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책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텔레라마 인터뷰 번역문. 에이전시가 원저작권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해서 같이 넣지 못했다.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 공개함. 역자 후기의 제목은 이 인터뷰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알랭 바디우: "1980년대 이래, 젊은이들은 가능성들의 지평이 닫히는 것을 봐왔습니다."



79세의 철학자는 젊음을 진단한다. 자유주의에 의해 길을 잃은 젊음을, 다에시(Daech)의 유혹을 받는 젊음을, 그리고 그 자신의 젊음을 검토한다. 그의 젊음은 공산주의로 점철되었고, 그는 여전히 이에 충실하다. 


<<우리의 병은 공산주의의 역사적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 2015년 11월 13일 직후에 출간된 시론 우리의 병은 훨씬 오래된 것이다Notre mal vient de plus loin에서, 바디우는 거리낌 없이 그렇게 서술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기 젊은 시절의 마오주의적 이상에 충실하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갈채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유를 받는 이 참여적 철학자는 전세계에서 번역되는 다수의 책을 저술한 저자다. 그의 저술은 존재와 사건L’Etre et l’Evénement (1988년)이나 세계의 논리Logiques des mondes (2006년) – 곧 세 번째 권인 진리들의 내재성L’Immanence des vérités 으로 이어질 – 같은 수학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대전(大全)에서 연극용 희곡, 전통 사상가들에 관한 세미나, 사랑예찬Eloge de l'amour (2009년)이나 플라톤의 국가La Réplublique, de Platon (2012년) 같은 대중서들을 거쳐 정황들Circonstances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정치적 개입의 텍스트 시리즈에 이른다. 이런 급증을 반영하여, 세 개의 시론이 참된 삶La Vraie Vie : 젊은이의 타락에 대한 요청(파야르Fayard 출판사), 그리스의 경로를 다룬 정황들 8권(리뉴Lignes 출판사), 그리고 시는 무엇을 사유하는가Que pense le poème?(누Nous 출판사)로 출간되었다. 충실하게 급진적인, 급진적으로 충실한 이 철학자를,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이 철학자를 만나보자. 



이 참된 삶이라는 책에서는 왜 젊은이들에게 말 걸기 원하신 건가요?


여러 다양한 이유가 한데 뭉친 겁니다. 먼저, 사적인 이유들로 젊은이들이 겪는 중대한 방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1980년대 이래 점진적으로 가능성들의 지평이 닫히는 것을 봐왔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헤치고 나가며 거기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자기비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목도했던 것이지요. 또한 내 주위에는 학생들이 있었고, 내가 오랫동안 이주민 숙소나 공장에서 정치 활동가로 일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상황들에서 추출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주 노동자 젊은이들과 자주 만났습니다. 그리고 또 내 중요한 원천들 중 하나인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와 젊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포함되는 이 전통에 있어, 젊음은 철학의 문제 자체이자 그 [문제가 향하는] 목적지입니다.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닐 법한 어떤 것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청중은 언제나 젊은이들인데… 철학함(philospher)이란 그 고유한 시간의 조건들에서 진리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젊음도 변전(devenir)하는 가운데 있는 세계로 들어가며, 또한 좌표축들(repères)과 고정된 지점들(points fixes)을 찾습니다. 그것이 젊음 자체의 과정이지요. 젊음은 그걸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젊음의 문제는 바로 철학자의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기를 요청하시죠. 하지만 젊은이들이 방향을 정하고, 진리를 찾도록 돕기 원한다는 사실이 어째서 타락이 되는 걸까요?


소크라테스의 심판자들이 젊은이들의 타락을 기소하고 바로 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귀책사유를 돌렸을까요? 전통의 몇 가지 양상들을 의심하게 하고, 도시의 신들에 대한 불경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젊은이들이 가족이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철학이 <<타락시킨다>>면, 이는 철학의 기능이 보수적이기 보다는 비판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 대해, 현실적인 상황은 플라톤의 시대보다 더 복잡합니다. 오늘날, 전통의 중요한 좌표축들은 부서졌지만, 사회가 이 부서진 좌표축들을 대신할 새로운 것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향락(joissances)은 주어지지만, 새로운 가치들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품에 대한 매혹에, 마르크스가 <<이기주의적 계산의 얼음물>>이라고 부른 어떤 것에 용해되어 버립니다. 젊은이들은 한편으로 전통으로의 복귀라는 진부한 가능성 – 이는 언제나 시체를 일으키고 유령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 과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인 경쟁에 빠져 거기에서 생존을 위해,  그저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투쟁할 가능성 사이에 고착됩니다. 내가 랭보를 따라서 <<참된 삶[진정한 삶]>>이라 명명하는 것은 세 번째 길입니다. 지나간 전통으로의 회귀도, 문명화된 외양을 갖추었으나 실제로는 난폭하고 야만적인,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규칙들의 수용도 아닌 세 번째 길이라는 것이지요. 랭보는 매우 젊은 나이에 [장차] 다가올 방향 상실(désorientation)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든(vieux) 그리스도가 땅을 떠났음을 분명히 봤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녔고, 거기에서 이것저것 모든 것을 조금씩 했지요. 그의 <<바보짓들(folies)>> 중 하나였던 시작(詩作)을 비롯해서 말입니다. 랭보는 자기 삶을 불태웠는데, 근대의 세계가 돈과 성공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랬지요. 그런 다음 식민지를 도는 밀매업자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참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복종으로도 즉각적인 충동의 만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삶, 그 때 주체가 주체로 구성되는 그런 삶입니다. 내 견해로는 진리가 드러나는 네 가지 영역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진리의 네 가지 구성 절차들이라고 명명합니다. 예술, 사랑, 정치 그리고 과학이 그것들이지요. 나는 젊은이들이 이 네 가지 조건들을 가로지르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이 모든 형태의 예술을 마주치기를, 사랑에 있어 지속과 충실성을 유지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맞서 정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정치적 재구축에 참여하기를, 그리고 과학을 기술 또는 자본의 손아귀에 넘기지 않기 위해 지금 그런 것만큼 과학에 무지한 채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소년들과 소녀들에게 각각 한 장씩 할애합니다. 양성의 차이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사유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전통들의 동요는 소녀들과 소년들에게 동일한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요는 여자들에게 더 많은 문을 열어서, 이들은 점점 더 남성적 억압이나 오래된 세계에 퍼져있던 결혼에 대한 의존성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경력의 지평들이나 여자들이 [이전에는] 가질 수 없던 능력들을 얻게 되면서 말입니다. 소녀들은 동시대의 세계에서 소년들보다 훨씬 편히 지내며, 특히 그들의 학업에서 더 나은 성과를 보이지요. 나는 완전히 길을 잃은 젊은 사내들을, 그러니까 작은 마약 판매상들, 외곽도시(cités)의 가짜 두목들 등의 소송에 도움을 보태왔습니다. 그들의 누이들이 변호사였는데… 이 소년들에게, 군복무가 사라진 것은 모든 입문의례의 일반적인 사라짐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젊음(jeunesse)과 성년(âge adulte)의 문제는 문턱을 지시하는 정해진 절차들을 통해 다뤄졌습니다. 삶의 시기의 식별(identification)은 이제 모호해졌고, 그래서 청춘지상주의(jenisme), 가능한 한 오래도록 젊게 남아야 한다는 점이 규범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권력은 여전히 늙은이들에 의해 점유되며, 또한 젊은이들의, 곧 무리 지은 젊은이들의 공포가 지배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전반적인 혼란을 초래했지요. 



