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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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책에서 하나의 잘 쓰여진 우화를 발견하게 된다. 우화란 무엇인가. 그럴 듯한, 그러나 어딘가 현실과 다른, 그러면서도 동시에 현실과 같은 이야기,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혹은 서사를 우화라고 부른다. 물론 이 이야기는 이솝의 우화에서처럼 동물이 말을 하고 인간처럼 행동도록 하지는 않는다. 단지 어떤 하나가, 인간을 인간이도록 하는, 인간을 인류라는 공통적 이름 안에 집어넣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단독적인 것으로 만드는, 매우 본질적인 어떤 법칙과도 같은 것이 제거될 뿐이다. 바로 죽음이라는 조건이 말이다.


죽음은 어떤 것인가? '두렵고 떨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한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어떤 종말을, 끝을, 모든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죽음에 마주한 존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 하이데거나 말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bieing-towards-death)', 필연적으로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라는 점은 슬픈 일이다. 그런 이유로 영원한 삶 혹은 '죽음의 중지'란 어떤 것은 모든 사람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삶의 규칙과 절대적인 모순을 이루는 이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엄청난, 그리고 이런 상황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만한 불안을 일으켰다." 


잠깐, 무언가 이상하다. '죽음'이란 우리가 그 앞에서 두려워 하고 떠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두려움과 떨림의 근원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 우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 현실의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 은 불안해 하는가. 이것은 일종의 모순이다. 불안의 요소가 제거 되었으나 여전히 불안해 하는, 모순적인, 상황 설정이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은 다름 아닌 일종의 정보의 비대칭성(dissymmetry)에 기인한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이 우화에서 그렇듯이, 만일 죽음을 어떤 인격적 존재로 생각해볼 수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의 죽음은 필연이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오늘 잠을 자겠다고 누웠는데 내일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길건너 구멍가게에 물건을 사러 가다가 차에 치여 사망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러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알 수 없다'는 것에 기인한다. 모순적 상황. 우리는 죽음을 알지 못하기에 두려워 하지만, 삶, 순수한 삶, 죽음을 그 반쪽으로 하지 않는 삶 역시 죽음 그 자체와 동등한 정도로 알지 못한다. 법칙에서, 어떤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안을 유발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따라서 죽음의 중지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종의 선물, 죽음의 선물, 죽음으로부터 온 선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법칙과 교환의 경제로부터 벗어나는 이 죽음의 중지라는 어떤 해프닝(happening)은 선물이 정말로 선물일 수 있는가에 대해 의심하게 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것처럼, 선물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선물을 주는 사람은 선물을 받는 사람이 무엇을 받았을 때 기뻐할지 알지 못한다. 기껏 마련한 선물이 받는 사람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라면, 그 선물은 과연 선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물을 한 사람이 무언가 답례를 원하고 또 받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교환 행위일 뿐이다. 심지어 데리다는 선물을 주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어떤 자기 만족에 대해서도 말한다. 나는 선물을 할 만큼 관대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정신적인 충만함을 얻게 된다면, 어떤 물건을 사서 얻는 충족감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선물이라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며 따라서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불가능한 것의 가능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 선물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유예시키고, 다시 죽음이 사라진 이 나라의 상황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어쨌든 죽음이 사라진 나라에 사는 사람들 - 죽음이 멈춘 것은 어떤 특정한 나라에 국한된다 - 은 이 놀라운 기적을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 하다. 잠시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먼저 총리의 대국민 연설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상황은 이렇게 결론이 날 듯 한데, 이런 소멸이 불가피하게 야기할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도덕적 문제들과 맞설 각오라고 마무리 해 갔다. 총리는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우리는 신체 불멸이라는 도전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나라의 선량한 국민을 당신의 도구로 선택해주신 신에게 늘 감사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입헌 군주국인 이 나라의 왕가의 어른인 왕의 '모후'로부터 시작된 이 죽음의 중지는, 총리가 보기에, 일종의 국가에 대한 도전이다. 정부의 수반인 그는 이 전례 없는 일을 법칙과 질서를 수호하는 국가에는 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해프닝이 하나의 위기이며, 그로 인해 야기될 각종 문제들에 맞서야 할 그런 것으로 파악한다.  


