리는 검둥이를 사고파는 것이 그 시대를 따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최악의 시대로 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공간을 이동하며 알게 된 것은 다나가 맨 처음 과거로 돌아가 강가에서 구한 아이의 이름이 ‘루퍼스’이며 그 아이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흑인인 자신에게 백인의 조상이 있었다니...


(P. 124)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 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루퍼스가 위협을 느낄 때마다 과거 속으로 돌아간다는 패턴을 인지한 그녀는 이 모든 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물론 이때까지는 그녀가 ‘관찰자’ 혹은 과거를 ‘체험하는 자’에 머물러 있었다. 과거에 일어난 역사를 바라보고 조금 더 편리하고 차별이 덜했던 세상에서 살아 본 경험으로 얻은 정보와 지식을 통해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그들에게 ‘흑인 노예’였을 뿐이다.


다나의 도움으로 매번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루퍼스에게 그녀의 손길과 관심은 절실했다. 자신만의 그릇된 방식으로 관심과 사랑을 갈취해 욱여넣으며 채워 온 루퍼스에게 어떤 상처가 있었을까? 1800년대에 백인의 루퍼스에게 ‘상처’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받은 상처는 누군가에게 입히는 상처로 갚아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자신의 그런 이기심이 그릇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다. 자신의 아버지 ‘톰 와일린’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은, 노예 소유주로서의 마땅한 태도.
그랬다. 그가 받은 상처에 누구든 값을 치르게 하는 언제나 용서받는 자, 루퍼스.


(P.343) ‘사람을 노예로 만들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겠지?’
(P.354) 노예란 길고 느린 둔화 과정이었다.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고 또 넘길수록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갇힌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도망쳐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야 마는 이 불행의 연속에서 ‘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한 걸까? 이런 끝나지 않는 지옥 속에서 그녀는 낯선 곳에서의 일상도 원래 살던 곳에서의 삶처럼 맞춰가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미워해야 마땅한 루퍼스를 ‘애증’의 감정으로 그느리는 다나.
그렇게 쉽게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는 ‘순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갔다. 아니, 되어버렸다.
다나는 곧 결심해야만 했다.


(P.369) 내 시대에서 있을 자리를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루퍼스의 시대에 더 날카롭고 강렬한 현실이 있었다.
(P.370) 루퍼스의 시대는 나에게 여태껏 요구받아본 적 없는 것들을 요구했고, 그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면 쉽사리 나를 죽일 수 있었다.

과거의 역사에 흠집을 내려 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받아 들여왔던 그녀는 흑인 노예라는 보이지 않는 멍에를 목에 걸고, 누군가의 감시가 없어도 묵묵히 일했다.
‘번쩍’하며 자신의 등에 내리 꽂아지는 채찍에도 자신을 고분고분하게 내어주었다. 어둠이 깔리듯 희미해지는 정신으로 어차피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가 한가지 뒤늦게 깨달았다.

(P. 388) ‘다시는 참지 않을 것이다.‘


‘시선’에 많이 집중하며 읽은 것 같다. 이 책은 주인공인 흑인 여성 다나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되기에 몰입이 확실히 잘 되고 그녀의 심리상태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집중되어 있는 동안 다나 자신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헤아리지 못했던 것들이 책을 읽는 내게 똑같이 존재했다. 그것은 그녀의 주변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감정이었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다나를 끌어안다가 함께 1800년대, 루퍼스의 시대를 경험(경험이라 하기엔 꽤 긴 시간인 5년의 세월)하게 된 그녀의 남편 ‘케빈’은 결혼 전부터 다나에게 호감을 보이며 친절했던 사람이다. 아무리 인종차별이 완화되었다고 해도 흑인과 백인과의 결혼이 그 시절에 뭐 얼마나 환영을 받았겠는가?
루퍼스에게 검둥이와 백인과의 결혼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태도를 보이기는 했으나 케빈 또한 흑인의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니기에 루퍼스 시대에서 일어나는 상황 속에 ‘다나’와 감정적 마찰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다나로부터 발생하였고 그녀의 조상과, 더 나아가서는 흑인 인권과 연관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여행과 또다시 자신들이 살던 1970년대, 현재로 돌아왔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극복하는 데는 사실 다나와 차이가 분명 있을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와도 연관되는 일이기에 받아들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자리잡혔겠지만, 케빈은 지켜보는 처지지 않았는가. 이 둘 간의 대립하는 상황에서 다나는 자신의 남편 케빈의 얼굴에서 자꾸만 톰 와일린과 루퍼스를 떠올린다.


