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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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emma] 서평 - 먹을 것의 즐거움이 인간을 구할 수 있을까?

 

좋은 버릇인지 나쁜 버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책을 집을 때 마다 책장을 넘기기 보다는 잠시 공상에 빠지곤 한다. 특히 책 제목이 주는 ‘상상의 재료’ 혹은 ‘백일몽의 단초’는 언제나 내게 독서를 시작하기 위한 좋은 시작점이다. 이 책의 제목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몇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먼저 Omnivore (잡식 동물)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잡식 동물이라는 말은 고기를 주식으로 살아가는 동물도 아니고 채식을 위주로 살아가는 동물도 아닌 두가지 모두를 먹을 수 있는 동물을 말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잡식동물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왠지 약간은 게걸스럽고, 욕심이 많을 것 같고, 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 잡식 동물은 마이클 폴란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쥐와 인간 등이 있다. 어쩌면 인간과 쥐가 전 지구 상에 가장 넓게 퍼져 있는 포유류 동물인 이유는 두 종 모두 잡식 동물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지적은 꽤 재미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시 다른 우스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쥐라는 동물은 얼마 전에 한 친구의 추천으로 보았던 라따뚜이 (ratatouille) 라는 에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이미 책을 읽고 난 이후라 이 책과 얼마나 이 에니메이션이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약간은 웃음 섞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 미각을 가지고 태어나 요리를 배우는 쥐, 상상력 속에나 있을 법한 ‘레미’라는 이름의 이 쥐가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했던 일은 먼저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사실 저자 마이클 폴란이 말하고 있는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가장 큰 부분이 바로 무엇이나 먹을 수 있는 잡식동물들이 독을 가려내야만 하는 그래서 가리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이 역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쯤에서 여담은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하자. 서문에서 마이클 폴란은 ‘이 책은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라는 단순한 물음에 대한 꽤 긴 대답.’이라는 역시 저널리스트다운 상당히 재치 있는 한마디로 책을 소개하고 있다.

국가적 섭식장애. 이것이 바로 현재 미국 사회의 음식문화에 대한 저자 대한 나름의 진단이다. 미국인들은 어떤 나라보다 비만으로 유명하며 다이어트에 누구보다 관심을 가지고 탄수화물만을 섭취하는 다이어트니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만으로 하는 앳킨스 다이어트니 하는 별별 방법들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미국인들이 생각하기에 살이 찌거나 성인병에 걸릴 수 밖에 없는 버터와 고기 위주의 식사를 하는 프랑스인들은 비만인구가 적다. 이것이 프랑스인의 역설이라는 것인데 여기서부터 저자는 관심을 미국 내 음식문화의 세가지 흐름으로 돌리게 된다. (사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두가지 딜레마 혹은 역설에 직면하고 있다. 프랑스인의 딜레마는 이미 언급되었고 나머지 한가지는 미국인들의 딜레마 ? 어떤 다이어트를 해야 살이 빠질 것인가 ? 하는 문제이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인의 딜레마가 훨씬 마음에 든다.)

저자 마이클 폴란이 추적한 첫번째 음식 사슬은 산업적으로 생산된 식품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현대 미국인들은 고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나후아틀어를 쓰던 아즈텍인들 보다 더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다. 소와 돼지, 닭 등 인간을 위한 정육을 제공하기 위한 가축들은 옥수수에 의해 키워지고 모든 조미료 및 당미료는 옥수수에서 추출한 고과당 (HFCS: High Fructose Corn Syrup) 에서 나온다. (정도의 차가 있겠지만 알고 보면 우리 사회 역시 미국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식품 산업의 최대 수혜는 미국의 군산복합체 및 식품 업체들이 얻고 있고 이런 과정에서 농민, 토지 및 동물들은 이루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 및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연쇄의 근저에는 석유가 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 국민이 소 한마리를 먹을 때 약 25 부쉘의 옥수수 혹은 1 배럴의 석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패스트 푸드를 먹을 때 느끼는 질감과 풍미가 사실은 석유의 맛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보면 상당히 섬뜩하기까지 하다. 

두번째 음식사슬은 유기적 사슬 (Organic food chain) 이다. 유기농의 시작은 사실 산업적 이윤 추구를 위해 지극히 단순화된 식품산업 구조에 대한 대안적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안으로 고안된 유기농업 마저 수익을 좇는 형태가 되다 보니 이미 새로운 식품산업이 되어 있었고 음식을 음식의 위치가 아닌 여전히 수익을 내기 위한 도구의 위치에 두게 되었다. 물론 종래의 식품산업에 비하면 훨씬 환경이나 소비자들의 건강을 위해 좋은 형태의 식품을 제공하지만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산업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비해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은 보다 낳은 형태의 식품 생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농장 운영에 대한 농장주의 경험 및 지혜는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으며 미국에서도 이런 형태의 로컬 푸드 운동이 정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세번째는 전원적 혹은 수렵, 채집에 의한 음식 연쇄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채식과 육식에 대해 육식을 할 때 닥칠 수 밖에 없는 가축의 도살, 그리고 그 때 겪을 수 밖에 없는 양심의 문제에 관해 공리주의 및 다른 철학자들의 시각을 빌어 생각해 보고 있는데 이 역시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한가지가 될 수 있겠다. (솔직히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펼쳐지는 지나치게 이상적 혹은 현학적 논쟁이 책 전체의 내용에서 사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저자의 사냥과 버섯채집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데 야생돼지 사냥 후에 고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역겨움과 돼지를 요리할 때의 즐거움의 역설, 버섯을 먹는 즐거움과 또한 독버섯을 먹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두려움의 역설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으로 요리와 즐거운 저녁식사로 마무리 한다. 어쩌면 마지막 장에서 보듯이 요리라는 행위 그리고 즐겁고 좋은 식사라는 행위는 잡식동물로서의 인간이 대면할 수 밖에 없는 모든 딜레마를 조화시키는 해결 수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먹는 것은 우리 문화의 근저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성욕보다는 식욕이다.) 매우 고도의 생태학적 정치적 행위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사회가 식품의 산업화를 통해 음식의 연쇄에서 모든 복잡성을 배제하고 매우 단순한 형태로 환원하면서 토양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생물학적 다양성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미국 사회는 군산복합체에서 식품산업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카길, 몬산토, 타이슨 푸드 등의 이익을 위해 미국인들의 건강을, 환경을,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매우 고도의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행위가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 그리고 미국화 (석유화) 가 세계화로 인식되고 있는 현대에 어떤 심각한 대가를 요구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문명의 흥망에 관해 살펴봄으로써 현재 우리 인류가 점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 돌아보는 자레드 다이아몬드의 2005년 저 ‘콜랩스’와 맥이 닿아있다. 자레드 다이아몬드는 '콜랩스'에서 어떤 문명 (혹은 사회) 은 아주 미미한 형태로라도 살아남았지만 거대한 석조 구조물을 만들 만큼의 힘이 있었음에도 현재에 있어서는 멸망한 문명과 화석과도 같은 유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로 전락해 버렸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다이아몬드의 답은 멸망한 문명들은 명백한 위기의 징조 (문명이 지속되던 지역의 자연환경이 파괴되거나 혹은 기후의 변화) 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살던 방식의 관성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지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기간은 순간이 아니었다. 진화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류의 출현과 한 시대를 풍미하고 명멸했던 문명들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문명의 멸망은 절대 문자 그대로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마이클 폴란은 현재 우리 인류가 처한 음식문화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산업화된 음식문화가 지구의, 좀 더 정확히는 인류가 처한 위기에 일조하고 있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위기에도 지구 자체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 지구와 생태계는 과거에도 이런 위기를 얼마든지 겪어오지 않았나. 단지 이런 위기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은 특정 종의 생물일 뿐이다. 예를 들면 공룡 같은...)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읽으며 잠시 다이아몬드가 현대 문명에 대해 언급한 문명 붕괴의 가능성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종래의 식품 산업이 고도로 석유화되고 있고 대안이라 생각했던 '유기농' 마저 그에 발맞춰 산업화, 석유화의 물결을 타고 변질되고 있다.

