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타치오 바닐라 향’ 커피 캡슐을 골라 얼음과 두유를 넣고 내려 한 모금 마셨다. 크레마가 풍부해 목 넘김은 부드럽고 피스타치오와 두유가 만나 고소함이 배가 됐다. 거기에 은은한 바닐라의 향과 인위적이지 않은 달콤함까지 아주 맛있다.
맛있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집어 든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이라는 에세이는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세 작가가 서울, 도쿄, 베를린에서 같은 기간 동안 각자 쓴 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1년 동안 써온 글을 모은 것이다. 아니, 이렇게 서로 붙어 버렸다고 한다.
나는 지금 골방지기가 되어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이 세 사람의 초대에 기꺼이 응해주는 사람처럼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책장을 넘겨보니 각자의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간 이들을 초대하고 찰나의 생각들을 담은 걸로 보인다. 각각의 스타일이 묻어나는 세 사람의 솔직한 감정을 담은 일기를 허락받고 살짝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부담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다가가 본다.
예전에 스트레스와 이런저런 걱정으로 불면증을 잠시 앓았는데 ‘서울의 박솔뫼’도 그랬나 보다.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이었다는데, 고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서는 종종 잠이 안 왔다고 한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옆으로 몸을 살짝 돌려 누웠을 때, 그 어느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에 빠지면 수면과는 점점 더 멀어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 못 이루는 밤은 이어진다.
아니 그런데, 이거 정말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이 안 올 때 자려고 노력하지 말고, 오히려 안 자려고 노력해 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심리적인 걸까?
내가 얼마나 안 자고 버티는지 보자!!! 하는 마음으로 버티는 것이 정말 수면에 효과가 있을까?
바다는 모든 물을 다 받아들인다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포용하고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는지 모르겠다. ‘예민해서 그런 거라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한다’라는 세트처럼 묶인 말을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중언부언 길어지면 가열된 나의 가슴에 또다시 불씨가 타올라 펄펄 끓기만 하고, 괜히 억울해서 두 눈에 눈물만 뜨겁게 차오르곤 했다. 이는 반드시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고.
그땐 그랬었다.
지금은 이렇게 잠만 잘 자는 것을 말이다.
(P. 13) 그러니까 가위눌림 같은 것, 시간이 지나서야 정체가 어렴풋하게 파악되는 것, 파악되었다고 착각하는 것들을 조금 안정감 있는 자세로 받아들이려는 시도인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데 그리고 어디에 있게 될 건데 그것은 그렇게 되어 버리는 일이라는 것.
‘도쿄의 안은별’은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는 것, 혹은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루틴이라 해도 매번 새로운 단 한 번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보다 아무것도 안 했으면 좋았을 텐데, 혹은 좀 더 생산적이었어도 좋았을 터라는 아쉬움을 내비친다. 그러게, 나도 무척이나 많이 했던 아쉬움 중 하나라서 공감이 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없어 지겹다는 말을 입 밖으로 자주 내뱉고는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조금 화끈거린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당연하게 내일도 주어질 거라는 그 오만함이 얼마나 경솔한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될 수 있으면 특별할 게 없는 (특별하지 않은 게 더 좋다. 평범한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걸 이제는 안다.) 오늘을 아쉬워하지 않고 조금 더 즐거운 마음으로 채우고 싶다. 그녀가 내리고 싶지 않은 기분으로 차창을 바라보며 내릴 역에 다다르지 않기를 바라는 그 묘한 간절함, 편안함을 느끼며 공간과 장소를 채워보듯 말이다.
나는 거창한 거 말고 내 방 안으로 들려오는, 거실에서 TV를 보는 가족의 웃음소리 반복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P. 18) 그 어떤 것도 그 시간과 공간을 완벽하게 반복해 주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이 에세이집을 내기 전, 세 사람이 주고받은 메일을 보니 한참 코로나바이러스가 유행했던 시절이었더라. 한순간에 자유로움이 막혀버린 시간, 그리고 누군가는 쉽게 떠올리지 못할 만큼 모든 것이 무너졌거나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예기치 못한 혼란스러움에 서서히 적응해 나가던 나의 모습과 사소한 것조차가 너무 그립고 간절했던 마음까지도.
‘베를린 이상우’는 ‘조르조 모로더’의 9분짜리 트랙을 듣고 있다.
그 순간 주변은 1970년 베를린의 디스코텍으로 바뀌고 한 테이블에 앉은 조르조와 마주하며 미래의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 혼자 기타를 치는 이탈리아 소년이었던 그의 여정에 빠져본다. 독일에도 강도 높은 제재로 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질병으로부터 안전했던 그 시절의 안락함이 그리움으로 다가와 조르조의 목소리를 듣게 하였나 보다.