나이절, 세라, 캐리 등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흑인 노예들은 영원히 갇혀 지내왔다.
그들은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고 ‘가족끼리 사는 집’의 온기를 알지 못할 것이며 한 사람으로 태어나 억압이 없는,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의 당연함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노예들에게도 계급이 존재해 밭에서 채찍질과 함께 일하는 이들은 부엌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이런 곳에서 그들은 다나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을까?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인 와일린가의 사람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선 ‘보통의 사람’ 이었을지도 모른다. 피부의 색 상관없이 자신이 한 약속은 지켰던 톰 와일린과 도망노예에게 너그럽게(?) 채찍질을 끝으로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루퍼스. 물론 그들이 보여준 모습들은 혐오스러움이 명치 끝에서부터 묵직하게 올라오게 하지만 그 시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욕하며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었다. (와일드가 사람들의 시대와 분위기를 기준으로)법을 준수하며 도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저지르지 않고(그들에게 흑인 노예는 말과 밀 포대와도 다를 바 없었기에), 이 사회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들에 적당히 자연스럽게 녹아든 이 삶으로 누군가가 먼 미래에서 날아와 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경멸한다면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일 테니까.


루퍼스 시대에서 당연하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들여다보는 것이 마음을 옥죄게 하지만 그만큼 생생하게 이야기를 담아내는 작가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SF 장르가 나에게 아주 친숙하지는 않아서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이 책에 첫 문장을 읽고 바로 그 고민을 멈췄던 걸로 기억한다. 틈나는 대로 읽을 때마다 멈춰있던 감정선이 읽는 순간 다시 살아나게끔 해주는 책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복잡한 마음이 드는 책이다. 착잡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들을 바라보는 것이 리뷰를 적어 내려가면서도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게 하였다. 내가 관찰자로서 머무는 사람인 것을 스스로 안다. 나를 포장하듯 단어 하나하나에도 ‘더 공감하는 자’에 가까운 사람이 되게끔 하려는 의도를 두는 것 또한 안다. 그래서 수정이 필요했었나 보다.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흑인인권, 성 소수자,계급,성별 등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우리 곁에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채찍’은 사라졌지만, 아직 우리들의 ‘침묵하는 입’과 ‘무관심의 돌아서는 등’에서 차별을 방조하는 구조와 제도에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P.184~185) 우리는 쇼를 바라보는 관찰자였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였다. 집에 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과 비슷한 척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형편없는 배우였다. 우리는 실제로 역할 속에 녹아든 적이 없었다.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었다.

(P.479) “ 나는 재산이 아니야, 케빈. 말이나 밀 포대가 아니야. 내가 자산처럼 보여야 한다면, 루퍼스를 위해 내 자유에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루퍼스 역시 한계를 받아들여야 해. 나에 대한 태도 말이야. 죽고 죽이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나아 보일 만큼이라도, 내가 내 삶을 통제하게 해줘야 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엄마는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했어요." 앨리스가 말했다.
"사는 편이 나아.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한은." 나는 가방 속에 든 수면제를 생각하면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 위선자인가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고 살라고 충고하기는 참으로 쉬웠다. - P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요즘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있다.
첫 문장이 너무 강렬했다.

(P. 8)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에서 팔 하나를 잃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다나’는 붙잡히지 않으려 숨 가쁘게 도망치고 또 들키지 않으려 숨죽인다. 나는 그녀가 매질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걱정스러운 마음에 책을 읽는 내내 미간에 인상이 안 풀어지고 내 온몸에 멍이 들고 찢긴 것처럼 아프고 날카로운 것으로 찔리는 느낌까지 ... 휴...
예전에 <리틀 라이프> 읽었을 때 조금 힘들었는데 그와는 다르지만, 이 책도 내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책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특히 ‘당연’하게 ‘감수’하는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맘을 너무 힘들게 했고 낯선 흙바닥과 풀숲에서의 도망침은 바잡게 하였다.


집중해서 읽다 보니 가름 끈이 나오는 것이다. 붉은색 가름끈.
때마침 ‘다나’가 채찍질을 당하는 장면을 읽고 있었던 터라 그 붉은색 가름 끈이 새하얀 종이 등을 타고 흘러내려 오는 붉은 피 같았다. 마음이 산란해져 급히 그 가름 끈을 ‘훽’ 하고 안 보이게 뒤로 젖혀버렸다.
기름과 피를 바른 잔혹한 채찍을 강파른 몸에 휘두른 장본인 ‘루퍼스’의 아버지 ‘톰 와일린’을 치워버리듯이. 그녀로부터. 그의 채찍으로부터.