 

'콜랩스'에서 다이아몬드는 현재 우리 인류가 처한 위기에 대해‘과거 석기와 동물의 힘이 없이 순수한 인간의 노동력만으로도 번성하던 한 문명을 멸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석유를 에너지로 쓰는 엔진과 매우 고도화된 연장을 쓰고 있는 60억 인류는 어떤가? 지구는 고립되어 있고 멸망해 버린 이스터 섬의 사회 같이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없다.’라고 말한다. 지구가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인 것은 분명하고 (적어도 우리의 현재 지식의 한계 내에서…) 현재 인류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너무나 분명히 파국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대의 인류에게는 신적 존재의 개입 혹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석유를 먹고 사는 현대 인류가, 미국화, 세계화, 궁극적으로 석유화에 길들여진 우리가 단순히 미디어, 교육, 그리고 몇몇 양심적인 회사의 양식있는 운영에 고무되어, 선거를 통해 그리고 정부를 향한 정책변화에 대한 촉구를 통해, 혹은 환경을 망치는 기업에 대한 소비자 단체 행동을 통해 우리가 이미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 멸망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이아몬드의 이런 희망은 왠지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너무나 큰 운명과 절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거 문명 혹은 사회가 멸망할 때 토양의 오염 혹은 토지의 생산성 저하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어떤 문명도 토양 오염 혹은 잘못된 토양관리로 인해 표토가 전부 쓸려나갈 정도의 상태가 되면 문명은 더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토지의 상태를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문명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일까? 마이클 폴란은 현재 우리가 환원적, 산업적 차원에서의 토지관리로 오염되고 있는 토지와 그에 의한 생산성 저하 그리고 그 생산성 저하를 막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 (화석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석유의 사용으로 현대의 인류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었고 동시에 농업을 산업화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석유 에너지의 남용은 막대한 대가의 지불을 요구한다. 토양과 환경의 오염이 그것이다. 이미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불러온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미생물이나 곤충 등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제거해 버렸고 토지가 복잡계를 이루며 토지 자체를 다시 만들어가는 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렸기에 앞으로 이런 행위가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언젠가 화석 에너지가 고갈 되면 우리는 도데체 어디에서 에너지를 가져다가 토양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핵융합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원을 만들어 내던가 혹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의 양을 조절하지 않는 이상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절대 기우가 아니다. 

 

그렇다면 폴리페이스 농장과 같은 산업화 되지 않은 전통적 농업생산 방식 (폴리페이스 농장의 관리법이 매우 발전된 것이기는 하지만 전통적 농업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 현재 유럽과 캐나다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로컬 푸드 운동이 인류를 구원할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농업 분야에서 현대 문명의 석유화에서 벗어나 태양과 대지와 생물의 순환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현재 처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런 골치 아픈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이런 질문은 이미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음식의 연쇄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결론적으로 마이클 폴란이 요리하는 인간 그리고 산업적으로 단순화 시키지 않은 음식문화를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혹은‘산업화 되지 않은’음식문화가 간접적으로나마 길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산업화 되지 않은 음식문화는 적어도 먹을 것에 대해서 만큼은 석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언젠가 이런 예들이 모이고 쌓일 때 미국적 세계화 혹은 석유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대안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즐거움에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인간은 운명의 굴레나 절망스런 미래 같은 암울한 전망 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즐거움에 대해 반응을 보이곤 한다. 어디 음식의 즐거움 만큼 인간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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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5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석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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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위로라는 주제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 어떤 일정하게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작년 한해 우리는 청년에 대한 위로를 주제로 하는 책이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에 등극하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 책 이후로 여러가지 컨텐츠들이 - 심지어는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팟캐스트 컨텐츠들마저도 - 위로를 말하고 있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시구로가 세계 문학계 내에서 상당한 무게를 얻은 여러 책들을 선보인 이후에 쓰인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결코 위로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물론 어떠한 위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당연히 여기에는 어떤 기묘한 역설이 존재하며, 이 역설은 위로라는 제목을 가진, 결코 위로를 말하지 않는 책이라는 역설로,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이어지는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역설'이라는 형용 모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위로를 주지 않는 이 책, 문제를 극한으로 몰고가는 이 책은 아무런 효용도 없다고 말해야만 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 악화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드러내는 위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해, 현대 문학이 드러내는 어떤 이념에 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잠시 이시구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이야기 해 보자. 여느 작가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시구로의 작품들에는 어떤 특정한 정서가 묻어난다. 그가 쓴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이 아니기에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두 작품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나는, 장기 기증용 인간 클론이 허용된 허구적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강제적 장기 공여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필체로 다룬 <날 보내지 마>, 그리고 다른 하나는 2차 대전 직전, 나치 독일에 외교적으로 이용 당하게 된 영국 귀족을 주인으로 모시는 한 버틀러의 이야기를 역시 담담한, 아니 담담하다 못해 정체된, 분위기를 드러내는 <남아있는 나날>이다. 이 두 작품이 공유하는 어떤 필연 혹은 구조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인물들에 대한 어떤 말 못할 답답함과 소설 속의 현실과 인물의 인식 사이에 조성되는 불편함은 상상 이상이다. 


기실 이러한 불편함, 혹은 불안이야말로 현대 문학을 규정하는 특징들 중 하나를 끌어낸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다. 어떤 폐쇄적인 인간의 자의식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철학 및 근대 학문은 지난 세기에 들어 이전에 성취했던 인간에 대한 여러 통찰들에 대한 자신감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여건에 처하게 된다.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는 분명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학살의 기억은 인간을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기억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부정성을 통해서 규정될 뿐이며, 오로지 이전에 구축되었던 일자적인, 다시 말해 일관적인 체계를 부정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 역시 이런 흐름 속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학은 어떤 것을, 하나의 서사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학이 처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결국 완전하게 하나가 될 수 없는, 다시 말해 비일관적인 부분들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할 수 밖에 없으며, 이시구로가 기대고 있는 이 어떤 말할 수 없는 정서 역시 이런 상황 속에서 구축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역시 이러한 정황 내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읽었던 두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소설은 이시구로의 장치인 어떤 말못할 위화감과 답답함이라는 측면에서 앞에서 이야기 한 두 작품과 유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의 작품들이 적어도 현실에 가깝게, 그리고 현실의 구조와 법칙 내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이 작품 속에서는 모든 배치가 뒤틀려 시작과 나중, 나중과 시작이 뒤바뀌어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오직 한 가지는 어떤 악순환에 가까운 무한한 -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는 - 서사적 연속성일 뿐이다. 


1. 불안.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 소설이 드러내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 드러내는 불안은 시작부터 제시된다. 중요한 연주회를 앞두고 중부 유럽의 한 도시에 도착한 세계적인 연주자 라이더가 도착한다. 그러나 호텔 로비에서부터 그를 맞아주는 사람은 없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피아노 연주자로 이 도시 전체가 야심적으로 준비하는 어떤 행사에 초대된 인물이다. 당연히 무언가 이상한 일이다. 어쨌거나 소설의 화자인 라이더만이 이야기하는 그의 일정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시간적으로 또한 공간적으로 일정하게 소화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일정 관리를 담당하는 행사 관계자는 그저 사과만을 반복할 뿐이며, 그는 이상하게 짜여진 알 수 없는 일정을 쫓아갈 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상한 책임들이 자꾸만 더해진다. 구스타프를 비롯한 포터 무리들은 그에게 무언가 그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무언가 모호한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하며, 역시 구스타프의 상식을 벗어난 부탁으로 만나게 된 소피와 보리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에게 더해지는 책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이상하게 그의 앞에 나타나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그는 영국에서 자란 사람인데, 이곳은 중부 유럽의 어느 도시다)은 그의 방문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라이더의 불안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타자의 욕망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의 자리로, 그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어떤 결정불가능한 것의 위치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라깡에 따를 때,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의 욕망에 대한 투영이며, 그런 이유로 나의 욕망의 대상은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은 결코 분명하지 않다. 물론 불안의 대상은 '없지 않다'. 그러나 불안의 구조를 살필 때,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불안의 대상은, 따라서 불안의 이유는 모호해진다. 사람들은 그에게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는 이 불안 속에서 어떤 강박적 증상을 드러낸다.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자신있게 실행하고자 했던 연설들을 할 수 없게되는 그의 모습에서, 갑작스럽게 말이 막혀버린 듯, 말을 잊어버린 듯 한 그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어떤 구원자의 형상으로, 주인의 형상으로 들어선 이 도시에서, 그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도시가 계획하는 어떤 거대한 성공의, 그러나 실제로는, 실패의 장기말이 되고 있다(쉽게 말해 이용당하고 있다). 이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말이다. 그로부터 드러나는 것이 바로 도시를 구조짓고 있는 어떤 무한한 순환, 공간적인 그리고 시간적인 뒤틀림 혹은 왜곡일 것이다.


