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
마이클 폴란 지음, 조윤정 옮김 / 다른세상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잡식동물의 딜레마Omnivore's Dilemma] 서평 - 먹을 것의 즐거움이 인간을 구할 수 있을까?

 

좋은 버릇인지 나쁜 버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새로운 책을 집을 때 마다 책장을 넘기기 보다는 잠시 공상에 빠지곤 한다. 특히 책 제목이 주는 ‘상상의 재료’ 혹은 ‘백일몽의 단초’는 언제나 내게 독서를 시작하기 위한 좋은 시작점이다. 이 책의 제목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몇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먼저 Omnivore (잡식 동물) 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잡식 동물이라는 말은 고기를 주식으로 살아가는 동물도 아니고 채식을 위주로 살아가는 동물도 아닌 두가지 모두를 먹을 수 있는 동물을 말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잡식동물이라는 말이 주는 어감은 왠지 약간은 게걸스럽고, 욕심이 많을 것 같고, 하지만 어떻게든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 잡식 동물은 마이클 폴란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쥐와 인간 등이 있다. 어쩌면 인간과 쥐가 전 지구 상에 가장 넓게 퍼져 있는 포유류 동물인 이유는 두 종 모두 잡식 동물이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지적은 꽤 재미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시 다른 우스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쥐라는 동물은 얼마 전에 한 친구의 추천으로 보았던 라따뚜이 (ratatouille) 라는 에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었던가? 이미 책을 읽고 난 이후라 이 책과 얼마나 이 에니메이션이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약간은 웃음 섞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절대 미각을 가지고 태어나 요리를 배우는 쥐, 상상력 속에나 있을 법한 ‘레미’라는 이름의 이 쥐가 자신의 동료들을 위해 했던 일은 먼저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사실 저자 마이클 폴란이 말하고 있는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가장 큰 부분이 바로 무엇이나 먹을 수 있는 잡식동물들이 독을 가려내야만 하는 그래서 가리지 않고는 먹을 수 없는 이 역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이쯤에서 여담은 그만하고 책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하자. 서문에서 마이클 폴란은 ‘이 책은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까 라는 단순한 물음에 대한 꽤 긴 대답.’이라는 역시 저널리스트다운 상당히 재치 있는 한마디로 책을 소개하고 있다.

국가적 섭식장애. 이것이 바로 현재 미국 사회의 음식문화에 대한 저자 대한 나름의 진단이다. 미국인들은 어떤 나라보다 비만으로 유명하며 다이어트에 누구보다 관심을 가지고 탄수화물만을 섭취하는 다이어트니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만으로 하는 앳킨스 다이어트니 하는 별별 방법들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미국인들이 생각하기에 살이 찌거나 성인병에 걸릴 수 밖에 없는 버터와 고기 위주의 식사를 하는 프랑스인들은 비만인구가 적다. 이것이 프랑스인의 역설이라는 것인데 여기서부터 저자는 관심을 미국 내 음식문화의 세가지 흐름으로 돌리게 된다. (사실 여기에서도 우리는 두가지 딜레마 혹은 역설에 직면하고 있다. 프랑스인의 딜레마는 이미 언급되었고 나머지 한가지는 미국인들의 딜레마 ? 어떤 다이어트를 해야 살이 빠질 것인가 ? 하는 문제이다. 개인적으로는 프랑스인의 딜레마가 훨씬 마음에 든다.)

저자 마이클 폴란이 추적한 첫번째 음식 사슬은 산업적으로 생산된 식품에 관한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현대 미국인들은 고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나후아틀어를 쓰던 아즈텍인들 보다 더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다. 소와 돼지, 닭 등 인간을 위한 정육을 제공하기 위한 가축들은 옥수수에 의해 키워지고 모든 조미료 및 당미료는 옥수수에서 추출한 고과당 (HFCS: High Fructose Corn Syrup) 에서 나온다. (정도의 차가 있겠지만 알고 보면 우리 사회 역시 미국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식품 산업의 최대 수혜는 미국의 군산복합체 및 식품 업체들이 얻고 있고 이런 과정에서 농민, 토지 및 동물들은 이루 말로 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 및 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연쇄의 근저에는 석유가 있다. 저자의 말대로 미국 국민이 소 한마리를 먹을 때 약 25 부쉘의 옥수수 혹은 1 배럴의 석유를 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패스트 푸드를 먹을 때 느끼는 질감과 풍미가 사실은 석유의 맛을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보면 상당히 섬뜩하기까지 하다. 