사실 이 문제로부터 교회도 자유로울 수 없다. 종교는 어쩌면 어떤 두려움에,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에, 바로 죽어야만 한다는 인간의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총리의 연설이후 추기경이 총리에게 전화를 통해 하는 말들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소, 부활이 없으면 교회도 없소. ... 그게 다가 아니오, 도데체 어떻게 하느님이 자신의 죽음을 의도했다는 생각이 떠오를 수가 있는 거요, 그런 생각은 모독이오, 최악의 신성모독이란 말이오. ... 육체의 불멸이 하느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였지 않소, 그게 바로 그 말이라는 걸 깨닫는 데 초월 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필요는 없는거 아니오.


이를 듣고난 총리의 질문, 그리고 추기경의 대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예하. 그런데, 괜찮으시면 한 가지만 묻고 싶습니다. 물어보시오.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할 겁니까. ... 그 질문을 총리에게 되돌려주겠소,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죽지 않는다면 국가는 어떻게 할 거요. 


그들은 답할 수 없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중지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가중되어 간다. 그러나 이전의 법칙으로의 회귀를 강제할 수 없기에 국가도 교회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그렇기에 이들의 존재가 존속될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히 국가와 교회 같은 어떤 '재현적인(representative)' 성격의 기구들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민간 부문, 특히 우리가 '경제'라고 말하는 사회의 산업적 부분, 특히 죽음에 관련된 산업에 가중되는 타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먼저 병원에는 죽지 않는 환자들로 인해 병상이 복도까지 가득차는 일이 벌어진다. 노인 요양 시설('석양의 집'이라고 명명되는) 역시 마찬가지다. 장의사들은 인간이 죽지 않자, 애완동물의 장의 절차를 주된 업무로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보험업계 종사자들은 연금 보험 가입자들이 보험 계약을 파기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하지만 어찌 보면 돌파구는 바로 여기에서 마련된다.   


미래를 바라보는 추가 약정,... 의무적인 사망 연령을 여든으로 설정하는... 이렇게 하면 보험회사는 정상적으로 보험료를 받고, 행복한 보험계약자는 여든 살 생일을 축하하는 날 이제 실질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었으으모 계약서에 명기된 금액 전액을 즉시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회장은 또 덧붙였다, 만일 고객이 원한다면 다시 팔십 년간 계약 갱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 될 겁니다, 그 기간이 끝난 뒤에 그들은 다시 두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이전의 과정을 되풀이하게 되는 거예요, ...


이 보험업 연합회장의 발언은 모종의 '순환의 회귀'를 말한다. 어떤 체계가 완결되기 위해서는 그 체계는 닫혀 있어야만 하고 일종의 순환을 이루어야만 한다. 이들은 죽음의 중지로 인해 구멍이 뚫려버린, 순환이 중지되어 버린 체계를 다른 방식의 순환으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대안으로, 유사-법칙(quasi-law)으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이는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의 관리에 구멍을 뚫는 사회의 혼란은 어떤 방식으로든 봉합될 수 있다. 