2. 악무한, 공간과 시간의 뒤틀림. 이어서 우리는 순환과 무한이라는, 전자에 의해 후자가 지배되는 그러한 문제에 가닿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에셔라는 예술가의 작업이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화가의 작품들은 한결 같이 동일한 어떤 주제를 구상화한다. 무한이라는 주제, 그러나 순환을 통해서만 그려내지는 이 무한은, 공간의 그리고 공간의 연장으로서의 시간의 뒤틀림을 구현하는 것이기에, 공간에 불안을 일으키며 그런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 <위로...>라는 작품 속에서 어떤 유사한 순환을, 뒤틀림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1953년 작 <상대성>, 에셔


에셔의 작품이 표상하는 것, 무한을 통한 순환, 우리는 수학이나 과학에서도 그러한 예를 쉽게 발견한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뫼비우스의 띠나 펜로즈 삼각형 등을 기억해 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인식의 구조인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세계의 구조에 관한 문제인가? 어쩌면 <위로...>가 드러내는 뒤틀린 구조를 단순히 개인적 인식의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일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쉬운 길일 것이다. 마치 모든 문제가 개인의 문제, 개인의 심리적 병증인 듯, 사회적 위계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징후를 순치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자아 심리학(ego psychology)'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손쉬운 해결은 뒤틀린 공간에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한 설정을 강요할 뿐이다. 실제로 이 자아 심리학의 문제는 불안을 어떤 현실적인 병증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 증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조적인 것이라면? 


만일 모든 이야기가 일종의 우화라는 것을, 현실(reality)에 대한 반영인 동시에 어떤 현실의 실재(the real)을 드러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시구로가 <위로...>라는 작품을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를 단순한 허구나 개인적 차원의 무의식 정도로 환원해 버리는 길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소설이 말하는 공간들의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 그리고 당연히 가능해야 할 공간의 닫힘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사회에서, 그것도 말로 구성된 상징계의 법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법의, 아니 사법체계의 왜곡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개봉된 <부러진 화살>이 그려내는 법정 다툼이나, 얼마전 법원의 정치적 판결로 인해 현재 투옥 중에 있는 정봉주 전 의원의 판례는 그런 예를 보여주고 있다. 법정에서 법이나 사법체계가 아니라 법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억압되는 정당한 의문제기, 검사나 경찰의 증거 및 증언의 인과관계를 뒤집는 왜곡은, 사회 내에 내재하는 뒤틀림 혹은 왜곡의 좋은 예시라 말할 수 있을 법하다. 구스타프의 포터 무리와의 회합 이후, 컨서트 홀로 향하는 길에 라이더가 만나게 되는 막힌 담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이름 없는 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결코 연결될 수 없는 장소들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정작 열려 있어야 할 곳은 막혀있는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이게 과연 소설적 허구로 치부해버리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까?


3. 위로. 마침내 위로라는 주제로 논의의 방향을 돌릴 때가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위로라는 주제가 제시될 때, 물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일 듯 하다. 먼저, 무엇을 위한 위로인가? 라이더의 불안을 놓고 보자면, 위로의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은 불안에 대한,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부터 오는 불안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도시가, 그리고 그 도시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라이더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어떤 곤란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라이더와 구스타프, 소피와 보리스, 그리고 도시 전체의 문제는 결코 잠시 앉아서 마시는 커피 한잔이나, 케잌, 잠간의 휴식 같은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하지만 소설에서 등장하는 위로는 대부분 이런 것이다). 잠시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보류하고 다음 문제를 살펴보자. 


다음 문제는 '위로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문제는 앞의 질문을 검토할 때 말한 것처럼 '구원'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다시피, 라이더는 일종의 구원자의 형상이다. 그는 능력을 갖춘 주인으로(방문자라는 의미에서 손님이기는 하지만) , 이 도시의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인해 그 역시도 어떤 대상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 사람들 자체가 그가 실행하고자 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방해하고 있으며, 도시가 그려내는 허구적 현실에 포섭되고 있다. 


라이더가 묶고 있던 호텔의 지배인이자 행사 관리자 호프만의 행동이 이러한 문제를 단적으로 예시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우울증과 술에 빠져 살았으나, 과감히 술을 끊고 도시를 되살릴 음악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끌어내기 위해 분투하던 지휘자 브로즈키에게 다시 술을 권하고, 컨서트 홀로 향하던 그를 차로 치었으며, 브로즈키의 실패에 대한 사과의 변을 연습하던 호프만의 모습을 기억하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호프만은 도시 사람들, 즉 그들이 되살리고자 하는 도시의 '정신'을 위한 행사에 - 라이더를 방해함으로써 -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훼방을 놓는 도시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행태와 도시의 뒤틀린 공간이 드러내는 비정상적인 열림과 막힘의 구조는 과연 별개로 볼 수 있는 것인가. 도시 사람들이 모든 것이 왜곡된 도시 자체의 구성물은 아닐까. 브로즈키의 실패에 이은 소동 이후, 라이더가 목격하는 막이 내려간 무대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 텅빈 컨서트 홀에서, 일어난 것은 장소 그 자체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실패에 연이어 연회가 개최되고, 도시 사람들이 모여 어떤 '위로'를 구하는 장면이다. 라이더 역시 이러한 위로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도시를 떠나는 길에 잡아탄 도시 순환 전차는 위로를 제공할 법한 도시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커피와 롤빵을 갖추고 있으며, 라이더 역시 이 '소소한' 위로거리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책 번역자가 자신의 변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과연 그는 이 무한히 순환하는 전차에서 내릴 수 있을까? 


4. 구원, 치료, 주체, 빠져나감의 이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소설에 대해 말해야만 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구원이며, 대상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치료다. 문제는 앞에서 말했듯, 불안은 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안은 정서 혹은 정동이며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이다. 말하자면 이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억압할 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완전히 치료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의 치료를 말하는 것은 불안이 욕망의 대상, 즉 실재에 대한 위치 변경을 통해 주체화를 유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왜곡된 상황 혹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위치 변경, 즉 빠져나감을 통해서 말이다. 


소설 속에는 도시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뒤틀린 구조로부터 빠져나가는 용기를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호텔 지배인 호프만의 아들 슈테판이 바로 그 인물인데, 그는 자식이 피아노 연주의 재능을 가졌으면 하는 부모의 기대에 스스로 부응하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책망에 빠져살던 인물이다. 하지만 라이더가 연주하기로 되어 있던 도시의 음악회에서 자신의 재능과 의지를 드러낸다. 문제는 슈테판의 부모가 여전히 아들을 못미더워하여 그의 연주를 외면해 버렸던 것. 결국 라이더의 조언과 자신의 재능을 믿고 용기를 낸 슈테판은 자신의 재능을 더욱 연마하고 펼쳐내기 위해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원했던 변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슈테판 한 사람 밖에는 없다. 문제는 도시의 정체와 뒤틀린 구조를 지속시키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결국 이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망상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말이다.  


결국 이 위로를 말하지 않는 <위로...>라는 제목의 책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위로가 아닌 구원 또는 치료를 통한 주체화일 것이다. 소설적 허구를 통해 그려낸 디스토피아(distopia)로서의 현실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러가지 위로의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사회가 제공하는 오락과 휴식, 특히 십대 아이돌과 예능 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갖가지 눈요기 거리들, 뻔뻔스럽게도 '위로'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의 지갑을 터는 폐지의 가치 이상을 지니지 않는 책들, 그 이면에는 온갖 정치적 야합과 부패를 통해 결코 열리지 말아야 함에도 열려있는 길들과 건전한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뚫려있어야 함에도 길을 막아 먼 길을 돌아가도록 만드는 높은 담들이 만들어내는 비상식적 구조가 놓여있지 않은가.(물론 그로 인해 가중되는 인간적 고통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쨌든 불안과 이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증상들은 실재에 매우 가까이 있으며, 사회의 불안이 가중될수록 이 구조 내에 상존하는 '공백의 분출'의 가능성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이 거리의 좁혀짐에, 죽음 충동(death drive)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바로 이 뒤틀려 있지만 지식과 법이라는 이름의 정상성을 통해 상식으로 용인되고 있는 구조로부터 빠져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만이 위로가 아닌 치료를,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치료를,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의 도래를 위한 정치를 위한 길이 아닐까. 


- '불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진문지'에 실린 맹정현 선생의 글에 의지했음을 밝혀둔다. 훌륭한 글에 대한 어쭙잖은 이해로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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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내세. 아직 여기 있지 않은, 그래서 앞으로 도래할, 또는 가게될 세계. 이 소설의 원제 The Sweet Hereafter에 쓰여진 hereafter라는 단어를 뜯어 보자면 '여기' 이후에 있을, 일종의 '피안'을 뜻한다. 현실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 고통과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두려움을 부과하는 것이기에, 내세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평온함과 영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뉴욕 주 북부의 한 시골마을 셈덴트가 가진 이미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 많치 않은 인구가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살아가는, 도시의 각박함이나 바쁜 일상과는 다른, 그 곳에 가면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맛볼 수 있을 듯한.  