선생님이 정치적 개입에 관해 쓰신 최근의 몇몇 텍스트들에서는 어떤 다른 젊음이 나타납니다. 이 젊은이들은 선생님이 <<젊은 파시스트들>>이라고 규정하신 다에시(Daech)에 가담한 친구들이지요. 


나는 유행에 따라 <<급진화된 자들(radicalisés)>>이라는 용어보다는 <<파시스트들>>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내가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로부터 산출된 대중적 주체성인데, 여기에 민족주의적이며 정체성 중심적인(identitaire) 담론과 혼합된 것입니다. 파시즘은 반동적인 주체성이지요. 실제로 이 젊은이들은 대체로 외곽도시들에서 그저 하찮은 [마약] 밀매상이 되어야 하는 데서 오는 좌절을,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없었다는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즉각적인 만족을 통해, 또한 경쟁이나 성공의 가혹한 법칙을 통해 다소간 유감스럽고도 기회주의적인 방황을 거부합니다. 이 젊은이들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위반과 즉각성 가운데 자기 삶을 소비하고 불태우는 현상과 사회 안에 자리잡고 은행가나 주식시장에 상장된 스타트업 기업 사장이 되는 현상 사이에서 경험하는 양자택일 바깥에 위치합니다. 그들의 허무주의는 희생적이며 범죄적인 영웅주의와 서구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성의 혼합물입니다. 이 파시즘적 공격성은 전통적이며 정체성 중심적인 퇴행에, 부분적으로 이슬람교로부터 그들에게 제시된 전통의 잔해에 의지합니다. 이것은 이슬람교화된(islamise) 파시즘화이며, 파시즘화된 이슬람교가 아닙니다. 그 종교는 그저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자살적 행위와 타자의 살해로 향하는 길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낙심한 주체성에 만족을 허용하는 전반적인 매혹을 목표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젊은이였나요? 당시에 선생님을 고무시켰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1937년에 태어났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지나갔는데, 이 시절의 세계는 전후에 나라를 재건하는 세계였고, 구조화된 동시에 역동성이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계급의 차이가 매우 분명했지요. 농촌이나 노동자 출신의 젊은이들은 12살에 학업을 마치고, 대학 입학자는 한 연령층에서 10%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정당은 강했고, 승리한 소비에트 연방과 연결된 강한 후광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 방향이 그려졌지요. 국가의 자본주의적 재건이라는 방향, 그리고 공산주의 정당으로 구현된 프롤레타리아적 방향. 혁명인가 순응주의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선생님은 둘 다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서민 출신이 아니었고, 본래 중산계급의 윗부분에 속했습니다. 양친 모두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셨고, 아버지는 툴루즈의 사회당 출신 시장이셨지요. 나는 지식인의 일반적인 인물상을 구현했지만(고등사범학교, 교수자격), 지성적으로는 혁명의 편에 서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런 배치는 결국 상당히 편안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18세기 <<철학자들>>의 지지를 구성하는 노선에 있는 두 가지 길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중의 역할에 동요를 가져온 것은 식민지 전쟁입니다. 나의 진정한 정치 교육은 알제리 전쟁이었고, 이로 인해 나는 급진적인 결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파리의 경찰서들에서 고문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이럴 때 흐름에 역행하고, 편안함에서 빠져나가며, 자기 삶을 사유의 기준음에 맞춰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직했던 첫 시위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지요. 도처에 <<패배주의적인 지식인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었습니다. 나는 사회당의 분열에 가담했는데, 이 분열로 PSU(통합 사회당, Parti Socialiste Unifié)가 탄생했지요. 68년 5월 이후, 나는 노동자 숙소들, 외곽도시들, 공장들에서 매우 적극적인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마오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 아래, 그것은 그 시절의 주요 결정들 중 하나였지요. 