실제적 사례, 비록 소설적 상황 내에서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여하간에 여전히 실제적 사례라는 이름으로 언급될 수 있는, 한 농가의 이야기가 제시된다.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회복불능 상태에 빠져 차라리 죽기만을 바라는 한 노인과 아이, 그리고 이들이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 자기 자신들의 안위 때문이 아니라 이들의 고통을 차마 지켜 볼 수 없기에 - 이들의 가족들의 사례. 이들은 이 죽어가고 있지만 결코 죽지 못하는 자들을, 산-죽음(living-dead)을 여전히 죽음이 활동하는 이웃 나라의 국경 너머로 데려간다. 그리고 이들의 방식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 하지만 문제는 곧 국경 문제로 비화되고, 자경단의 활동과 군대의 동원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죽음을 서비스하는 혹은 죽음을 사업으로 하는 마피아들의 암약이.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국가와 일종의 공모 관계에 있다는 점,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국가와 마피아가 어떤 새로운 교환 경제를, 새로운 순환을 만들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죽음의 중지로 인해 경제적 교환 관계가 중단된 바로 그 곳에서 국가 또는 마피아가, 국가와 마피아가, 구멍난 체계를 봉합하고(국경 봉쇄), 중단된 순환을 회복(새로운 사업의 발명)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적어도 이 소설의 전반부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문제다. 재현적인 또는 대의적인 성격을 지닌 국가는 상황 혹은 사회이 불안 요소를, 그 속에서 발생하는 공백을 통제한다. 갑작스러운 자연 법칙의 변화로 야기된 개인의 문제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 그것이 폭력을 포함하는 것이든 아니든, 또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 통제되어야만 하며, 그 통제의 방식은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다. 비밀, 알 수 없는, 그렇기에 불안한, 두렵고 떨리는 공모의 관계, 어쩌면 국가에 의해 의도하지 않은 것이면서 동시에 의도된, 이 '내새울 수 없는 것(the unpresentable)'의 내면화는 '죽음' 그 자체 보다 더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비밀스러운 관계에 의해 '비밀스럽게' 거래되는 자경단원들의 안위에 대해 치뤄지는 비용을 생각한다면 말이다(그들을 죽일 수는 없다는 의미에서 목숨에 대해 치뤄지는 비용이라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비밀스러움의 공포를,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국가의 개인에 대한 무한한 초과의 관계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이 죽음에 대한 사유의 도정에서 다른 길을 선택해야만 하며, 죽음은 다른 차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단순히 인간의 목숨을의 실을 끊어내는 '파르카이(Parcae)' 또는 '모이라(Moira)'가 관장하는 죽음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문제로, 애초에 <죽음의 중지>가 말하는 죽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로 접근해야만 한다. 물론 이 우화의 겉면에서 발견하게 되는 죽음은 그저 인간의 목숨을 끊어내는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사라마구가 인용하는  바울의 단언 -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고린도전서 15:55)" - 이 겨누고 있는 죽음은 이런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사라마구 역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풀어내는 어항의 물 위를 움직이는 영과 초보 철학자의 대화는 이야기의 후반부를 향해 가는 일종의 전조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각 개체를 감독하는 죽음은, 말하자면, 한정된 수명을 가진 죽음, 하위의 죽음이야, 이 죽음은 자기가 죽이는 것과 함께 죽지, 하지만 그 위에 더 큰 죽음, 예를 들어 인류의 새벽 이후로 인간을 책임져 온 죽음이 있는 게 아닐까.
.....
내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뻗어간 상태에서 말을 한다면, 또 하나의 죽음이 보이는구나, 마지막, 최고의 죽음이. 그건 무슨 죽음입니까. 우주를 파괴하는 죽음이지, 정말로 죽음이라는 이름값을 할 만한 죽음, 그런 일이 일어날 때 그 이름을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 죽음에 비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다른 것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세목에 불과하지. 그러니까 죽음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로군요.


작은 죽음들과 큰 죽음, '소문자 죽음'이라는 이름을 붙여진 잠시 유예된 죽음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대문자 죽음', 여기에서 죽음은 다수적인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것도 어떤 위계를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말하자면 소위 대문자 죽음이라는 것이 지금 잠시 활동을 멈춘 소문자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것임을, 모든 인간들과 세계에 종언을 가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움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초월적인 두려움. 이에 대한 서술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부정적인 정서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대화로부터 다른 것을, 보다 긍정적인 것을 끄집어 내도록 하자. 어쩌면 두려움과 비밀 이외에 죽음에 속하는 다른 성격을 생각해 보는 길을 통할 때 그런 일이 가능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우화의 후반부가 향하는 방향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런 긍정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대문자 죽음이 지닌 가능성이라는 문제에 머물기 보다는, 다시 이 우화의 흐름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지금으로서는 어떤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부족한 어떤 것 밖에는 제시할 수 없을 테니...


마치 이 '어항 위를 움직이는 영'이 어떤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기라도 하는 듯, 소설 후반부는 죽음의 점진적인 인간으로의 재창조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 영은 구약 성서의 <창세기>에 제시된 '수면 위를 운행하는 영', 즉 신에 대한 패러디다. 이 얼치기 영과 초보 철학자의 대화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들에서 죽음은 자신의 태업에서 벗어나 한 동안 죽음이 멈추었던 곳으로 되돌아 오는데, 마치 그 동안 -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 의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듯, 마치 인간의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라도 되는 양, 인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물론 죽음의 편지, 죽음의 예고장은 죽음을 부른다. 거기에는 단지 어떤 두려운 것의 예고만이 있을 뿐, 어떠한 감정의 전달이나 의사소통 같은 것은 없다. 