이런 목가적 풍경을 지닌 마을에 눈 내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에 대한 사실적 개요는 매우 간단하다. 잔혹할 정도로. 마을의 스쿨 버스 운전사가 윌모트 평원이라는 곳의 직선도로에서 사고를 냈고,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나, 정작 운전 기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 잔혹한 사건에 대한 세 사람의 기억, 그리고 한 사람의 개입을 통해 진행된다. 문제는 사고를 낸 당사자인 버스 기사 돌로레스 드리스콜, 그리고 그 사고차를 따라서 운전하고 있던 학부모 빌리 안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아름다운 소녀' 니콜 버넬의 기억(아니 그들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기억-상념. 언제나 기억은 좋은 기억 보다는 나쁜 기억이 우선되는 법이다. 게다가 기억은 마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날개를 펼치는 착각의 편린들로 점철된다. 마치 눈내리는 날 도로를 차창으로 도로를 내다보는 듯 어떤 희뿌연 전망.


마을의 스쿨 버스 회사에서 일하며, 아이들의 통학을 돕는 돌로레스 드리스콜이 여느 아침과 다름 없이 셈덴트의 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있던 그 날 아침도 뿌옇게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상념으로 인해 복잡하고 어딘가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 매일매일 마치 버릇과도 같이 해 오던 자신의 일을 반복하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녀의 의식은 마을의 몰락해 가는 모습들에 대한 상념과 회한, 관계가 소원해져가는 아들에 대한 당황스러운 기억, 아이들 하나하나의 모습과 그들의 부모들에 대한 짧은 생각들, 운전 중에 만나게 되는 난폭한 운전자들(도시에서 온 고급 승용차 운전자, 그리고 과속을 일삼는 덤프트럭 등)에 대한 불평, 스케쥴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 그리고 길 위를 지나는 갈색 개. 그녀의 기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개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의 통학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체 구간에서 유일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속도규정의 범위 내에서) 윌모트 평원의 직선 길에서 그녀는 길을 건너는 개를 만나고, 이 개를 피하려고 하는 순간 차가 전복된 것이다.1


빌리 안셀은 상처한 이후, 적어도 아니들이 사고로 죽기 전까지, 쌍둥이 아이들을 키우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있는 학부모이며, 무엇보다 사고가 터졌을 때 먼저 달려가 아이들을 구한 사람이다 - 물론 이것은 그가 사고 버스를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아내, 그것도 친구의 아내와의 외도, 습관성 음주(다른 이름으로 알콜 중독),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참전의 트라우마. 어쨌든 그는 사고를 가장 정확히 목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고의 순간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외도 상대인 리사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 사고에 대한 사법적 개입의 과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한 법적인 개입이 시작된다. 미첼 스티븐스 역시 도시로부터 온 변호사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 그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다르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소송에서 이겨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분노인 것이다. 그에게는 조이(Zoe)라는 딸이 있다. 그의 딸 조이는 마약 중독자인데, 여느 중독자들과 비슷하게 갖은 거짓말로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내 바로 마약을 구입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이름 Zoe는 그리스어의 생명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는 바로 Zoe, 즉 그의 딸이자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런 그에게 있어 삶을 살아갈 유일한 이유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 즉 자신의 직업에 따라 tort suit(손해 배상 소송)를 진행하는 것이다. 배상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다. 그의 모토 그대로 '사고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외부적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이 사건의 잔인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실체적 차원을 넘어서는 잔여가 존재한다. 법은, 특히 현실에 있어 사건에 대한 결과를 조정하는 실증법은, 그 과정에 있어서나 또는 결과에 있어 매우 실체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증거와 증언에 기초하며, 그 결과는 경제적 배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를 추동하는 분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복수 그리고 그 복수에 따르는 보상심리, 즉 '징벌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일 것인데, 과연 이것을 정의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외부성과 구도 내에 있는 모든 사건 당사자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입에도 일정한 한계가 수반될 수 밖에 없다.2


어쨌든 스티븐스의 외부적 개입이 성립하기 위한 결정적인 증인 니콜 버넬의 기억과 거짓말을 통해 소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돌로레스가 과속을 했다는 그녀의 법정에서의 거짓 진술은 스티븐스의 소송 진행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녀가 이런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니콜은 말하자면 마을에서 꽤 인기있는 여자 아이다. 학교에서 공부도 곧 잘 하고 예쁜 아이인데다, 성격도 밝은 편이어서 안셀의 쌍둥이 등 여러 아이들의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니콜이 커가면서 그녀에게서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근친상간의 비밀. 그녀의 거짓말은 바로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 그 거짓말은, [행위와 그 변천The Act and Its Vicissitudes]이라는 글에서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이 제시하는 해석을 따를 때, 무엇보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그녀의 몸짓이었다.


지젝은, 언제나와 같은 그의 장황하고 정신 사나운 말하기 방식을 따라, 이 글에서 니콜의 선택에 대해 이런 것이야말로 영속적인 유한성의 지속 혹은 악무한에 단절을 가하는 이중적 몸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 몸짓에서 지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주체의 몸짓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의 설명을 따르자면, 소송은 분명 그녀의 가족 - 가족의 머리는 언제나 가장이며,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예외있는 전체라는 향유의 구조 내에서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가 된다 - 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게 되는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정의를 실현 할 수 없는 법률의 집행으로부터 (그리고 따라서 지역의 사회적 구조로부터),  니콜은 스스로를 분리해낸다. 그 결과, 이 두 유한성의 연결에서 스스로를 단절한, 지젝의 해석에 따르자면, 니콜만이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행위적 주체의 형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는 과연 어떤 주체일까? 그녀는 어쩌면 정말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역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녀가 소송을 막기 위해(혹은 그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전복적 몸짓으로) 선택한 거짓말은 그녀를 일종의 영웅으로 만들어 낸다. 소송과 그에 이은 미디어라는 이름의 게걸스러운 대머리 독수리들로부터  지역 사회를 보호한 영웅.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타나는 자동차 경기장의 장면에서 그녀가 받았던 박수와 환호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게다가 보기에 따라서 그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위치의 역전을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의 문제에서 금기를 범한 아버지는 (자신과 니콜 사이에만 머물러야 할 추악한 비밀로 인해) 오히려 향유 관계의 (폐기가 아닌) 역전을 통해 니콜에게 구속되는 듯 한 뉘앙스가 보인다. 이것은 라깡의 주체의 네 담론 중 주인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의 이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3 말하자면 주인과 노예만이 바뀔 뿐, 여전히 지배의 구조는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니콜은 진정한 변화와 구원의 주체라기 보다는 그저 모호한 또는 몽매주의적 주체(obscurantist subject)일 뿐이다.4


돌로레스는 이 모든 과정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한 안도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녀는 오히려 극도의 불안의 상황에 처한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동네 사람들은 그녀와 그녀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정해 주는 듯이 여기는 일종의 대타자로서의 남편 애벗5이 거기에 없는 사람인 듯 취급한다. 마치 그녀의 삶을 상징하는 듯한 '덜컹이'는 어렵게 어렵게 서로를 부수는 자동차 경기장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차 '덜컹이'가 여러 차들에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철저한 고독을, 처절한 유한성을, 누구도 그녀와 함께 할 수도 없고, 심지어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애벗 마저도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는 일종의 안도감을 표현한다. 모호한 혹은 몽매주의적 행동의 주체 니콜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한 편의 구원 서사를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구원이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아들의 철저한 고독, 자신의 단독자로서의 상황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과 단말마적 비명, 그리고 그 단독자의 죽음과 이후의 부활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이러한 구원 서사를 신약 성서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친구들에게서 마저도 비난을 받으며 신을 호출하는(또는 신의 구원을 부르짖는) 구약 성서의 욥에게서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 내에서 이러한 구도 속에 놓이는 단독자의 이름이 바로 돌로레스(Dolores)[슬픔]6라는 것이다. 그러한 철저한 홀로 있음의 경험과 자기 파괴(그녀가 몰던 GMC 자동차 '덜컹이'의 파괴로 재현되는)의 순간에 그녀는 일종의 자기 구원, 안도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어떤 것일까? 이제 모든 고통이 지나갔으니, 그 고통의 깊이에서 그것이 지나간 이후에 찾아오는 일상적 평온함을 통해 일종의 상승으로 작용하는 그런 형식의 안도감. 이런 의미의 안도감의 이름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카타르시스 혹은 승화. 그는 [시학]에 제시된 비극론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어쨌든 이런 수동적 형태의 구원도 우리는 구원이라 할 수 있을 터이고, 나름의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닌 다른 형식의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가 얻게 되는 깨달음은 그녀에게 더 이상 의지할 상징 체계 혹은 대타자의 지배 구조의 폐기를, 남편 애벗도 결국은 자신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내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평등한 주체, 지배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주체의 가능성을 찾게 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보고, 이후의 삶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적 장소로서 제시될 뿐이다. 이러한 삶의 카타르시스적 극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시 평온한 자신의 기억-상념 속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길일 뿐이다. 이러한 길은 진정한 구원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름 돌로레스(Dolores)가 함의하는 비탄 혹은 그에서 기인하는 카타르시스의 영속적인 순환의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 '달콤한 내세'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한 영원회귀적 기억-상념의 달콤함은 단순한 허구적 현실의 영역에만 귀속되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과거의 기억의 정치가 팽배하고, 사회적 안정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일상의 평온함 속에 정의에 대한 요구를 묻어버리는 현실에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행위의 주체를 찾을 수 없다. 오직 관습과 윤리에 순응하며, 자신의 생존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동물적 자동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영원회귀 혹은 악무한을 절단하는 주체를, 진정한 구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1. 문제는 이 개의 존재 마저도 어떤 막연한 상상 혹은 기억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고가 나던 지점에 정말로 그 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2. 데리다(Derrida)는 법/정의의 관계에서 오는 역설을 말한다. 데리다의 논리를 따를 때, 정의는 법의 집행을 담보하는 어떤 것이다. 그에 반해 법은 어떤 해체가능한(deconstructible) 문자의 체계이지만, 반면 정의는 법과는 달리 해체불가능한 잔여물(indeconstructible remains)이지만, 법을 통하지 않고는 구현될 수 없는 역설이 성립된다. 스티븐스의 분노와 징벌적 정의의 유혹은 법정에서 구현되는 경제적 거래관계를 담보하겠지만, 진정한 정의는 이를 초과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사건에 책임을 질 법적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너무나 모호하기만 하다. 법적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증거 보다는 증인의 증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특성도 또한 그 한계를 더욱 좁히고 있다.