그 시절에 대해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선생님은 줄곧 마오주의자이셨고, 선생님의 비방자들은 그걸로 선생님을 비난합니다. 


실제로, 나는 공산주의적 가설을 주장합니다. 나는 현실적으로 헤게모니를 쥔 사회•경제적 조직이 유일한 가설이 되는 그러한 세계에 거주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이 괴물성을, 전체 인구의 10%가 가용자원과 자본의 86%를 소유하는 이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폐물이 되거나 내던져버릴 무엇이기는 고사하고, 내 견해로 공산주의적 이념은 너무나 젊습니다. 이 이념은 그 역사적 경로에서 시작에 있지만 – 겨우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이지요 – 이에 반해 자본주의는 6, 7세기 전에 발생하여 구체제(Ancien Régime)의 적폐나 불평등을 재생산합니다 – 10%는 어림잡아 그 시대 귀족들의 비율이었지요… 나는 스스로 공산주의 사회들의 악행과 범죄를 완벽하게 알고 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내가 마오주의자였던 것은 스탈린주의의 지양과 변경이라는 비판적 요소들을 마오주의에서 식별했기 때문입니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으로 열렸던 시기는 오류와 극적인 변조로 점철되었는데, 그 중 우선적인 것은 공산주의가 그 자체의 원칙에 있어 중앙 집중화된 국가에 대한 불신을 품지만, 러시아 공산주의는 결국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앙 집중화되고 관료적인 국가를, 모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라는 유혹에 넘어간 국가를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그 첫 번째 성공 안으로 좌초되었고, 초라한 60년이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설을 놔버려야 할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이데올로기적 실패에 [현재의] 정황적 실패를 중복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다가올 선거와 니콜라 사르코지의 잠재적인 복귀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선생님은 2007년에 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De Sarkozy est-il le nom?라는 소책자를 내신 적이 있지요. 


나는 1968년 6월 이래 투표하지 않으며, 내 나이에 [투표소로 가는] 그 줄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요. 선거에 대한 의견(자문, consultation)은 오로지 기존 질서에 내부적인 의견일 뿐이며, 동일한 정세 관리와 관한 몇몇 뉘앙스들을 다루는 판정일 뿐입니다. 좌파는 우파와 정확하게 같은 정치를 계속합니다. 그러데, 구별되는 두 가지 길 사이의 진정한 선택이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르코지를 환기하시는군요. 거기에서 내 개인적인 알레르기를 건드리는 셈입니다! 내게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신 아버지께 물려받아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애국주의라는 오래된 바탕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런 양아치가 국가원수가 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실제로, 올랑드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사르코지의 정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올랑드는 심지어 과거의 사회적 장악의 붕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는 마크롱 같은 이론가들을 곁에 두고 근대성의 이름으로 그런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에게 근대적인 것이란 19세기 자유주의 곧 자본주의의 본성적 이데올로기로의 회귀이며, 그것은 사회적 규제도 노동권이나 퇴직연금도 좋아하지 않지요. 이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마음껏 활개칠 자유를 얻었고, 대면할 어떠한 강한 적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 적수의, 오직 하나뿐인 진정한 적수의 가설을, 즉 공산주의의 가설을 유지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철학하기를 계속할 것을 말입니다. 이천 년이면 – 이것이 철학의 시간적 층위인데 – 결코 누구도 더 이상 사르코지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플라톤이 누군지 완벽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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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적 정의>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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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으로 제닝스 선생의 책을 국내에 소개하게 된 것은 세 번째다. 아마도 지금쯤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을 제닝스 선생은 성서와 신학에 관한 탁월한 지식으로 무장한 유쾌한 노학자다. 특히 데리다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명석함으로 번뜩이는 이 대가와 함께 처음으로 작업할 기회를 얻었던 것도 벌써 대략 7, 8년쯤은 흐른 듯 하다. 우연한 기회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번역 일에 뛰어들기도 전에 오며 가며 알게 된 제닝스 선생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Reading Derrida/Thinking Paul)> 구해 읽다가 이걸 우리말로 옮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함께 공부하던 한 친구의 소개로 마침 국내에 방문하게 된 제닝스 선생(이하 테드 제닝스로 표기)을 직접 뵙고, 퀴어 신학의 눈으로 신약성서를 살피며 기독교의 반동성애적 경향의 성서해석에 대해 도전하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라는 책을 먼저 번역하게 되었다. 이 책이 판매고로 보자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사회와 교계의 반동성애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작게나마 조금씩 터져나오기 시작하던 분위기에서 나름의 반향을 얻었고, 그런 탓에 테드 제닝스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퀴어 신학자 혹은 동성애 신학자라는 타이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테드 제닝스의 중요성은 결코 퀴어 신학에만 그치지 않는다.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에서 드러나는 데리다 사상에 대한 철학적 해박함과 바울 신학에 대한 명석함은 대가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러한 철학과 신학의 연결 및 협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유의 공간은 데리다와 바울이라는 언뜻 보기에 관련이 없는 둘 사이에서 법과 모순적 관계에 있는 정의와 법 바깥에 있는 정의의 요구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이 둘 사이의 비교나 축자적 해석에만 그치지 않는 독창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하게 된 책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는 앞선 작업과 관련하여 이전부터 계획되었던 작업인데(이에 관해서는 <데리다/바울>의 서문에서 언급한다), 앞서 소개된 책이 바울 읽기에서 데리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타당한 관점들을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라면, 이번에 소개되는 책은 보다 본격적으로 바울의 로마서에 뛰어들어 근래 무신론적 사상가들이 제공한 정치적인 바울 읽기의 성과를 함께 소개하는 작업이다.  