‘다나’의 남편 ‘케빈’이 빨리, 조금만 더 빨리 달려와 그녀를 구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온몸에 힘이 들어가서 맛문하다.


이제 반 정도 읽었는데 이미 몸이 노그라지는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것 같고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강렬한 타임 리프 물이고 마음은 불편하지만 잘 읽히고 흡입력이 좋다. 주인공 ’다나‘에게서 느껴지는 ’강인함‘에 느꺼운 감정이 밀려온다. 어느 순간 내가 그녀를 의지하고 따라가며 읽고 있었다. 주말 동안 부지런히 읽어야지.


읽고 싶었던 책들이 도착했다. 찡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배반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은 동아프리카를 배경으로 1899년 몸바사와 1950~60년대의 잔지바르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총 3부이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버림’으로 인한 ‘배반’을 담았고, 개인사들이 서로 엮여있다. 각자의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보는 이들의 시선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 같다. 이 리뷰도 아마 내게 마음의 동요를 느끼게 한 인물, 감정, 사건 등을 위주로 담아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1부는 1899년대 잔지바르인 여자 ‘레하나’와 영국인 남자 ‘피어스’의 이야기. 2부는 1950년대 후반으로 이 책의 주인공 ‘라시드’의 형 ‘아민’과 손가락질받는 혼혈인 여자 ‘자밀라’의 이야기다. 모두 한계에 부딪힌 이들의 만남부터 사랑과 그리고 인생의 비등점을 코앞에 두고 배반이라는 결말에 이르는 비극적인 현실에 어쩔 수 없이 굴복을 택한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착잡함과 씁쓸함을 느끼게 한다. ‘배반’을 당한 ‘버림받은 자’로써 그럼에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극복해 나가야 하는 이의 모습, 그리고 유일한 삶의 목적이자 희망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도록 바라만 봐야 하는 쓰라린 삶에서 예전의 행복을 상상하는 이의 아픔까지 모두 느낄 수 있다.

(P. 160) 우리는 기적은 거짓이라 생각하고 항상 숨은 혹은 숨겨진 설명을 찾는다. 우리에게는 더이상 영혼조차 허락되지 않으며 우리의 은밀한 내적 공간은 그저 욱신거리는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는, 해결되지 않은 혼란의 장소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등의 보통의 삶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정신적 굴복까지 그들에게 비밀스러운 사랑과 열정은 포기 당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었고, 살아나가야 하기에 ‘용기’로 둔갑시켜버린 원치 않았던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늘 무언가를 잃어야만 했다.


2부와 3부에서 다뤄지는 소설의 화자이며 주인공인 라시드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1964년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1963년 12월이 되어서야 영국의 보호령이 끝이 나지만, 1964년 ‘잔지바르 혁명’ 이 일어나면서 아랍과 인도계 주민은 탄압대상이었다) 동아프리카의 내전으로 혼란을 겪던 시기를 빗겨나가고, 그의 부모님과 큰누나 파리나와 형 아민은 탐욕과 위협이 난무한 잔지바르에서 그들만의 삶을 이어간다.

(P.302) 우리가 받은 상처의 복잡한 의미를 단순화하고 우리가 느낀 감정을 평가절하했다.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불쾌했던 걸까? 우리의 머릿속에 우리가 무가치하다는 생각을 주입하면서 세계를 정복하고 다닌 것은 자기들이었는데 말이다.

(P.303) 항상 회의적인 시선이 따라와서 내가 입을 열거나 사소한 불평을 나열하기도 전부터 그 시선, 삐딱한 고개, 딱딱한 미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어서 말해봐. 우리가 너희에게 그렇게 많은 걸 해줬는데 어디 인종 편견에 관한 네 진부한 넋두리를 들어보자꾸나.


영국에서 라시드의 삶이란 흑과 백으로 나누어진, 그리고 그 분류 속에서 제한된 가능성을 인정해버린 진정한 이방인이었다. ‘우리 세계’의 일어나는 소란의 대해 마음으로 함께 하는 동시에 멀어져가는 이방인. 그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내가 가진 ‘혐오감’을 넘어서야만 했으리라. 세월이 좋아져서 ‘너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호흡하며 공부하는 날도 있다니 감개무량하구나. 너희가 보내는 차가운 시선과 삐딱한 고개에서 내쉬는 차가운 공기에 우린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어!! 소리치고 싶었겠지. 그럼에도 후한 마음으로 목소리 내는 것을 삼켜야 했겠지.

