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8
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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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현실이야. 우리는 현실 속에서, 바로 여기서 살아야 해. 계속 살아야 한다고”

지브릴은 그토록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고 바랐던 신을 보게 된다. 비록 기대했던 전능한 신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신성한 ‘말씀’의 축복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심을 버리고 나니 새로운 결심이 빈자리를 채웠다. 천사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겉모습이 아니라 실체가 보인다. 이 도시를 구하리라. 이 도시, 진짜 런던. 악의 힘이 얼마나 완강한지 실감할 수밖에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진 도시의 주민들을 바라보며 선을 널리 펼치겠다는 결심을 더 굳혔다. 앞서 1권에서 내출혈로 죽을 고비에 처했다가 회복과 동시에 ‘믿음’을 잃었던 지브릴. 비행기 추락사고 이후 천사의 모습으로 변신한 무신론자 영화배우 지브릴 파리슈타가 천사의 역할로 활동했던(?) 꿈에서 더 나아가 현실에서도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환상이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고? 대천사 지브릴의 존재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그의 꿰뚫는 시선을 떨쳐버리지는 못한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나면 개운해지면서 꼭 해야만 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전달받아 대천사 지브릴과 하나됨을 느낀다. 오호! 분명 그럴싸한 변화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앗! 영 기대치에 못 미치는 현실이 이어진다. 게다가 지브릴의 머리 뒤에 환하게 비치던 황금빛 후광마저 꺼져버렸다. 뭐지?

여기 이렇게 천상의 존재가 나타났건만, 눈부신 빛과 선을 뿜어내는, 빅벤보다도 거대한, 템스강 양쪽에 발을 걸칠 수도 있는 거인 같은 대천사가 나타났건만, 저 조그마한 개미들은 여전히 교통방송에 귀를 기울이며 다른 운전자들과 말다툼을 벌일 뿐이었다. ˝나는 지브릴이다.˝ 그의 목소리는 강변에 늘어선 빌딩들을 뒤흔들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흔들리는 건물에서 지진을 피하려고 뛰쳐나오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눈멀고 귀먹고 잠든 자들. (p. 71)

최악의 바람둥이 영화배우 지브릴을 애인으로 둔 알리의 이야기도 조금 해야겠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람이라면 자신의 죽은 남편만 떠올려도 진절머리가 나는데, 소중한 딸의 애인이 최악의 바람둥이 영화배우, 그것도 이제는 회까닥 돌아버려 천사라고 말하는 지브릴인 것이 못마땅하다. 지브릴에게는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기란 힘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으로밖에 안 보이니 말이다. 알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으며 안정을 찾아보지만, 연속적인 꿈은 여전했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인 아랍어로 된 시를 읊어대는 등 결국 ‘천사’를 또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영화계의 슈퍼스타였던 지브릴에게 다시 영화를 찍을 기회가 찾아온다. 인도 라자스탄의 시소디아 왕조에서 따온 이름인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영화감독 ‘시소디아’를 만나게 된 것인데, 시소디아는 지브릴의 요양 기간 동안에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상자를 가져와 중국식 사탕옥수수부터 봄베이식 요리까지 골고루 맛보게 해주며 회복을 돕는다. 화려한 제국이면서도 외부의 침략을 많이 받은 라자스탄의 역사처럼 시소디아는 지브릴에게 다시 한번 화려한 영화계에 발을 담그도록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느낌상 평탄하게 잘 굴러가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다. 어쨌든 지금은 알리가 집을 비워야 할 때 지브릴의 곁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의 모습이다. 단지 혀만 짧을 뿐이다.