내가 번역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대단한 역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법한 책이다. 정말 그런 지는 결국 독자가 판단할 몫이겠으나, 일단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답을 통해 가름할 수 있을 듯 하다. 말하자면, 정치적 측면에서, 특히 일반적으로 소위 정치신학이라 말하는 측면에서 바울을, 특히 바울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데 어떤 이점이 있을 수 있을까? 



2


먼저 시간 혹은 역사와 절연된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읽어오던 로마서라는 텍스트를, 이 텍스트를 쓴 바울을 다시 읽어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와 신학계에 한정되어 있던 바울 독해는 로마서를 어떤 개인적 차원의 시각으로 국한하여, 로마서를 바울로 상정되는 한 개인이 율법의 선한 명령을 실행하고자 하지만 죄를 향한 방향으로 고정된 그 자신의 육신으로 인해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어떤 실존적 고뇌를 말하곤 한다. 개인적 차원의 올바름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얻게 되는 칭의(이신칭의)는 서구 중세라는 역사적 배경(종교개혁)에서 나름의 정치적 의미를 얻기도 했으나, 이러한 해석 방식에 치중할 때 로마서 읽기는 시대착오적이기에 오늘날 교회 바깥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 정의의 요청과 요구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이로 인해 로마서는 종교적인 올바름 혹은 의로움을 얻기 위한 무시간적인 바울 신학과 윤리를 서술하는 텍스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따를 때, 로마서 1:18~25의 서술은 '동성애'에 대한 정죄로, 3:21~31에서 나타나는 의로움을 인정받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치부되고, 이와 함께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에 대한 서술은 우주론적 신비의 차원에 할당되며, 유대 민족의 구원을 말하는 9~11장의 논의는 일종의 부가적 서술로, 그리고 이후 12~15장의 논의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위한 교훈으로 해석된다. 로마서에 대한 정치신학적 독해는 바로 이러한 교회와 신학계라는 게토 바깥에서는 도저히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해석에 보다 타당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이러한 개인적•실존적 차원에 국한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연다. 또한 이와 함께, 마치 바울 당시의 로마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지배만이 단 하나뿐인 가능한 지배체제로 간주되는 오늘날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에서 어떤 시사점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제공한다.  



3


정치와 관련하여, 그것도 정치신학적 측면에서 로마서 읽기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정치신학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학자는 나치스 정당의 법적 논리를 기반했던 법학자 카를 슈미트다. 이 책이 취하는 정치신학적 관점이란 결국 슈미트와 그의 동시대인이었던 발터 벤야민 간에 있었던 대화에서 유래한다. 이를테면, 슈미트는 '국가에 관한 모든 근대적 이론들이 일종의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들'이라는 주장을 제시하는데, 이는 국가 주권을 마치 신의 지상권(또는 자유의지)인 것처럼 간주한다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학의 논리에 기반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속화된 정치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장하며, 법의 지배를 중단하게 될 '예외상태'를 선포하는 자로서의 군주 또는 독재자에 관한 논리를 제공한다. 벤야민은 이에 대한 반론으로 '신적 폭력'과 '약한 메시아적 힘'을 제시한다. '신적 폭력이란 유사하게 법의 지배를 중단하는 무엇이지만, 이는 국가와 지배자의 입장에 서는 슈미트의 논지와 완전한 대척점에 서는 대중 혁명이나 총파업과 같은 무엇이다. 그리고 '약한 메시아적 힘'이란 개별 민중에게 간직된 국가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고 이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대화가, 야코프 타우베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신약성서에 매우 중요한 한 인물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까닭이다. 바로 로마서를 쓴 성 바울이라는 인물 말이다.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신학>에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의 로마서가 메시아 조직의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말하기도 한다(클라우제비츠에 따를 때,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로마서와 정치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 맥락 안에서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이를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ing) 방식이 필요하다. 즉, 로마서의 언어를 이 서신이 쓰일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언어로 바꿔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성서 번역에서 나타나는 의 혹은 올바름(righteousness)은 정의(justice)로, 그리스도(Christ)는 메시아(Messiah)로, 예수(Jesus)는 여호수아(Joshua)로, 믿음(faith)는 충실함(faithfulness) 혹은 충성(loyaty)로,  은혜(grace)는 관대함(generosity) 혹은 호의(favor)로 바꿔 말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용어상의 전환은 성서 본문과 성서가 쓰일 당시 문서들에서 후견인(patronus)과 피후견인(clientes)의 주종 관계나 로마 황제에게 쓰이던 용어들을 지도자인 메시아에 대해 전용하는 방식으로, 당대의 사회•정치상을 보여주는 역사서들의 일반적인 번역을 고려할 때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5


이러한 배경에서 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물론 테드 제닝스가 제시하는 관점에 따라서 말이다. 어떤 새로운 정의를 말하는 이 편지의 시작은, 제닝스에 따를 때, 일종의 사법적 기소 혹은 고발로 시작된다. 로마에 거주하는 메시아적 세포조직에 대한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바울은 마치 법정에 나선 검사와 같이 법에 대한 기소를 시작한다. 먼저 이방인의,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의 법에 대한 고발이 시작된다.(이때 개인주의적인 해석에 따를 때 문란한 성생활과 동성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석되던 로마서 1:18~25는 이러한 바울 생존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서 오히려 로마 제국의 지배층에 대한 고발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유대 민족의 율법도 바울의 기소를 피해가지 못한다. 당연히 이는 각각의 법으로 운영되는 두 사회와 정치체에 대한 고발이다. 