죽음이 돌아온 그 곳에서 환호하는 '죽음의 경제'를 굴리는 자들, 갑작스런 원래 상태로의 회귀에 당황하는 총리,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들은 다시 이 일로 야기된 혼란을 잘 관리한다. 소문자 죽음의 중지는 결코 체계를, 교환 경제를, 내적 완결성을 지닌 순환의 체계를 종결시키지 못한다. 물론 죽음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 지속된다. 이 붉은 봉투에 담긴 편지에 소문자로 사인한,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쓴 어떤 여자를 찾기 위한 시도, 그러나 무의미한, 결코 효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시도,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넘어서려는 불가능한 시도가 말이다. 두건을 둘러쓴 죽음은 단지 비웃을 뿐이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죽음, 우리는 이 '반복' 속에서 어떤 '차이'를, 반복이 만들어낸 차이를 찾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의 점차적인 '의인화' 혹은 '인간화'라는 측면이다. 이 오늘날의 <변신이야기>에서, 죽음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자신만의 방에서 나와, 천천히 인간들에게, 그리고 특히, 한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어떤 우편 배달 사고에서 기인한 관심인데, 우리는 여기에서 데리다가 <우편엽서Postcard>에서 말하는 destinerrance* 또는 도착-방황, 목적지-방황, 심지어 운명적 방황을 대하게 된다. 


[* 이 말은 발송인으로부터 떠난 편지가 수신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에 기인하여 편지가 발신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읽히게 되는 효과를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단순한 해석상의 문제에서 국한 되지 않고 어떤 운명적 결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는데, "일어날 수 있는 일"에 관한 사라마구의 말은 이 개념과 묘하게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 


어쨌든 그 남자, 개를 키우고, 직업으로 첼로를 연주하는 이 중년 남자에게 가야할 편지는 세 차례나 배달 사고를 낸다. 어찌 보면 이것은 죽음에게 심각한 문제다. 마치 시계와 같이, 정해진 운명과 같이 전달되어야 할 죽음의 예고에서 벗어난 이상한 일, 당연히 죽음은 결코 그런 문제를 묵과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죽음은, 아니 그녀는 그 편지의 수신인을 찾아가게 된다. 비밀스러운 시선(gaze), 결코 교환되지 않는 주시에서 어떤 사건의 가능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이 개를 키우는 첼로 연주자와의 관계 속에, 이 남자와의 관계 속에, 사랑의 사건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사라마구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모두 다 일어날 것이"라고.) 죽음은, 그녀는 잠이 든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삶을 시작했고, 단 한번도 잠을 자지 않았던 죽음은 그 남자의 품 안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그리고 이 우화는 시작하는 문장과 동일하게 그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앞에서 유예시켰던 문제들을 - 그리고 어떤 불가능의 가능으로서의 다른 한 가지 문제를 - 다시 돌아보도록 하자. 선물, 대문자 죽음, 그리고 사랑의 사건에 대해서 말이다.


1. 선물의 문제: 우리는 위에서 과연 죽음을 선물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반대 급부로, 죽음의 중지에 의해 계속되는 삶을 선물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결론적으로 여기에서 죽음도 죽음의 중지도 선물이 될 가능성은 없는데, 선물로 상정되고 있는 이 둘이 여전히 어떤 교환 경제 내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적어도 이 우화의 전반부에서). 말하자면 죽음은 중지 되었던 중지 되지 않았던 간에, 국가에 의해, 그리고 자본의 순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대문자 죽음'의 문제를 다시 사유해야할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른다.  