“괘괜찮아요. 돗돗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잇잇 있을게요. 지지브릴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건 오히려 틋틋 특권이니까.” (p. 80)

이래나저래나 지브릴은 살만한 것 같은 분위기인데 애처로운 우리의 염소? 악마? 참차는? 머리에 뿔이 달린 털복숭이 악마이지만, 어딘가 애처롭게 느껴지는 참차의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해 본다. 이런저런 과정을 겪고 난 뒤, 다시 인간의 모습을 찾은 참차! 지금 그는 자신이 살던 집 골방에 틀어박혀 언젠가 자기 부인과 함께 읽었던 단편 소설을 떠올린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나 구멍 크기만 봐서는 내상이 얼마나 심한지 가늠할 수 없어.”라고 말한 소설 속 인물의 말을 떠올리며 세상의 온갖 눈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다. 나와 당신이 타인의 삶을 헤아려보듯이 말이다. 평범한 삶을 회복하겠다는 소망과 모순되는 현실의 일면들에 주저앉아버린 시간을 갖고 난 뒤에 참차는 분명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의 진부함과는 전혀 양립할 수 없는 그 모든 일이 날이 갈수록 어쩐지 터무니없게만 느껴졌다. 얼굴에 물을 끼얹고 이를 닦고 무엇이든 진하고 뜨거운 것을 마시고 나면 제아무리 끈질긴 악몽도 저절로 잊히듯이. (p. 174)

참차의 삶을 들여다보는데 결국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동질감과 측은함이 밀려왔다. 나는 실제로 용기가 부족하고 무언가를 바꾸려 한다기보다는 관조하며 인정하는 태도에 더 가까운 사람이라서 참차의 삶에 더 관심을 두고 읽었다.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결국엔 원하는 삶에 가까워졌지만, 내 맘처럼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삶이 아니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비행기 사고를 당했고, 또 기적처럼 살아났고, 그러나 그 기적이 불행의 씨앗이 되어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던 그의 삶도 참 고단하다. 뿔 달린 악마의 모습을 했을 때, 사람들은 참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고 편견을 갖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은 채 상처를 주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건 ‘순응’이었다. 모든 것을 감수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듯 구태여 숯검정 같은 속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더 짠하다.

예전의 삶을 재창조하려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사실을 되돌릴 수 없음을 이해한 것이다. 참차는 골방에만 틀어박혀 온갖 괴물들이 튀어나오는 텔레비전 채널을 마구 돌려본다. 마치 언젠가는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점점 빠르게만 변화하는 세상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수많은 비극 속에서 영국 땅에 자리 잡았다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의 의식적인 노력과 속세에 초연해진 듯한 모습은 무언가 휩쓸고 지나간 뒤 남은 좌절감과 고독함을 더 드러냈다. 그러나 참차는 허무와 패배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보여준다.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그가 세상에 다시 뛰어들게 만든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나 역시 처한 상황을 타인과 연관 지어 더 깊게 파고들고 괴로워하고 분노하는 것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한다고 생각해서 비우려고 하는 쪽이다 보니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온 참차의 발걸음이 내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었다. 어쩌면 지브릴을 만난 뒤로 겪은 시련으로 인해 그의 존재 자체가 참차에게는 최악의 인연처럼 여겨지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삶을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강인함을 얻게 되었을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나는데, 분명한 것은 선택은 내 몫이라는 것이다.