이러한 고발에는 이방인의 법과 유대 민족의 율법이 어떤 한 사건과 관련하여 정의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그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부정의를 낳는 도구가 되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로마 제국의 법(이방인들의 법)은 신이 보낸 메시아를 제국의 반역자를 벌하는 형벌(십자가형)로 처형했고, 유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율법에 따라 그 메시아를 제국 군인들의 손에 넘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법은 모두 정의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고 따라서 부정의하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의, 곧 이 두 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의를 가져올 필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적인 정의, 이방인의 법과 유대인의 법 양자 모두에서 벗어나는, 그 둘의 바깥에 있는, 곧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인 것이다. 그리고 이 법 바깥의 정의는 법의 준수가 아니라 오직 충실성 혹은 충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먼저 죽기까지 충성한 메시아 자신의 충실함은 지지자들의 충실함을 불러와 그들을 신적인 정의의 부름에, 메시아적 정의의 요청과 요구에 부응하는 정의로운 자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메시아적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생명과 영에 속한 메시아적 인류는 죽음과 육신에 속한 아담적 인류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여기에서 생명과 영 그리고 죽음과 육신이란 어떤 의미에서 삶의 양식에 관한 것이며, 전자가 충실함에 기초한 정의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기존의 법과 관련된다. 바울의 논변에 따를 때,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더 이상 죽음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면, 죽음에서 살아난 메시아를 따르는 지지자들은 이미 죽음의 관할에 곧 법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은 확실하게 메시아의 죽음 이전의 법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희소한 자원과 이 희소성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economy) 혹은 이법(理法)이 아니라 넘쳐남에, 선물과 같은 관대함과 호의에 기초한 포함의 논리에, 오로지 신적인 정의와 메시아에 대한 충성에 이어 선물과 같이 주어지는 관대함의 논리에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포함과 연대는 심지어 – 일반적으로 우주론적 차원의 신비를 말한다고 간주되는 – 로마서 8장의 피조물들과의 연대에 이르기까지 연장된다. 



6


하지만 여기에는 약속의 문제가 남는다. 신이 과거에 맺은 계약은 깨어진 것이고, 계약을 맺는 자들에게 주어진 법은 폐지되어야 할 무엇인가? 로마서 9~11장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기존에 맺어진 계약과 이에 따른 법은 메시아적 정의를 통해 더욱 완성되어야 할 무엇이라 주장하며,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이 비록 한 때 메시아에 반대하는 자들이었으나 종국에는 이 새로운 신적 정의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드러낸다.(이것은 기독교권의 역사에서 지속된 소위 '유대인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의 논변을 근거로 한 유대인의 배제가 얼마나 큰 오류인지 보여준다.)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제닝스가 지적하는 신의 특성이다. 바로 결코 예상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언제라도 믿을 수 있는(일관적인), 결코 약속을 깨지 않는다는 특성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은 마치 '즉흥연주'와 같이 진행되며 심지어 신적인 정의에 반대하는 자들마저 자신의 구도에 포함해 넣는다. 마치 재즈 연주처럼 몇 가지 틀이 정해지지만 언제라도 일어나는 일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매순간의 임기응변으로 진행되는 이 연주는 각자의 선율과 박자로 진행되기에 무엇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지만, 모두가 함께 합쳐질 때 하나의 음악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 언제라도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완성될 무엇이다.(이 책의 체제 역시 마치 악보와 같이 구성되어 있는데, '전개부[phase]'나 '종결부[coda]'라는 용어에서 이런 점이 드러난다.)


이후에 이어지는 로마서 마지막 부분(12~15장 전반부)은 종래의 해석에 따를 때, 단순히 공동체적 교훈을 제시한 부분으로 해석되곤 했다. 바울의 복잡하면서도 마치 나선을 따라 상승하는 듯 여겨지는 특유의 신학이 서술된 1~8장의 논의에 비할 때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제닝스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부분이야말로 정작 중요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이 부분의 논의에서 나타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거나, 메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환영하며, 관대함을 보이라는 이야기는 단순히 종교•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메시아의 몸에 통합된 충실한 자들을 위한 강령이기 때문이다. 



7


이 글의 마지막으로 가기에 앞서, 책에서 소환하는 여러 사상가들 중에 두 사람을 끌어내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두 사람은 데리다 외에 아마도 제닝스가 가장 자주 언급한다고 여겨지는 바디우와 아감벤이다. 책에서도 이런 경향이 드러나지만, 전에 저자가 국내에 방문했을 때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자면, 그는 기본적으로 바울 해석에 관해 전반적으로 바디우 보다는 아감벤에 동의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제닝스가 책의 논의를 시작하는 토대는 벤야민에게서 유래한 '메시아적인 것'의 정치신학이며, 이를 보다 분명하게 논의한 타우베스나 아감벤의 바울 해석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독해 방식에 바디우의 바울을 보는 시각은 적합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디우의 바울 논의는 바울 텍스트의 정치신학적 해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사건-주체-진리의 구조에 따라 어떤 새로운 보편의 주체를 찾고 그 예시를 들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주체'의 문제에서 오는데, 제닝스가 이 책에서 뒷부분에서 '메시아의 몸', 곧 메시아 사건에 충실한 자들의 공동체를, 어떤 집단적 주체를, 메시아적 '전위대'를 말하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주로 사용하는 '분할의 분할'이라는 논리, 말하자면 어떤 구분을 만드는 분할을 다시 분할하여 그것을 양쪽이 서로 트여있어 '작동하지 않는' 혹은 '무위의' 구분으로 만들어버리는 논리는 특히 바울의 종말론적 입장에 적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지금의 시간'은 분할의 분할로 만들어진 나머지 혹은 잔여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자리잡아 각각이 결코 닫혀지지 않는, 다시 말해 과거도 현재도 아닌,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시간의 중지(일종의 예외상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어떤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은 찾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구분에 이 분할의 분할을 적용하면, 비-비-이방인이나 비-비-유대인은 이방인도 유대인도 아닌 자가 된다. 이는 어쩌면 바울의 종말론적 관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적용할 때, 주체는 흔들린다. 아니 분명한 주체의 가능성은 제거되고, 종말론에 어울리는 '주체성'만이 남는다. 메시아적 '전위대'라는 것은 아감벤의 입장에서 그리 타당하지 않을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 사건에 충실한 새로운 집단적 주체(바디우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유대인적 주체도 이방인적 주체도 아닌 비변증법적 주체로서의 기독교적 주체)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바디우의 관점이 더 나은 설명력을 가질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 자체가 일정 이상의 절충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바울의 로마서라는 근간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로마서에 관한 근래의 정치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각각의 부분에 서로 입장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상들이 번갈아 등장하며 한 데 뭉쳐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삭감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인해 일정 이상의 협상과 양보가 있었다 해도 바울의 로마서를 중심에 둔 탁월한 정치신학적, 정치철학적 주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8


