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 - 2024 공쿠르상 수상작
카멜 다우드 지음, 류재화 옮김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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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군부 중심)와 이슬람주의 세력 간의 충돌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알제리 내전.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룬 점과 번역가 류재화님이 옮기셨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고민 없이 책을 집어 들었다. 작년에 샤를로트 델보의 《우리 중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를 통해 경험한 류재화님의 섬세한 감각이 깊이 인상에 남았기 때문이다. 참혹한 현실 속, 그때의 기억을 지닌 사람들의 말해질 수 없는 슬픔과 트라우마, 그리고 감정의 흔들림이 마치 잔잔한 빛살처럼 가슴에 스며들어 시처럼 읽혔다. 읽다가 숨이 멎는 듯한 순간도 있을 만큼 그 정서적 울림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고, 이번 알제리 작가 카멜 다우드의 《후리》에서도, 류재화님의 세심한 번역 덕분에 원작이 담고 있는 고통과 감정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흩날리는 하얀 천. 알제리 내전의 잔혹함과 달리,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지는 이 책의 표지만으로도 전하고 싶은 뜻을 헤아려보게 된다. 한 조각 천이지만, 숨죽인 세상 속에서 자유를 향해 흔들리는 저항이 담겨 있는 듯했다. 전쟁과 비극 속에서도 길을 찾아 나서는 인간의 굳센 마음과, 동시에 처연한 마음을 함께 느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각 부가 고통이 밀려오고 마음이 아려오는 순간에 숨구멍이 되어주듯 여러 장으로 나뉘어 있어, 천천히 숨을 고르며 읽을 수 있었다.

“난 한 권의 책이야. 서서히, 내가 너를 위해 빛을 밝혀 줄게. 왜냐면 내 안의 언어가 마침내 나 아닌 다른 출구를 찾아냈거든. 그게 뭔지 알아? 바로 너한테 있는 두 귀야”

‘오브’라는 이름의 여성이 자신의 뱃속 아기에게 속삭인다. 그녀가 내는 소리는 분명 내 귀에는 닿지 않을 말일 것이다. 다섯 살 때 테러리스트들에게 목이 잘린 뒤 성대가 손상되어 목소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온갖 손짓과 몸짓과 표정이 결합해 터져 나오는 그 소리에서 부드럽고 고운 숨결이 느껴진다. 불안의 흔적처럼 차디찬 떨림까지도. 사랑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그녀의 가슴은, 기억이 금지된 곳의 이야기를 드러내려 한다. 이는 침묵을 강요하고 잊으려는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 것이다. 존재 자체가 증언인 그녀가 기억을 되살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곳, 내 머릿속에선, 내 기억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 단어들이 줄줄이 나와. 바깥 세상을 마주할 때 내 안의 언어는 정교함의 경이, 그 자체야. 그 안에서 저 옛날이야기가 꿈틀거리며 되살아나. 그 경이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거의 모든 것이 태양 없이도 빛날 거야. (p. 20)

오브의 뱃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녀의 어머니 하디자는 유명한 변호사다. 한 간호사 부부에게 입양되어 자란 그녀가 내전 중 학살로 일가족을 잃고 홀로 생존한 오브를 입양했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목숨을 건 일인 이 나라에서, 오브를 어떤 마음으로 키워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혼자서 딸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티는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그 불안과 두려움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딸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그녀의 마음은 분명 느껴진다. 하디자는 딸의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성대 이식과 후두 복원을 꿈꾸며, 세계 각국의 의사들을 찾아다닌다.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그녀는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 한다. 사람을 구하는 판결을 위해 법정에서 강하고 열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하디자가, 목소리를 잃은 딸을 바라보는 심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오브가 마음으로 속삭이는 혼잣말을 들여다보는 동안,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 이 이야기가 소설로 탄생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브의 목에 남은 내전의 상처만큼 끔찍한 현실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오브의 현재 삶을 따라가 본다. 내전에서 희생당한 생존자들에게 국가가 내민 조건은 연금을 받느냐, 아니면 관청에서 지급하는 상업 시설을 얻느냐였다. 오브는 연금 대신 미용실의 소유주가 되었다.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를 안겨주는 듯 보였지만, 그 겉모습 뒤에는 침묵이라는 무거운 대가가 숨어 있는 건 아니었을까?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에게 받은 손에 쥔 세 알의 약. 목구멍 속으로 삼키면 언제든 뱃속의 아이, ‘후리’를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 짧은 원피스만 입어도 생명이 위태로운 이곳에서, 오브는 단 하나, 아이를 이 위험한 세상에 내놓을 수 없다는 결정을 붙들고 있다.