워낙에 이야깃거리가 많아 인상 깊었던 것 한두 가지만 더 말해보자면, 이 소설은 막바지에 이르러 1666년 런던 대화재 사건부터 1879년 대영제국과 줄루 왕국 간에 일어난 줄루 전쟁까지 과거의 역사를 연결 지어 현재 런던의 한 카페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으로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이곳에 지블리와 참차가 있다. 사방에서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치솟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각자 본성을 드러내는 선택을 한다. 실제로 런던 대화재 사건은 영국 시민들이 악마의 숫자 666이라 하여 분명 이것은 신이 내린 재앙이라 보고 가톨릭교도를 공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빵집에서 일어난 불이 도시로 번졌던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재앙 속에 인간의 위대함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재건 작업을 위해 시민들이 연대하였고 정치 시스템은 여러 목소리를 수렴하였다. 결국 질서가 무너지고 공포로 가득 찬 분열한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듯한 이 장면이 2권의 핵심 중 하나가 아니었나 싶다. 온갖 환상과 기괴한 설정에 정신없이 따라가게 만들지만, 결국 헤매며 따라갔던 내 두 발이 딛고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명확하게 보여주니 말이다. 지브릴의 꿈속 이야기 중에 대천사 지브릴의 계시를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인도 농촌 마을에 사는 소녀 아예샤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걸어서 메카로 순례를 떠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거부와 수용, 만류와 설득이 오가면서 위기와 기회가 공존했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종교적 신념의 충돌을 담았다. 단순히 신념 차이로만 바라보기에는 종교적 대립이 사회적 요인과 얽히면서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조금은 갑갑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야만 했다. 물론, 각자의 신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것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종교 권력의 문제만을 드러냈다기보다는 분열한 세계를 포용하는 손길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으로 읽혔다.


저자의 도발적이고 위험한 발상이 누군가에게는 자극으로 다가갈지도 모르겠지만, 언어의 자유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나 또한 이 책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는지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주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루슈디의 다른 소설보다 특정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가 살아온 삶, 살아가는 삶,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고 느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지배에 따라 움직이며 현혹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환상과 종교와 관련한 믿음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 삶에서 통제력을 상실하거나 삶의 균형이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많지 않은가. 거창한 것뿐 아니라 매스컴 등 사소한 일상과 연결되는 것들에서 너무나 쉽게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정신 사나움? 나는 오히려 이런 설정과 역사와 신화가 섞인 복잡한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늘에 헬리콥터들이 몰려오던 모습을 목격했고, 여기저기서 물대포가 사람의 머리를 향하고 있던 모습도 보았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당하고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당하는 사람을 보았다.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한 일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이들의 모습도 함께 보았다. 온통 분노에 휩싸이고 온갖 사건이 줄을 잇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 용기를 내는 것이 점점 갈수록 두려워져만 가는데, 누군가 우리를 향해 전속력을 다해 돌진한다. 목소리를 잃고 가장 힘겹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대신해 주는 이들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향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이를 주시하는 자들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 염려되어 아슬아슬하기만 한대, 그럼에도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바라보니, 분명 그들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살만 루슈디도 마찬가지다.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위안을 삼는 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는 그의 용기가 값지다.

나의 지적 수준이 루슈디의 발뒤꿈치에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눈만 끔벅거리며 읽는 순간도 종종 있었지만,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 시대의 설화라든지 그가 영향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에 개인적으로 루슈디의 작품 중 가장 읽기 수월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할 책이었다. 만약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어봤더라면 그의 다른 책으로 손이 쉽게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고 나름 팬심을 가진 상태라 평균 이상의 ‘좋음’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안개 속을 거치면서 끝끝내 밖으로 나오는 수고와 노력을 할 수 있었다. 2권의 후반부로 가면 신화와 역사가 뒤섞인 이야기, 마치 상상 속 이야기가 현실 세계로 빠져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뒤죽박죽 정신을 흔들어 혼란스러움을 겪은 독자의 널뛰는 감정에 ‘죽음’이라는 경건함과 장엄함을 느끼게 하는 주제가 담긴 서사가 더해지면서 코끝을 찡하게 만들어준다. 아주 잘 읽었다. 작품 바깥의 소음에 휩쓸려 소홀히 대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소중한 작품이라는 번역가 김진준 님의 글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마지막 장을 덮었다.

삶을 되비추는 거울인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면 삶의 모든 원망과 다툼, 그리고 질투심을 씻어내려 준다는 것을 경험했던 살만 루슈디. 복수를 용서로 극복했던 사람.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이들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깨달을 때쯤이면 너무 늦는다는 것, 이 가혹함을 경험하지 않길 바라는 그의 진심이 녹아들어 있는 소설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숭고해질 수 있는 존재다, 우리는 아직도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는 존재다” (p. 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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