두번째 음식사슬은 유기적 사슬 (Organic food chain) 이다. 유기농의 시작은 사실 산업적 이윤 추구를 위해 지극히 단순화된 식품산업 구조에 대한 대안적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안으로 고안된 유기농업 마저 수익을 좇는 형태가 되다 보니 이미 새로운 식품산업이 되어 있었고 음식을 음식의 위치가 아닌 여전히 수익을 내기 위한 도구의 위치에 두게 되었다. 물론 종래의 식품산업에 비하면 훨씬 환경이나 소비자들의 건강을 위해 좋은 형태의 식품을 제공하지만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적인 산업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에 비해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웨스트 버지니아의 폴리페이스 농장은 보다 낳은 형태의 식품 생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농장 운영에 대한 농장주의 경험 및 지혜는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으며 미국에서도 이런 형태의 로컬 푸드 운동이 정착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세번째는 전원적 혹은 수렵, 채집에 의한 음식 연쇄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채식과 육식에 대해 육식을 할 때 닥칠 수 밖에 없는 가축의 도살, 그리고 그 때 겪을 수 밖에 없는 양심의 문제에 관해 공리주의 및 다른 철학자들의 시각을 빌어 생각해 보고 있는데 이 역시 잡식동물의 딜레마에 한가지가 될 수 있겠다. (솔직히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펼쳐지는 지나치게 이상적 혹은 현학적 논쟁이 책 전체의 내용에서 사족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저자의 사냥과 버섯채집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 관해 기술하고 있는데 야생돼지 사냥 후에 고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의 역겨움과 돼지를 요리할 때의 즐거움의 역설, 버섯을 먹는 즐거움과 또한 독버섯을 먹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두려움의 역설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으로 요리와 즐거운 저녁식사로 마무리 한다. 어쩌면 마지막 장에서 보듯이 요리라는 행위 그리고 즐겁고 좋은 식사라는 행위는 잡식동물로서의 인간이 대면할 수 밖에 없는 모든 딜레마를 조화시키는 해결 수단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먹는 것은 우리 문화의 근저를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성욕보다는 식욕이다.) 매우 고도의 생태학적 정치적 행위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사회가 식품의 산업화를 통해 음식의 연쇄에서 모든 복잡성을 배제하고 매우 단순한 형태로 환원하면서 토양을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생물학적 다양성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미국 사회는 군산복합체에서 식품산업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카길, 몬산토, 타이슨 푸드 등의 이익을 위해 미국인들의 건강을, 환경을,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저당 잡히는 매우 고도의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행위가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 그리고 미국화 (석유화) 가 세계화로 인식되고 있는 현대에 어떤 심각한 대가를 요구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문명의 흥망에 관해 살펴봄으로써 현재 우리 인류가 점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 돌아보는 자레드 다이아몬드의 2005년 저 ‘콜랩스’와 맥이 닿아있다. 자레드 다이아몬드는 '콜랩스'에서 어떤 문명 (혹은 사회) 은 아주 미미한 형태로라도 살아남았지만 거대한 석조 구조물을 만들 만큼의 힘이 있었음에도 현재에 있어서는 멸망한 문명과 화석과도 같은 유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로 전락해 버렸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다이아몬드의 답은 멸망한 문명들은 명백한 위기의 징조 (문명이 지속되던 지역의 자연환경이 파괴되거나 혹은 기후의 변화) 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살던 방식의 관성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지속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물론 그 기간은 순간이 아니었다. 진화 생물학적 의미에서 인류의 출현과 한 시대를 풍미하고 명멸했던 문명들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문명의 멸망은 절대 문자 그대로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마이클 폴란은 현재 우리 인류가 처한 음식문화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산업화된 음식문화가 지구의, 좀 더 정확히는 인류가 처한 위기에 일조하고 있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현재의 위기에도 지구 자체는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이다. 지구와 생태계는 과거에도 이런 위기를 얼마든지 겪어오지 않았나. 단지 이런 위기에서 영향을 받았던 것은 특정 종의 생물일 뿐이다. 예를 들면 공룡 같은...)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읽으며 잠시 다이아몬드가 현대 문명에 대해 언급한 문명 붕괴의 가능성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잡식동물의 딜레마'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종래의 식품 산업이 고도로 석유화되고 있고 대안이라 생각했던 '유기농' 마저 그에 발맞춰 산업화, 석유화의 물결을 타고 변질되고 있다.