이 절충이나 협상이라는 사안과 관련하여, 로마서 15장 하반부에서 16장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관해 제닝스가 제시하는 논변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되겠다. 이 부분은 주로 바울의 로마방문 목적과 로마에 있다고 간주되는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한 인사말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에서 제닝스는 바울의 인사말에 등장하는 몇몇 외국 출신자들과 아마도 해방노예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독해와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던 초기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종래의 로마서 번역이 이러한 교회의 '위험한' 면모를 감추기 위한 방식으로 변조되었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어쩌면 제닝스가 로마서 해석의 역사에서 그 급진성을 간직하고자 하는 투쟁을 논하며 언급하는 '도래할 민주주의'와 약간은 다른 맥락이 되겠으나, 이 책이 전개하는 로마서 해석의 절충적 성격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간직한 논의들이 로마서 해석이라는 장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단점을 메워주는 어떤 환대의 장을 마련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환대의 장 안에서 독자들은 저자의 명석한 로마서 독해에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향연의 장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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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형이상학>에서 고쳤으면 하는 부분(운좋게 2쇄가 나온다면 아마도 수정될 내용)


 

p20, 아래에서 세 번째 줄

그것은 예외 없이 도박, 곧 위험한 관여인 움직임 속에 있다. > … 예외 없이 도박으로서의 활동에, 곧 위험을 무릅쓰는 관여에 있다.

 

p21, 7번째 줄

인민은 야만성과 격노에서가 아니라 유효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봉기해야 한다. > … 격노가 아니라 유효하고 합리적인 방식에 따라 봉기해야 한다.

 

p24, 5번째 줄

모든 현실이 용해되는 이 파도의 > … 녹아내리는 이 파도의

 

p31

아래에서 5번째 줄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 역사는 > … 형이상학의 역사는

 

아래에서 4번째 줄

철학은 형이상학의 요소로 인해 > … 형이상학이라는 요소로 인해

 

아래에서 두 번째 줄

한 시대 전체의 종언이다. > … 한 시대 전체의 종언이기도 하다.

 

p36, 아래에서 5번째 줄

사람들은 어느 지점에서 이 게임들 간의 소통이 어려운지 알고 있다. > … 사람들은 이 게임들 간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p37, 10번째 줄

제기하는 도전을 응대할 수 없게 된다. > … 제기하는 도전에 응대할 수 없게 된다.

 

p38, 10번째 줄

규칙이 의미의 경계를 획정하는 문제를 > 규칙이 의미의 경계 획정이라는 문제를

 

p45, 첫 번째 줄

할 수 있는 한 시간을 얻을 시간, 이를테면 > 할 수 있는 한 여유를 얻을 시간을, 이를테면

 

p50, 아래에서 두 번째 줄

끝으로 모두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의 세계가 매우 불안정한 세계임을 저마다 > 끝으로 우리가 인식하는 그대로의 세계에 관하여, 우리 모두는 이 세계가 매우 불안정함을 저마다

 

p54, 10번째 줄

그러나 이상학의 > 그러나 형이상학의

 

p61

4번째 줄

나같이 개념적이며, 체계적이며, 수학소를 사랑하는 철학자는 > 개념적이고, 체계적이며, 수학소를 사랑하는 나 같은 철학자는

 

9번째 줄

이래 사유에서 > … 이래 사유에

 

14번째 줄

신랄한 말로 스스로 일깨울 > … 신랄한 말로 자기를 일깨울

 

p62, 6번째 줄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 키르케고르에 따를 때,

 

p63, 아래에서 5번째 줄

이는 반철학자가 '심오한' 민주주의자인 이유이다. > 이런 이유로 반철학자는 '전적인' 민주주의자인 이유이다. 

 

p64, 두 번째 줄

체념과 우월적인 수동성을 > … 체념과 비할 데 없는 수동성을

 

p77, 10번째 줄, 11번째 줄

바로 거기에 스토아 철학과 관련한 체념적인 틀 또는 혁명과 관련한 투사적인 틀을 막론하고 행복의 철학을 > … 바로 거기에, 스토아 철학과 관련한 체념적인 틀이나 또는 혁명과 관련한 투사적인 틀을 막론하고, 행복의 철학을

 

p78, 9번째 줄

다양한 의미론적 층위와 관련해 사안을 살펴야 한다. > … 다양한 의미론적 층위와 관련한 사안을 살펴야 한다.