3. 라깡의 네 주체에 관한 담론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 담론. 이것은 지배의 구조가 분명한 일반적 향유를 말한다. 말하자면 주인 A가 노예 B를 지배한다. 두 번째로 히스테리 담론. 이것은 주인 A와 노예B의 향유 관계의 역전을 말한다. 세번째로 대학 담론. 이것은 대학에서와 같이 주인도 노예도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 주인 기표의 자리는 비어있으나 여전히 지식이 대타자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네번째로 분석가 담론. 분석자와 피분석자는 처음에는 일종의 지배구조에 편입된다. 피분석자는 분석자에게 마치 고해를 하듯 자신의 모든 것을 고찰의 대상으로 제시해야 하며, 이런 절차에서 언제나 그렇듯 분석자에게서 일종의 대타자를 찾는다. 그러나 이 담론의 끝은 분석자가 바로 그 대타자의 지위에서 내려와 분석자와 동일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피분석자가 의지할 대상은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 의지할 대상임을 깨닫는데서 종결된다. 니콜이 이러한 주체적 담론의 구도에 들어간다면 주인 담론의 노예로부터 히스테리 담론의 노예(또는 주인)으로의 전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4. 무엇보다 니콜이 사건에 대한 외부적 개입을 차단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듯이 보인다. 앞의 주석에서 이야기 한 그대로 스티븐스의 분노에 찬 징벌적 정의 그리고 법을 통한 법적 정의는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며, 결코 정의 그 자체를 끌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티븐스의 개입의 노력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지역 사회 내의 통학 버스 운행 방식이나, 버스 통행로 개선 등과 같은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테드 제닝스(Ted Jennings)는 그의 책 데리다를 읽다/바울을 생각하다[Reading Derrida/Thinking Paul] 2장에서 데리다의 사유가 단순히 법/정의의 대립항에서만 머무르지 않으며, 정의/법/법률(또는 법체계, laws)의 삼항적 사유를 제시했음을 말한다. 이런 도식에서 법 자체는 정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법률 혹은 실체적 법을 초과하는, 법 위의 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티븐스가 행한 개입의 노력은 정의 그 자체를 포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미치려는 법 바깥의 법, 또는 법 위의 법, 또는 법에 맞서는 법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니콜이 자신의 복잡한 상황(아버지의 근친상간의 기억-상념, 자신이 반신불수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절망, 죽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 등 그녀의 상황의 모든 원소를 포함하는)으로 인해 선택했던 거짓말은 바로 이런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5. 이 소설에서 우리는 두 명의 등장 인물에게서 (라깡적 의미에서의) 어떤 지배 구조 혹은 대타자적 향유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 니콜-아버지 그리고 돌로레스-애벗(그녀의 불구자 남편). 니콜-아버지의 지배 관계는 쉽게 눈에 띄는 형식이다. 아버지는 전체 중 하나의 예외로서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향유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이 사건을 계기로 뒤집어진 주인-노예의 구조에 들어가게 된다. 

돌로레스-애벗의 관계는 어찌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에서 약간은 부차적일 수도 있으며 잘 눈에 띄지 않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비록 그녀의 남편 애벗이 불구의 몸이긴 하지만, 돌로레스의 삶에 있어 애벗은 가장 현명하고, 그녀의 삶에 의미를 주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으리만치 그녀에게 있어 남편은 중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철저한 단독자적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의 남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모종의 지배 구조에서 벗어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소설의 결론부의 해석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6. 슬픔 또는 비통함을 의미하는 이름.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보다 직접적인 종교적 의미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근원적인 어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탄을 금지 못하는 성모의 슬픔과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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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계절 - Another Yea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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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year 또는 세상의 모든 계절 영화평] 네 가지 형상 그리고 한 주체의 분열: 새로운 것의 가능성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공연 및 예술 작품을 대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예술로부터 어떤 현실로부터 볼 수 없는 다른 것을, 어떤 숭고한 것을 보기 위해서, 또는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예술로부터 오는 카타르시스를 취하는데서 그 목적을 찾는다. 요즘 세태에는 아마도 후자의 경우가 더 맞을 것이다. 특히 시간을 고정시킨 '거짓 움직임'의 기록인 영화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실 이 [another year] 또는 [세상의 모든 날들]이라는 영화는 이런 목적으로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것이 어딘가 매우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어떤 거대 서사나 옹호해야할 법한 대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절대 그런 것들과 접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이클 레이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매우 소소한,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한 심리 상담사(제리)와 그녀의 남편(톰),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서 잡다한 업무를 수행하는 한 조울증적 성향의 여자(메리). 이들의 존재는 마치 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인 양 친근하기만 하다. 


어찌 보면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한 불행한 여자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욕망하다가 마치 없는 소외 당하게 된다는 그런 뻔한 줄거리.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결코 단순하다고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념을 말이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한 어떤 해석이나 의견을 가지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오히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다가가는 길을 막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보면 사람들은 쉽게 영화에 대한 과도한 해석으로 흐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를 같이 봤던 사람들이 영화 내에서 제시되는 어떤 대립 구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하듯이 말이다. 


물론 실제로 영화에는 어떤 대립 구도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제리 그리고 메리는 같은 병원에서 일한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냈고 가끔 아니 꽤 자주 함께 제리의 집에서 모여 저녁 식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너무나 친근하고 좋은 제리와 그녀의 남편 톰은 돈이 넘쳐나서 주체를 못할 그런 형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영국의 중산층이 살 법한 정원이 딸린 집에 살며, 둘 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아들(죠)은 변호사다. 그들은 행복한 삶은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제리의 직장 동료 메리의 삶은 불행하기만 하다. 제리와 함께 일한다고는 하지만 메리의 일은 일종의 비서직이다. 전문직도 아니라 보람도 덜하고 물론 보수 면에서도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과거 이혼 경력이 있으며, 현재 어느 정도는 알콜 중독 증세도 있다. 메리는 그런 자신의 상황에 너무나 불행하며 제리와 톰의 가족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갈구하는 듯 하다. 


어쨌든 제리와 톰도 이 불편하기만 한 친구에 대해 상당히 참아주면서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가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제리와 톰이 메리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톰과 제리는 메리가 대면하고 있는 일종의 벽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떤 의미에서 메리의 대사는 지속적인 독백의 그것이다. 차 문제, 남자 문제, 심지어 화장실에서 화장지가 없었다는 등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문제를 가지고 메리는 이들 부부에게 공감과 인정을 요구한다.


애초에 메리는 자신을 이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종의 자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제리와 톰이 그녀에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불편한 손님/친구의 자리다. 어쩌면 여기까지가 그들이 인정해 줄 수 있는 한계범위였을 것이다. 