뭘 원해? 여기 와서 죽은 살덩이가 되고 싶어? (p. 66)

아직 콩알만 한 후리에게는 설명이 필요하다. 귀가 생겼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생명을 향해, 어떤 때에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 오히려 살리는 일이 되어버리는 이 잔인하고 기막힌 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오브는 한 아이에게 닿을 설명을 준비하듯, 우리를 또 다른 여성들의 삶으로 데려간다. 미래에 대한 기대를 쉽게 품을 수 없는 곳, 사방에서 위험이 도사리는 어둠 속을 지나고 있는 여성들의 삶으로.

오브의 미용실에서 함께 일하는 두 여성, 침묵을 지키는 하난과 재치 있고 유쾌한 메리암. 나름의 사정을 지닌 이들의 삶이 그저 연약하고 애처로운 숨결처럼만 묘사되었다면, 그 삶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은 때때로 버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다르다. 세 여성 모두 자기 안에 분명한 언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언어는 때로 위로가 되고, 잔잔한 미소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런 모습이 반가웠던 나는 잠시 오브의 미용실 단골손님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을 원한다면 조용히 함께 앉고, 잊히지 않는 과거를 꺼낸다면 함께 분노하고 싶다. 서로를 조금씩 흔들어 주며 마음이 굳지 않도록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애처로운 시선 대신, 하난과 메리암에게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 오브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강인함이 든든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난과 메리암의 삶을 향한 절실함을 깊이 이해했을 오브는 주변을 세심하게 바라볼 줄 아는 여성이다. 조각난 고향의 기억을 온몸에 남긴 그녀. 문신을 하고 담배를 피우며 염색한 머리로 히잡을 쓰지 않는 여자들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한다고 흥분하는 일부 이슬람 신도 남자들을 향해, 세 여성이 터뜨리는 웃음. 이야기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 중심의 알제리 사회에서 그 반란의 기쁨이 담긴 웃음을 마주하고서, 내가 어찌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제서야, 오브는 나에게 아무도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한다.

“난 내 꿈속에 머물고, 그 꿈속에서 다른 이의 꿈속으로 들어가고, 내 발자국은 야자수 가지에 쓸려 사라진다”


얼마 전, 늦은 밤 내 방 창문 밖에서 ‘쿵’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고, 숨을 죽인 채 혹시라도 이어질지 모를 바깥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소리였다. 하지만 이란과 이스라엘의 군사 충돌 소식이 연일 뉴스를 통해 전해지다 보니, 세상의 먼 전쟁 이야기가 내 일상 속 작은 소리에도 스며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 우리나라에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예전 같으면 엉뚱한 생각처럼 여겼을 상상이지만, 이제는 그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든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졌다. 전쟁이 나 피난을 가야 한다면 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싸야 할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에서 시작해,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모든 것이 아쉬우면서도 한없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허무함으로 이어졌다. 나의 생명이 마치 보증수표라도 되는 것처럼 오직 일상만을 걱정하고 있던 그 순간, 여러 감정이 뒤엉켰다. 그리고 안전한 양지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내는 나와, 매 순간이 살얼음판 같은 누군가의 하루가 겹쳤다. 나 자신을 향해 비위가 뒤틀리는 듯한 불편하면서도 부끄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비극과 고통을 담은 이야기는 반복해서 읽을수록, 그 안에서 인간이 겪는 삶과 죽음, 두려움과 결심이 조금씩 더 가까이 느껴진다. 단순히 과거의 기록만이 아니라, 오늘 하루가 녹록지 않아 숨조차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틈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들에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 읽게 될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처와 고통 속에 남겨진 목소리를 느껴주는 것뿐이다. 나는 그 아픔과 고통을 함께 느끼며 읽어주고 싶다.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눈을 하고 바라보는 대신에 말이다.

내 안에 무엇이 죽어 있는지, 무엇이 살아 있는지 알려면 내 몸을 더듬거려야 해. 그래야 어떤 부분이, 또 어떤 다른 부분이 더이상 숨을 안 쉬고 있는지 알 수 있어.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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