나는 근사한 오디오와 스피커가 없어 현실은 휴대전화 속에 들어있는 곡이 헤드셋을 통해 내 귀를 호강시켜 주는 게 전부이지만,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다. 특히, 클래식을 재생시키면 나 자신이 고상하고 우아해진 것 같은 착각에 단단히 빠진다. 광활한 우주가 펼쳐지며 내 마음을 두드리고, 어루만져주고 머릿속에서 광광 울려대는 폭발에 압도되는 그 벅찬 감정. 환상이면 어떤가.
(P. 36) 꿈에서 깨어나듯이 혹은 꿈속에서 깨어나듯이 단지 감았던 눈을 떠 보니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트랙을 재생하자마자 우리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그러나 괜히 익숙한 레스토랑에 앉아,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조르조를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 시절 어디선가 기침 소리만 나도 도끼눈을 하고 서로 쳐다보며 의식했던 기억이 난다. 잠옷 그대로 노트북을 켜기만 하면 됐던 재택근무가 처음에는 아주 좋았다가 점점 걸려 오는 업무 전화도 귀찮아지고 업무처리의 한계도 있고 사람도 무기력해져, 차라리 출근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었던 그때의 기억. 그리고 규제가 완화돼 길거리를 걷다가 아직은 마스크 벗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그때, 술집과 음식점을 가득 채우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왠지 좀 낯설고 위험해 보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찰나의 순간을 놓아주지 말고, 그때의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이라도 이따금 써 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 삶을 채워준 추억 속에 잊을 수 없는 고맙고 소중한 기억도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희미해지고 마음에선 안 그런데 삶을 살아가다 보면 놓치게 되더라. 그럼, 아쉬움을 되풀이하지 말고, 기록을 통해 스쳐 지나간 사람과 공간과 장소를 다시 마주해보는 거 어떨까.
이 와중에 너무 뜬금없지만 ‘금값이 이렇게 많이 오를 줄 알았더라면 그때 좀 사둘걸’과 같은 엉뚱하지만, 현실성 있고 실속 있는 과거의 나 자신이 적은 글을 읽고 나중에 씩 한번 웃게 될지도 모른다. (풉!)
(P. 76) 순진한 기다림으로 놓친 것들이 많은 것 같다. 너무 늦기 전에, 적어도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이 잊어버리기 전에 짧게나마 써 둔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기간, 각자의 방식으로 채웠던 일상의 조각과 감정을 붙여보는 새로운 대화법. 이 세 사람이 우정을 채워나가는 방식이 꽤 낭만적인 것 같다.
그리하여, 내 친구들에게 서로 같은 기간 동안 찰나의 감정을 담은 글을 공유해 보자고 제안해 보면 뭐라고 할지 잠시 머릿속으로 상상해 봤다.
나의 안색을 살피며 대꾸도 없이 뒤통수만 보일 것이 분명할 이 ‘비생산적’인 생각을 내가 잠시라도 왜 해 봤을까 싶지만, 그럼 꼭 친구가 아니더라도(빠른 포기) 사람들과 새로운 대화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것처럼 잠시 눈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본다.
돌이켜보니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순간들이 많다.
아직은 ‘돌이켜보다’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후회와 아쉬움의 색이 짙다.
박솔뫼 작가님이 이제는 곁을 떠난 아빠를 떠올리며 후회의 마음을 적어 내려갔다.
그래서인지 다 알 수는 없기에 조심스러워하지만, 진심만큼은 선명했던 그녀를 향한 친구의 일기는 더 따뜻하게 읽혔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그 모습을 감추어도 또다시 어둠을 뚫고 빛이 오르며 해가 뜨는 것처럼, 그 후회와 자신을 향한 원망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위로하며, 의지하며 살아간다.
그때의 아빠도 분명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거다.
지금 그녀가 친구의 마음을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의 일상 속 찰나를 채우고 있는 많은 것 중 공통된 것이 있다면,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거다. 그 기억의 대상은 가족도 있고, 지인도 있지만, 이 시간 여전히 전쟁 속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서 이 세 사람과 스쳐 지나간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읽다 보니,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왔다.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남은 이야기를 마저 읽어야겠다. 그리고 한동안 치워져 있던 일기를 다시 꺼내, 단 몇 줄이라도 남겨볼까 한다.
(P. 54) 단지 나를 위해 남겨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