메리는 제리와 톰의 아들 조에게 노골적인 애정을 표출하고, 결국 제리와 톰의 가족에게 소외 당하게 된다. 물론 집에서 쫓겨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제리와 톰은 너무나 친절하며,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차마 메리를 쫓아내지 못한다. 그들 모두가(제리와 톰 그리고 아들 조와 그의 여자친구와 메리 그리고 톰의 형 로니)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리의 모습은 여전히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려내는 그녀의 마지막 장면은 철저히 혼자인 메리다. 심지어 제리와 톰의 가족들이 말하는 소리 마저도 사라져버릴 정도로...


이런 정황에 비추어 제리와 톰 그리고 메리 사이에 어떤 대립적인 지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형편을 일종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구도로 몰고 가서, 그런 시각으로부터 영화를 읽어내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제리/톰은 브루주아지를 대표하는 어떤 착취하고 누군가를 희생시켜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자들의 형상으로, 그리고 메리는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는 일종의 희생자이며 권리를 결여/박탈 당한 사람이고, 그런 박탈된 것 혹은 결여된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가 희생 또는 소외당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그런 해석/의견의 단골 메뉴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다.


우선 제리와 톰에 대한 해석.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제리와 톰은 부르주아지다. 당연히 그들은 일종의 착취자이며, 이런 완전히 만들어진 틀 안에서 그들이 가진 또는 가졌던 모든 것들 - 좋은 직장, 집, 아들, 심지어 주말 농장과 과거에 호주에서 2년 동안 오지에 갇혀 살면서 힘겹게 모은 돈으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섰던 여행 마저도 - 은 이들이 착취의 형상 또는 적어도 사회-경제적 위계에서 우위를 점한 자들임을 보여주는 근거로 비춰진다. 


다음으로, 메리는 그저 어떤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드러날 뿐이다. 마치 허용되었던 것을 빼앗긴 사람, 어떤 희생자로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영화가 시작하는 제리의 상담실 업무 장면에서 "세상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안고 있다는 표정으로 제리의 상담실을 나갔던 그 여자와 메리는 한 인물이 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메리는 어떤 의미에서 신성시된다. 제리와 톰을 불편하게 했던 그녀의 모든 행동거지는, 그리고 제리와 톰의 아들에게 보였던 부적절한 처신은 잊혀지고 사회적인 부조리에 의해 희생된 자의 성화된 '얼굴' 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리의 형상은 영화가 시작할 무렵에 등장하는 불면증 환자의 형상과 겹쳐지게 된다 - 기억해 보자면, 그녀에게 세상은 불행한 것이고, 무엇보다 세상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자신이 속한 장소와 동일시 되어버린 그녀의 삶은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제리와 톰은 영원히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자가 되고, 메리는 영원히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머물러야 할 '희생자'일 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메리에게서 변화의 가능성은 배제되고, 메리는 장소와 동일시 된다. 영원히 변하는 않는 장소.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시각이 겨냥하고 있는 바가 일종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떤 사회 및 경제적 모순을 읽어내고, 영화 내의 인물들을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찾는 것이 바로 이런 시각을 내세우는 이유다. 그러나 비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말을 이한 말을 하는 것? 단순 대립적인 형상들만을 가지고는 그런 시각이 의도하는 모종의 비판은 가능할 지 모르나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 또는 어떤 운동의 가능성도 잡아낼 수 없다. 가능한 것은 오직 일종의 성화된 형상(희생자의 형상)으로서의 메리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장소의 형상으로서의 '불면증 환자'의 형상이 겹쳐질 뿐이다. 다시 말해 희생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사회 및 경제적 차이 혹은 모순은 영속화된다. 변화를 유발해야할 비판이 오히려 고착된 두 형상의 영속화에 기여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판을 위해서라면 어떤 측면으로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지배적인 위계의 범주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제리와 톰의 편에서도, 그렇다고 이들에 의해 소외된, 희생자화 된 메리의 편도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보기 위한 필요한 세번째 형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기이하게도 우리는 어떤 분리된 혹은 감산된 메리를 생각해야만 한다. 희생자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순수한 존재로서의 존재로 그려지는 메리를 말이다. 분명히 이 영화의 이야기는 메리의 이야기이며 영화 내에서 순수한 존재로서의 존재, 지배자나 착취자의 정체성으로부터도, 희생자나 소외된 자의 정체성으로부터도 벗어나는 형상은 메리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형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제리와 톰의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함께 웃고 떠들며 과거에 제리와 톰이 어떤 여행을 했는지에 대해, 어디로 여행을 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때 메리는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되고 있다. 가족이라는 재현의 체계에 의해 현시되지 않는 공백과 같이. 여기에서 메리는 함께 식탁에 앉아 있지만 그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존재로서의 존재의 형상이 드러나는 순간, 메리에게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가온다. 일종의 실재에 대한 인식.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카메라는 메리의 얼굴만을 잡아내며 소리는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러나 그 순간 메리의 얼굴은 어딘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영화 내내 메리는 어딘가 불안하다.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 중에도, 술집에 홀로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반대편 테이블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를 보면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공감과 인정을 갈구하며 끊임없이 불안한 대화/독백을 이어간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가족으로서의 인정, 자신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가고 있음에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희생자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떤 편안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내 버리고, 그 맞지 않은 옷을 벗어버린 후, 그 집을 나서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때 만이 그녀는 더 이상 장소와 동일시 되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리의 형상, 즉 희생자의 정체성을 벗어버린 메리의 형상은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불면증 환자'와는 사뭇 구분되는 형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변화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리가 말하는 그대로 메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담치료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도 일말의 변화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통해서 메리는 자신이 원하는 일종의 모상적 대체물을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런 치료를 통해 순치된 메리는 제리와 톰의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을,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나 원하던 장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지 역시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변화라 할 수 없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원하던 장소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방식의 변화는 단지 그녀가 가졌던 희생자의 정체성을 일종의 가정이라는 지배 구도 내에서 지배자(제리와 톰)에 속한 신민의 정체성으로 교체할 뿐이다. 오히려 진정한 변화는 메리가 제리와 톰의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식탁에서 일어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을 때 가능하다. 그들의 집안에서 가져야만 하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그 집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때 말이다. 


물론 영화는 마지막 장면의 메리를 단지 가능성의 차원에 남겨 둔다. 영화의 관객은 메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다. 가족이라는 정상성과 지배의 범주에 포섭되었을까. 비록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용인해 주던 그 애매 모호함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는 있다(용인이라는 말 역시 지배를 나타내는 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은 반대로 그 집을 나가 자신의 삶을 찾고, 어떤 낯설지만 새로운 것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행의 정치 체제에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대안은 마치 제리와 톰의 따뜻한 가족의 품과 같이 이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사회에 속한(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도) 자본-의회주의의 체제의 재현의 체계속에서  현시되지 못하는 공백으로 살아가는 메리와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리와 톰의 가족과 같이(톰의 형수 린다의 장례식 장면에서) 여전히 어떤 균열과 불화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제리와 톰의 가정은 정말로 이상적인 것인가? 그리고 그에 유비될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만일 이 영화의 감독 마이클 레이의 작품이 분류되고 있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단순히 현실주의가 아닌 어떤 경험이나 객관적인 것과 분리된 실재를 말하는 실재론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이 영화가 드러내고 있는 실재는 무엇일까? 현행의 체제와 경험과 눈으로 보아 아름다운 듯 보이는 '가시계'로부터 벗어날 어떤 일말의 가능성, 즉 과거가 반복되는 미래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도래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계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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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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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책에서 하나의 잘 쓰여진 우화를 발견하게 된다. 우화란 무엇인가. 그럴 듯한, 그러나 어딘가 현실과 다른, 그러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같은 이야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혹은 서사를 우화라고 부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솝의 우화에서처럼 동물이 말을 하고 인간처럼 행동도록 하지는 않는다. 단지 어떤 하나가,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인간을 인류라는 공통적 이름 안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단독적인 것으로 만드는, 매우 본질적인 어떤 법칙과도 같은 것이 제거될 뿐이다. 바로 죽음이라는 조건이 말이다.