 

p82

두 번째 줄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체계적 위기의 > …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가 체계적 위기의

 

12번째 줄

모든 자들에게 전에 없던 > … 모든 자들에게는 전에 없던

 

p83, 네 번째, 다섯 번째 줄

그들의 실존을 강렬하게 변모시켰으며 한편으로 당연히 고뇌하게 했던 > … 그들의 실존을 강렬하게 변모시켰으나 한편으로 당연히 고뇌하게 했던

 

p85, 아래에서 6번째 줄

두 집단 사이 사유와 > … 두 집단 사이에서 사유와

 

p86, 5번째 줄

'역주 32' > 세 번째 줄 '… 요구하자!' 뒤로

 

p92

세 번째 줄

바로 여기 이 책 전체가 > 바로 여기에 이 책 전체가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사실을 경험할 때 무언가가 세계 속에서 변화하는 중이라는 것을 > 사실을 경험할 때 세계 속에서 무언가가 변화하는 중이라는 것을

 

p94

첫 줄

추상적 관념이 아니다. > …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6번째 줄

은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 … 은밀하게 부정하는 그런 것이다.

 

p98, 아래에서 세 번째 줄

단순하게 > 간단히

 

p100, 두 번째, 세 번째 줄

따라서 토대 없음에서 정지하는 다수성이다. > … 따라서 토대 지어지지 않은 존재에 달린 다수성이다.

 

p101

3~6번째 줄

논리는 존재하는 것의 구성이 아니라, 세계에 국지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 중요하다. > 존재하는 것의 구성이 아니라, 세계에 국지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이상, 논리는 중요하다.

 

6번째 줄

(헤겔에 근접하는 > (헤겔에 가까운

 

p103, 5번째 줄

존재의 지점에서 > 존재의 관점에서

 

p106, 6번째 줄

진리가 몸이라고 > 진리가 몸(corps)이라고

 

p108, 두 번째 줄

양립 가능하게 만들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 양립 가능하게 하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p113, 첫 번째 줄

완전한 삶의 이념이 있다는 말인가? > 완전한 삶의 이념은 있는가?

 

p118, 6번째 줄

철학은 그저 보충적인 아카데미 분과학이 될 뿐이다. > 철학은 그저 아카데미의 보충적인 분과학이 될 뿐이다.

 

p120, 8번째 줄

양립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 … 양립 가능성을 말한다는 점이다.

 

p123, 9번째 줄

"저마다 자기 진리가 있다." 피란델로(Luigi Pirandello)는 말했다. > "저마다 자기 진리가 있다."라고 피란델로

 

p125, 11번째 줄

무모순율의 한계에 관한 숙고 전반이 더해질 > … 무모순율의 한계에 관한 전반적인 숙고가 더해질

 

p133, 아래에서 3번째 줄

나는 통합이라 명명했다. > 나는 통합(incorporation)이라 명명했다.

 

p135, 아래에서 6번째 줄

수축된 > 응축된

 

p141, 6번째 줄

그것은 어쩌면 라캉이 내밀하면서도(intime) 동시에 내밀한 것에 외부적(extérieur)이라는 의미에서 "외밀한(extime)"이라는 단어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그것은 어쩌면 라캉이 "외밀한(extime)"이라는 단어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밀하면서도(intime) 동시에 외부적(extérieur)이라는 의미로 말이다.

 

p143, 10번째 줄

하지만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생각은 혼자 선 것이 아니다. > 단 우리들의 생각은 동일하지 않다.

 

p146, 9번째 줄

이것은 삶에 겪을 가치가 있다는 점을 > 이것은 삶에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점을

 

p148, 세 번째 줄

그러나 하나의 주어진 순간에 > 그러나 어떤 주어진 순간에

 

p176, 아래에서 세 번째 줄

나는 규율이라는 단어를 도발적으로 사용합니다. > 나는 도발적으로 규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p183,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정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답을 다시 살피자면 > … 정동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이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은데, 이 대답을 다시 살피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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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의 행복 강의

 

선생님의 삶에 방향을 준 가장 결정적인 마주침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알랭 바디우: 연극과 철학 이전에, 그것은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어떤 것이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실제로, 어린 시절의 영화 같은 기억(souvenir écran)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이어지는 내 실존에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여섯 살이었죠. 내 아버지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셨는데 – 그분은 해방 때 툴루즈 시장에 임명되셨죠 – 벽에다가 군사작전과 특히 러시아군 전선의 이동을 보여주는 커다란 지도를 붙여놓으셨습니다. 이 전선은 지도 위에 압정으로 고정된 가는 끈으로 표시되었습니다. 나는 자주 압정과 끈이 옮겨지는 걸 보곤 했는데 많이 물어보지는 않았죠. 은밀한 활동을 하는 분이었던 내 아버지는 정치 상황과 전쟁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해 애들 앞에서는 정확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죠. 1944년 봄이었습니다. 하루는, 그러니까 그게 크림반도 지역에 소비에트의 공세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끈을 왼편으로 옮겨놓는 걸 봤습니다. 분명하게 독일이 서쪽으로 물러났다는 의미로 말이지요. 그저 그들의 정복적 전진이 멈췄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은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된 거지요. 불현듯 이해가 되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확실히 전쟁을 이기게 되는 건가요?>> 그 한 순간에, 아버지의 대답은 매우 분명했지요. <<그럼, 알랭! 그걸 바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이 말이 선생님의 격률이 된 건가요?