자신의 일부라고 여겼을 멸시하는 언어와 미움받는 기분, 억압, 박해들을 슬픔 속에서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갔다. 활기 넘치던 시간은 바람과 함께 날려버린 채.

라시드는 혼란과 억압 속에 살아가는 슬픔과 한을 담고 살아가는 형 아민에게 오는 편지가 오면 불안의 감정을 느끼며 뜯어 본다. 그럼 걱정과는 달리 형은 그저 상상 속에서 머뭇머뭇 서성거리는 궁금한 세계인 이 곳(영국)을 어른 아이처럼 물어보고 있다. 높은 건물을 올려다보는 아찔함과 온 세상이 하얗고 근심 없이 눈 내리는 거리를 보는 기분은 어떤 것인지. 자신의 갈망과 슬픔이 담긴 ‘한’을 숨긴 채, 아프지만 너무 맑은 그 무엇이 담긴 말들로 대신하는 형. 반짝거리며 눈앞에 보이는 희망을 들여다볼 기회도 없이 꺼져가는 자신의 슬픈 삶 속에서 고작 고뇌의 끝에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평판이 나쁜 ‘자밀라’와의 만남을 단념하는 것뿐이었던 아민. 난 그의 포기와 슬픔이 가장 맘이 쓰였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은 슬픔과 고통만을 담은 책은 아니다. 그의 또 다른 책 <바닷가에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친절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식민지배를 당하는 허약한 나라에서 나고 자란 운명이 물려받아야 할 업보인 양, 비참함을 짊어지는 이들의 이미지들로 마음이 아주 괴로웠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향인 것인지, 아니면 디아스포라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든 그 무게가 누르고 있어서인지 모진 말이나 가시 돋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참 차분하고 심지어 부드럽다. 가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느낌이랄까. 나약함에 사로잡힌 연약함으로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나의 시선은 ‘난민‘을 향한 측은함만이 담긴 값싼 동정심이 아닐까? 읽을수록 나의 마음도 무겁다.


아프리카 출신 아랍계 작가인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모국에서 일어난 사회적 혼란을 직접 경험했으며 1968년에 영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잔지바르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향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이 책의 주인공 라시드와 같은 심정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어떤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갔을지 모를 수가 없다. 글로써 자신과 같은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위로하는 마음과 가족들을 향한 사랑을 전달하는 저자에게 나 역시 같은 마음으로 위로해 주고 싶었고, 그리움을 마음속에 담아두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등불’을 밝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따라가며 빛을 비춰주고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안개처럼 늘 깔렸을 그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거둬주고 싶었다.


라시드는 슬픈 눈으로 자신의 만족스러울 수 없는 삶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저 운이 좋아서 얻을 수 있었던 자신의 삶 속에서 서로 그리워하고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억압된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공포를 삼키는 법을 배워야만 했을 것이다.


아민과 라시드에게는 ‘파리다’라는 누나가 있다. 그녀는 아민과 자밀라와의 관계를 이어주려고 도와줬던 인물이자, 라시드에게는 가족과의 끈을 이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주기도 했다. 두 남동생에게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환경 속에서도 묵묵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단비와도 같았을 그 사랑을 이어나가고 유일하게 이 책 속에서 그 사랑을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공부에 소질이 부족하여 기대치가 없던 딸이자 누나였던 그녀는 시인이 된다. 어느 날 라시드는 그녀의 책을 받고 뒤표지에 있는 누나의 사진을 본다. 세월이 많이 흐른 모습에서 이제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모습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누나의 책에는 이런 헌사가 적혀 있었다.

(P.324)나에게 배려를 가르쳐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선량한 아민과 우리를 떠난 적 없는 라시드에게. 그리고 내 모든 사랑을 담아 아바스에게. (아바스는 그녀의 남편이다)

처한 상황을 고려할 때 가족들보다 라시드 자신이 훨씬 나은 환경이었기에, 이 복에 겨운 ‘운’으로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아가는데 그런 자신을 향한 대견함과 그리움이 가득 담긴 형의 편지와 ‘우리를 떠난 적 없는 라시드에게’라고 감싸주는 누나의 헌사를 읽고 얼마나 고마웠을까.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해준 가족들의 말을 듣고 싶었을 이 책의 저자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심정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형 아민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리뷰를 마친다.

(P.357) 나는 어둠과 정적이 일종의 지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지배자들이 음악을 금지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없앤다 해도 슬플 것 같진 않다.
슬픔에도 좋은 점이 있다. 마가(어머니)나흘 전에 떠나면서 고통에 종지부를 찍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