죽음은 어떤 것인가?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어떤 종말을, 끝을, 모든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죽음에 마주한 존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하이데거나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bieing-towards-death)', 필연적으로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라는 점은 슬픈 일이다. 그런 이유로 영원한 삶 혹은 '죽음의 중지'란 어떤 것은 모든 사람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 앞에서 두려워 하고 떠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두려움과 떨림의 근원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우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 현실의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 은 불안해 하는가. 이것은 일종의 모순이다. 불안의 요소가 제거 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해 하는, 모순적인, 상황 설정이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은 다름 아닌 일종의 정보의 비대칭성(dissymmetry)에 기인한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이 우화에서 그렇듯이, 만일 죽음을 어떤 인격적 존재로 생각해볼 수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의 죽음은 필연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오늘 잠을 자겠다고 누웠는데 내일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길건너 구멍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다가 차에 치여 사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알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모순적 상황. 우리는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 하지만, 삶, 순수한 삶, 죽음을 그 반쪽으로 하지 않는 삶 역시 죽음 그 자체와 동등한 정도로 알지 못한다. 법칙에서, 어떤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을 유발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죽음의 중지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선물, 죽음의 선물, 죽음으로부터 온 선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법칙과 교환의 경제로부터 벗어나는 이 죽음의 중지라는 어떤 해프닝(happening)은 선물이 정말로 선물일 수 있는가에 대해 의심하게 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것처럼, 선물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선물을 주는 사람은 선물을 받는 사람이 무엇을 받았을 때 기뻐할지 알지 못한다. 기껏 마련한 선물이 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라면, 그 선물은 과연 선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물을 한 사람이 무언가 답례를 원하고 또 받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교환 행위일 뿐이다. 심지어 데리다는 선물을 주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자기 만족에 대해서도 말한다. 나는 선물을 할 만큼 관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충만함을 얻게 된다면, 어떤 물건을 사서 얻는 충족감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선물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며 따라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불가능한 것의 가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 선물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유예시키고, 다시 죽음이 사라진 이 나라의 상황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어쨌든 죽음이 사라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 - 죽음이 멈춘 것은 어떤 특정한 나라에 국한된다 - 은 이 놀라운 기적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하다. 잠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먼저 총리의 대국민 연설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상황은 이렇게 결론이 날 듯 한데, 이런 소멸이 불가피하게 야기할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문제들과 맞설 각오라고 마무리 해 갔다. 총리는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우리는 신체 불멸이라는 도전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나라의 선량한 국민을 당신의 도구로 선택해주신 신에게 늘 감사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입헌 군주국인 이 나라의 왕가의 어른인 왕의 '모후'로부터 시작된 이 죽음의 중지는, 총리가 보기에, 일종의 국가에 대한 도전이다. 정부의 수반인 그는 이 전례 없는 일을 법칙과 질서를 수호하는 국가에는 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해프닝이 하나의 위기이며, 그로 인해 야기될 각종 문제들에 맞서야 할 그런 것으로 파악한다.  


사실 이 문제로부터 교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 종교는 어쩌면 어떤 두려움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에, 바로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총리의 연설이후 추기경이 총리에게 전화를 통해 하는 말들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소, 부활이 없으면 교회도 없소. ... 그게 다가 아니오, 도데체 어떻게 하느님이 자신의 죽음을 의도했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가 있는 거요, 그런 생각은 모독이오, 최악의 신성모독이란 말이오. ... 육체의 불멸이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였지 않소, 그게 바로 그 말이라는 걸 깨닫는 데 초월 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필요는 없는거 아니오.


이를 듣고난 총리의 질문, 그리고 추기경의 대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예하. 그런데, 괜찮으시면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물어보시오.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할 겁니까. ... 그 질문을 총리에게 되돌려주겠소,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국가는 어떻게 할 거요. 


그들은 답할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어 간다. 그러나 이전의 법칙으로의 회귀를 강제할 수 없기에 국가도 교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그렇기에 이들의 존재가 존속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국가와 교회 같은 어떤 '재현적인(representative)' 성격의 기구들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민간 부문, 특히 우리가 '경제'라고 말하는 사회의 산업적 부분, 특히 죽음에 관련된 산업에 가중되는 타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병원에는 죽지 않는 환자들로 인해 병상이 복도까지 가득차는 일이 벌어진다. 노인 요양 시설('석양의 집'이라고 명명되는) 역시 마찬가지다. 장의사들은 인간이 죽지 않자, 애완동물의 장의 절차를 주된 업무로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보험업계 종사자들은 연금 보험 가입자들이 보험 계약을 파기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어찌 보면 돌파구는 바로 여기에서 마련된다.   


미래를 바라보는 추가 약정,... 의무적인 사망 연령을 여든으로 설정하는... 이렇게 하면 보험회사는 정상적으로 보험료를 받고, 행복한 보험계약자는 여든 살 생일을 축하하는 날 이제 실질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으으모 계약서에 명기된 금액 전액을 즉시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회장은 또 덧붙였다, 만일 고객이 원한다면 다시 팔십 년간 계약 갱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 될 겁니다, 그 기간이 끝난 뒤에 그들은 다시 두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이전의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는 거예요, ...


이 보험업 연합회장의 발언은 모종의 '순환의 회귀'를 말한다. 어떤 체계가 완결되기 위해서는 그 체계는 닫혀 있어야만 하고 일종의 순환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들은 죽음의 중지로 인해 구멍이 뚫려버린, 순환이 중지되어 버린 체계를 다른 방식의 순환으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유사-법칙(quasi-law)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이는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관리에 구멍을 뚫는 사회의 혼란은 어떤 방식으로든 봉합될 수 있다. 


실제적 사례, 비록 소설적 상황 내에서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여하간에 여전히 실제적 사례라는 이름으로 언급될 수 있는, 한 농가의 이야기가 제시된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져 차라리 죽기만을 바라는 한 노인과 아이, 그리고 이들이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 자기 자신들의 안위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고통을 차마 지켜 볼 수 없기에 - 이들의 가족들의 사례. 이들은 이 죽어가고 있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자들을, 산-죽음(living-dead)을 여전히 죽음이 활동하는 이웃 나라의 국경 너머로 데려간다. 그리고 이들의 방식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하지만 문제는 곧 국경 문제로 비화되고, 자경단의 활동과 군대의 동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죽음을 서비스하는 혹은 죽음을 사업으로 하는 마피아들의 암약이.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국가와 일종의 공모 관계에 있다는 점,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국가와 마피아가 어떤 새로운 교환 경제를, 새로운 순환을 만들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죽음의 중지로 인해 경제적 교환 관계가 중단된 바로 그 곳에서 국가 또는 마피아가, 국가와 마피아가, 구멍난 체계를 봉합하고(국경 봉쇄), 중단된 순환을 회복(새로운 사업의 발명)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이 소설의 전반부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문제다. 재현적인 또는 대의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는 상황 혹은 사회이 불안 요소를, 그 속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통제한다. 갑작스러운 자연 법칙의 변화로 야기된 개인의 문제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 그것이 폭력을 포함하는 것이든 아니든, 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 통제되어야만 하며, 그 통제의 방식은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다. 비밀, 알 수 없는, 그렇기에 불안한, 두렵고 떨리는 공모의 관계, 어쩌면 국가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것이면서 동시에 의도된, 이 '내새울 수 없는 것(the unpresentable)'의 내면화는 '죽음' 그 자체 보다 더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밀스러운 관계에 의해 '비밀스럽게' 거래되는 자경단원들의 안위에 대해 치뤄지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말이다(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목숨에 대해 치뤄지는 비용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비밀스러움의 공포를,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국가의 개인에 대한 무한한 초과의 관계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한 사유의 도정에서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하며, 죽음은 다른 차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인간의 목숨을의 실을 끊어내는 '파르카이(Parcae)' 또는 '모이라(Moira)'가 관장하는 죽음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애초에 <죽음의 중지>가 말하는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로 접근해야만 한다. 물론 이 우화의 겉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죽음은 그저 인간의 목숨을 끊어내는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라마구가 인용하는  바울의 단언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 이 겨누고 있는 죽음은 이런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라마구 역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풀어내는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과 초보 철학자의 대화는 이야기의 후반부를 향해 가는 일종의 전조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각 개체를 감독하는 죽음은, 말하자면, 한정된 수명을 가진 죽음, 하위의 죽음이야, 이 죽음은 자기가 죽이는 것과 함께 죽지, 하지만 그 위에 더 큰 죽음, 예를 들어 인류의 새벽 이후로 인간을 책임져 온 죽음이 있는 게 아닐까.
.....
내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뻗어간 상태에서 말을 한다면, 또 하나의 죽음이 보이는구나, 마지막, 최고의 죽음이. 그건 무슨 죽음입니까. 우주를 파괴하는 죽음이지, 정말로 죽음이라는 이름값을 할 만한 죽음,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이름을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죽음에 비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다른 것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세목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죽음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로군요.