 

'콜랩스'에서 다이아몬드는 현재 우리 인류가 처한 위기에 대해‘과거 석기와 동물의 힘이 없이 순수한 인간의 노동력만으로도 번성하던 한 문명을 멸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석유를 에너지로 쓰는 엔진과 매우 고도화된 연장을 쓰고 있는 60억 인류는 어떤가? 지구는 고립되어 있고 멸망해 버린 이스터 섬의 사회 같이 외부로부터의 도움은 없다.’라고 말한다. 지구가 지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는 유일한 행성인 것은 분명하고 (적어도 우리의 현재 지식의 한계 내에서…) 현재 인류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너무나 분명히 파국을 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희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현대의 인류에게는 신적 존재의 개입 혹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석유를 먹고 사는 현대 인류가, 미국화, 세계화, 궁극적으로 석유화에 길들여진 우리가 단순히 미디어, 교육, 그리고 몇몇 양심적인 회사의 양식있는 운영에 고무되어, 선거를 통해 그리고 정부를 향한 정책변화에 대한 촉구를 통해, 혹은 환경을 망치는 기업에 대한 소비자 단체 행동을 통해 우리가 이미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 멸망으로 향하는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이아몬드의 이런 희망은 왠지 요원해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직면한 너무나 큰 운명과 절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거 문명 혹은 사회가 멸망할 때 토양의 오염 혹은 토지의 생산성 저하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건이었다. 어떤 문명도 토양 오염 혹은 잘못된 토양관리로 인해 표토가 전부 쓸려나갈 정도의 상태가 되면 문명은 더이상 유지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토지의 상태를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문명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일까? 마이클 폴란은 현재 우리가 환원적, 산업적 차원에서의 토지관리로 오염되고 있는 토지와 그에 의한 생산성 저하 그리고 그 생산성 저하를 막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 (화석 에너지)가 들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석유의 사용으로 현대의 인류는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었고 동시에 농업을 산업화 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석유 에너지의 남용은 막대한 대가의 지불을 요구한다. 토양과 환경의 오염이 그것이다. 이미 산업으로서의 농업이 불러온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미생물이나 곤충 등의 생물학적 다양성을 제거해 버렸고 토지가 복잡계를 이루며 토지 자체를 다시 만들어가는 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렸기에 앞으로 이런 행위가 어떤 재앙을 불러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언젠가 화석 에너지가 고갈 되면 우리는 도데체 어디에서 에너지를 가져다가 토양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핵융합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에너지원을 만들어 내던가 혹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의 양을 조절하지 않는 이상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절대 기우가 아니다. 

 

그렇다면 폴리페이스 농장과 같은 산업화 되지 않은 전통적 농업생산 방식 (폴리페이스 농장의 관리법이 매우 발전된 것이기는 하지만 전통적 농업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과 현재 유럽과 캐나다 등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로컬 푸드 운동이 인류를 구원할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농업 분야에서 현대 문명의 석유화에서 벗어나 태양과 대지와 생물의 순환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현재 처한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런 골치 아픈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이런 질문은 이미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음식의 연쇄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결론적으로 마이클 폴란이 요리하는 인간 그리고 산업적으로 단순화 시키지 않은 음식문화를 보여주고 있고 이러한‘먹을 것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혹은‘산업화 되지 않은’음식문화가 간접적으로나마 길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희망적인 생각을 해본다. 산업화 되지 않은 음식문화는 적어도 먹을 것에 대해서 만큼은 석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언젠가 이런 예들이 모이고 쌓일 때 미국적 세계화 혹은 석유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대안의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은 즐거움에서 문제의 해답을 얻는 경우가 있다. 인간은 운명의 굴레나 절망스런 미래 같은 암울한 전망 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즐거움에 대해 반응을 보이곤 한다. 어디 음식의 즐거움 만큼 인간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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