2. '대문자 죽음'의 문제: 죽음의 인격화 혹은 육화의 과정이 제시되는 후반부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혹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눌 수 있는 지점에서, 제시되는 어항 속의 영과 초보 철학자의 대화는 대문자 죽음을 가장 두렵고 떨리는 것으로, 절대적인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 부정적인 어떤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 대문자 죽음이 어떤 무한한 것, 상상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것이 법칙을, 국가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으로 상상될 수는 없을까? 긍정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죽음의 죽음과 같은, 어떤 사랑의 사건과 같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실제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던 죽음이 남자의 품안에서 잠이 드는 것은 죽음의 죽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우리가 알기로 잠은 일종의 죽음의 연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 반복 - 다시 한번 찾아오는 죽음의 중지 - 은 이전의 것과는 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의미에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그리고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라는 문장 역시 소설이 처음 시작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3. 사랑의 사건: 이것은 이 우화의 결말과 관련된 문제다. 그래서 앞부분에서 다루지 않았던 것인데, 여하튼 바로 앞에서 이야기 한 대문자 죽음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도록 하자. 죽음의 죽음을 불러오는 사랑의 사건은 어떤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가. 둘의 만남을 통해 이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놀라운 가능성들로 다가온다. 물론 거기에는 위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가능성들은 얼치기 철학자와 작은 영의 대화가 액면 그대로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 부정적인 것만도 아니다. 


대문자 죽음, 또는 죽음의 죽음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법칙이 완전히 무너짐을 의미한다(전례 없는 파국). 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법은 일종의 한계지음이며 범위지음이다. 달리 말하면 막힌 담인 것이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죽음 역시 마찬가지인데, 인간을 유한의 차원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바로 이런 막힌 담을 허물고 담장 밖에 펼쳐진 세계로 눈을 돌려 이를 탐색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틀어박힌 골방을 나가, 타자와 만나도록 하는 것. 영원하지만 고독한 생활, 남의 슬픔과 아픔을 느낄 수 없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던 죽음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 자체가 가진 효과는 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물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선물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 유한을 무한으로 열어내는 사건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이 된 죽음, 그녀는 선물을 받게 된다. 죽음에 대한, 죽음을 향한 선물,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말이다. 그리고 인간, 혹은 그녀가 사랑하게 된 남자가 대표하는 인간, 역시 동일한 의미에서 어떤 선물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미 법칙 바깥에 있으며, 국가의 관리와 통제에서, 그 비밀스러움과 그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라마구의 <죽음의 중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죽음은 일종의 선물로 사유될 수 있다. 죽음의 죽음, 혹은 대문자 죽음, 법과 한정의 파괴, 우리는 그것을 선물이라 말한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이 책의 초반부에서 전개된 상황이 데리다가 쓴 책 <죽음의 선물>이라는 제목과 묘하게 겹친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내가 따라간 논의의 경로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한다. 이것은 이 책의 제목 <죽음의 중지>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이다. 영어판의 제목 <Death with Interruptions> 혹은 중단들을 지닌 죽음, 중단된 죽음이라는 말 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포르투갈 어를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비교하자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글을 맺을 수도 있을 듯하다. 내가 쓴 이 글, 이 사라마구와 데리다에 대한 충실성으로 쓰여진 글은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보완물(complement), 혹은 원작과 원문을 다른 것을 바꿔 버리는 보충물(supplement)***, 더 나아가 원작자에 대한, 원작에 대한 충실한 배신은 아닐까?


[** 물론 <죽음의 선물>은 이 책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데리다의 책은 기독교 사상가 파토카에 대한 면밀한 독해로부터,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물론 신은 마지막 순간에 이삭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서 '죽음의 선물'은 희생 제물, 번제(holocaust)의 희생물을 의미한다. 어쨌든 데리다가 겨냥하고 있는 것을 의무와 부채를 넘어선 책임,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 보완과 보충은 각각 이란 부족한 것을 다 차도록 채우는 것, 그리고 부족하지 않더라도 넘치도록 채워넣는 것을 의미한다. 보충은 그래서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말하자면 넘치도록 채워 넣음을 통해 채워 넣는 대상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 이 개념에 대해 '대리 보충'이라는 역어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데리다가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말 안에 있는 이면을 끄집어 내는 방식의 어법을 구사했던 것을 고려하자면, 이 '대리 보충'이란 역어는 '지양'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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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2-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제목만큼이나 멋진 리뷰예요...

죽음, 죽음의 죽음, 죽음의 선물이라... 하아

jollyman 2011-12-21 23:05   좋아요 0 | URL
아 예.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에 길고 난문이라 과연 이런 걸 읽는 분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말이죠.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