작은 죽음들과 큰 죽음, '소문자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여진 잠시 유예된 죽음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대문자 죽음', 여기에서 죽음은 다수적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것도 어떤 위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위 대문자 죽음이라는 것이 지금 잠시 활동을 멈춘 소문자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모든 인간들과 세계에 종언을 가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초월적인 두려움. 이에 대한 서술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부정적인 정서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대화로부터 다른 것을, 보다 긍정적인 것을 끄집어 내도록 하자. 어쩌면 두려움과 비밀 이외에 죽음에 속하는 다른 성격을 생각해 보는 길을 통할 때 그런 일이 가능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우화의 후반부가 향하는 방향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런 긍정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대문자 죽음이 지닌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머물기 보다는, 다시 이 우화의 흐름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지금으로서는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부족한 어떤 것 밖에는 제시할 수 없을 테니...


마치 이 '어항 위를 움직이는 영'이 어떤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기라도 하는 듯, 소설 후반부는 죽음의 점진적인 인간으로의 재창조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 영은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제시된 '수면 위를 운행하는 영', 즉 신에 대한 패러디다. 이 얼치기 영과 초보 철학자의 대화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 죽음은 자신의 태업에서 벗어나 한 동안 죽음이 멈추었던 곳으로 되돌아 오는데, 마치 그 동안 -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 의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듯, 마치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도 되는 양, 인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물론 죽음의 편지, 죽음의 예고장은 죽음을 부른다. 거기에는 단지 어떤 두려운 것의 예고만이 있을 뿐, 어떠한 감정의 전달이나 의사소통 같은 것은 없다. 


죽음이 돌아온 그 곳에서 환호하는 '죽음의 경제'를 굴리는 자들, 갑작스런 원래 상태로의 회귀에 당황하는 총리,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들은 다시 이 일로 야기된 혼란을 잘 관리한다. 소문자 죽음의 중지는 결코 체계를, 교환 경제를, 내적 완결성을 지닌 순환의 체계를 종결시키지 못한다. 물론 죽음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지속된다. 이 붉은 봉투에 담긴 편지에 소문자로 사인한,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쓴 어떤 여자를 찾기 위한 시도, 그러나 무의미한, 결코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도,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넘어서려는 불가능한 시도가 말이다. 두건을 둘러쓴 죽음은 단지 비웃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죽음, 우리는 이 '반복' 속에서 어떤 '차이'를, 반복이 만들어낸 차이를 찾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의 점차적인 '의인화' 혹은 '인간화'라는 측면이다. 이 오늘날의 <변신이야기>에서, 죽음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자신만의 방에서 나와, 천천히 인간들에게, 그리고 특히, 한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어떤 우편 배달 사고에서 기인한 관심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가 <우편엽서Postcard>에서 말하는 destinerrance* 또는 도착-방황, 목적지-방황, 심지어 운명적 방황을 대하게 된다. 


[* 이 말은 발송인으로부터 떠난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에 기인하여 편지가 발신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읽히게 되는 효과를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단순한 해석상의 문제에서 국한 되지 않고 어떤 운명적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데,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한 사라마구의 말은 이 개념과 묘하게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그 남자, 개를 키우고, 직업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이 중년 남자에게 가야할 편지는 세 차례나 배달 사고를 낸다. 어찌 보면 이것은 죽음에게 심각한 문제다. 마치 시계와 같이, 정해진 운명과 같이 전달되어야 할 죽음의 예고에서 벗어난 이상한 일, 당연히 죽음은 결코 그런 문제를 묵과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죽음은, 아니 그녀는 그 편지의 수신인을 찾아가게 된다. 비밀스러운 시선(gaze), 결코 교환되지 않는 주시에서 어떤 사건의 가능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이 개를 키우는 첼로 연주자와의 관계 속에, 이 남자와의 관계 속에, 사랑의 사건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사라마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일어날 것이"라고.) 죽음은, 그녀는 잠이 든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삶을 시작했고, 단 한번도 잠을 자지 않았던 죽음은 그 남자의 품 안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그리고 이 우화는 시작하는 문장과 동일하게 그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앞에서 유예시켰던 문제들을 - 그리고 어떤 불가능의 가능으로서의 다른 한 가지 문제를 - 다시 돌아보도록 하자. 선물, 대문자 죽음, 그리고 사랑의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1. 선물의 문제: 우리는 위에서 과연 죽음을 선물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반대 급부로, 죽음의 중지에 의해 계속되는 삶을 선물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죽음도 죽음의 중지도 선물이 될 가능성은 없는데, 선물로 상정되고 있는 이 둘이 여전히 어떤 교환 경제 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적어도 이 우화의 전반부에서). 말하자면 죽음은 중지 되었던 중지 되지 않았던 간에, 국가에 의해, 그리고 자본의 순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문자 죽음'의 문제를 다시 사유해야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른다.  


2. '대문자 죽음'의 문제: 죽음의 인격화 혹은 육화의 과정이 제시되는 후반부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혹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눌 수 있는 지점에서, 제시되는 어항 속의 영과 초보 철학자의 대화는 대문자 죽음을 가장 두렵고 떨리는 것으로,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대문자 죽음이 어떤 무한한 것, 상상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이 법칙을,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으로 상상될 수는 없을까?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죽음의 죽음과 같은, 어떤 사랑의 사건과 같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실제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던 죽음이 남자의 품안에서 잠이 드는 것은 죽음의 죽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알기로 잠은 일종의 죽음의 연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반복 - 다시 한번 찾아오는 죽음의 중지 - 은 이전의 것과는 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의미에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그리고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문장 역시 소설이 처음 시작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3. 사랑의 사건: 이것은 이 우화의 결말과 관련된 문제다. 그래서 앞부분에서 다루지 않았던 것인데, 여하튼 바로 앞에서 이야기 한 대문자 죽음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죽음의 죽음을 불러오는 사랑의 사건은 어떤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가. 둘의 만남을 통해 이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놀라운 가능성들로 다가온다. 물론 거기에는 위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얼치기 철학자와 작은 영의 대화가 액면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대문자 죽음, 또는 죽음의 죽음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법칙이 완전히 무너짐을 의미한다(전례 없는 파국). 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법은 일종의 한계지음이며 범위지음이다. 달리 말하면 막힌 담인 것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죽음 역시 마찬가지인데, 인간을 유한의 차원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바로 이런 막힌 담을 허물고 담장 밖에 펼쳐진 세계로 눈을 돌려 이를 탐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틀어박힌 골방을 나가, 타자와 만나도록 하는 것. 영원하지만 고독한 생활, 남의 슬픔과 아픔을 느낄 수 없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죽음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 자체가 가진 효과는 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물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선물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 유한을 무한으로 열어내는 사건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이 된 죽음, 그녀는 선물을 받게 된다. 죽음에 대한, 죽음을 향한 선물,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말이다. 그리고 인간, 혹은 그녀가 사랑하게 된 남자가 대표하는 인간, 역시 동일한 의미에서 어떤 선물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미 법칙 바깥에 있으며, 국가의 관리와 통제에서, 그 비밀스러움과 그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죽음은 일종의 선물로 사유될 수 있다. 죽음의 죽음, 혹은 대문자 죽음, 법과 한정의 파괴, 우리는 그것을 선물이라 말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전개된 상황이 데리다가 쓴 책 <죽음의 선물>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겹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따라간 논의의 경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제목 <죽음의 중지>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이다. 영어판의 제목 <Death with Interruptions> 혹은 중단들을 지닌 죽음, 중단된 죽음이라는 말 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포르투갈 어를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비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글을 맺을 수도 있을 듯하다. 내가 쓴 이 글, 이 사라마구와 데리다에 대한 충실성으로 쓰여진 글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보완물(complement), 혹은 원작과 원문을 다른 것을 바꿔 버리는 보충물(supplement)***, 더 나아가 원작자에 대한, 원작에 대한 충실한 배신은 아닐까?


[** 물론 <죽음의 선물>은 이 책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데리다의 책은 기독교 사상가 파토카에 대한 면밀한 독해로부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물론 신은 마지막 순간에 이삭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서 '죽음의 선물'은 희생 제물, 번제(holocaust)의 희생물을 의미한다. 어쨌든 데리다가 겨냥하고 있는 것을 의무와 부채를 넘어선 책임,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 보완과 보충은 각각 이란 부족한 것을 다 차도록 채우는 것, 그리고 부족하지 않더라도 넘치도록 채워넣는 것을 의미한다. 보충은 그래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말하자면 넘치도록 채워 넣음을 통해 채워 넣는 대상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이 개념에 대해 '대리 보충'이라는 역어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데리다가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말 안에 있는 이면을 끄집어 내는 방식의 어법을 구사했던 것을 고려하자면, 이 '대리 보충'이란 역어는 '지양'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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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제목만큼이나 멋진 리뷰예요...

죽음, 죽음의 죽음, 죽음의 선물이라... 하아

jollyman 2011-12-21 23:05   좋아요 0 | URL
아 예.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에 길고 난문이라 과연 이런 걸 읽는 분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말이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