 

이 대답은 진정한 아버지의 각인(inscription)이었습니다. 나는 정세가 어떻든 우리가 바라고 결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확신을 물려받았습니다. 이후로, 나는 거의 언제나 지배적인 의견들에 반항했습니다. 그런 의견들이 거의 언제나 보수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결코 어떤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확신이 더 이상 유행에 뒤진다는 이유 같은 걸로는 말입니다.

 

선생님은 의지를 중요시하십니다. 그런데 한 중요한 철학전통은, 그러니까 스토아주의는 사람들에게 행복해지려면 일어나는 것을 바라라고 조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편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것보다 지혜로운 게 아닐까요?

 

1940년에, 우리 운명은 전쟁에 패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스토아철학자는 모두가 페텡주의자(pétainistes)가 되는 편이 온당하다고 말했을까요? 페탱(Pétain)은 지방 방문으로 환호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나라가 전쟁의 가장 혹독한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요. 이걸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는 스토아철학을 믿지 않습니다. 황금 욕조 바닥에 앉아서 운명의 수용을 설교하는 지극히 부유한 세네카의 스토아철학적 가르침을 말입니다.

또한 엄격한 유물론자들인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법칙에 맞서 일어서서 무익하게 삶을 위태롭게 하는[혹은 목숨을 거는, ristquer sa vie] 일이 부조리하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이런 교설에 이어지는 귀결은 무엇일까요? 지나가는 날을 즐기라는 것, 호라티우스의 유명한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직역하면, 오늘을 잡아라])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거기에 탁월한 것은 없지요. 이러한 고대의 지혜에는 타고난 이기주의의 요소가 있습니다. 주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내에서 고요한 장소를 찾아서, 이 세계가 타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기주의적 윤리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지혜의 가르침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만연했는데, 그 시절의 역사적 상황은 우리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경제나 정치 체계가 요구하는 가능성에 완전히 반하는 방향을 정하고 실천할 가능성의 여지가 거의 주지 않는 그런 세계적 헤게모니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류의 상황은 도처에서 가능한 가장 좋은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이 체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관념을 조장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주의적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의 변화에 관한 모든 관점을 포기하자.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파스칼 브뤼크너가 이 완고한 보수주의에 부여하는 형태로, <<서구적 생활양식은 협상할 수 없다>>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거기에 녹아들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격률에 대한 내 충실성입니다.

 

전쟁 이후에, 연극과 마주치게 해준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지요. 이 마주침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연극이 어떻게 삶의 안내자가 되었는지요?

 

내가 학생이었을 때, 누구나 중학교에 오는 즉시 라신(Racine), 코르네이유(Corneille) 그리고 몰리에르(Molière)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좋던 싫던 간에, 우리는 그 작품들을 상세하게 공부해야 해서, 1학년[우리의 고등학교 2학년 과정]까지, 매년 그것들 중 하나를 상연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프로그램 보다는 사람을 훨씬 쉽게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게 닥쳐온 겁니다. 4학년[중학교 3학년 과정] , 나는 연극을 누구나 참여하는 경이로운 것으로 만들었던 프랑스어 선생님을 만났지요. 희곡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걸 즐기는 게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분은 각각의 지원자가 한 자리씩 맡을 수 있는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저와 다른 급우들은 점차 배우가 되어갔지요. 그런 만남이란! 그건 우리 중학교 학생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종의 중단이었습니다. 우리는 관객을 대하며 오직 그때 일어나는 것에만 책임을 지며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또한, 내 아버지가 말씀하셨듯이, 그것을 바라야 했던 것입니다! 스카팽의 간계(Fourberies de Scapin)라는 작품의 주제역(rôle-titre)을 맡았는데, 이것 때문에 속임수나 임기응변을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무대조명에 뛰어드는 순간에 떨리던 감정을 기억합니다. 무대에 뛰어오르며, 보이지 않는 객석 뒤편을 향해 <<옥타브 님, 거기서 무슨 소란입니까?>>라는 대사를 던져야 했습니다. 그렇지요. 연극을 하려면, 불안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 홀로 완전한 빛 안에 서는 거기 있음의 극도로 어려움을 바라고 넘어서야 하는데, 그 불안은 위험에 맞서 저항하는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주체적 보수주의, 그러니까 자기와 흘러가는 대로의 세계에 대한 보존으로 기우는 인간적 성향이 있을까요?

 

그렇지요. 인간의 정신에는 깊이 보수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삶 그 자체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결국, 스피노자가 쓰는 그대로,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내 아버지가 의지로 충분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을 때, 아버지는 때로 자기 안에 있는 이런 보수적인 성향을 눌러야 한다는 걸 암시하셨던 겁니다.

연극, 그것은 또한 몸이 어떤 허구에 복무하는 이런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때 무언가가 순전한 생존본능과 대립하게 됩니다. 배우의 연기에는 자기의 완전한 노출이라는 위험을 수용하는 기적적인 결정이 있습니다. 4학년 때 내 선생님 덕분에, 나는 이 모든 것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은 내 첫 번째 부름(vocation)이었지요. 그리고 나는 언제나 연극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연극에서 바로 결정으로서의 마주침을 마주한 셈이로군요.

 

무엇보다 나는 실제로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내 프랑스어 선생님을 말입니다. 그분은 연극의 마주침의 살아있는 매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향연Le Banquet에서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철학 자체가 언제나 누군가와의 마주침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에 관한 알키비아데스의 멋진 이야기의 의미입니다. 의지, 결정, 타자에 대한 자기노출과 관계라는 문제들이 상정되는 누군가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당신을 멋지면서도 위태로운 삶의 상황에 놓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다른 마주침은 철학과 장폴 사르트르의 강의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철학을 삶의 방향으로 선택하셨던 건가요?

 

내가 사르트르라는 매개를 통해 마주쳤던 철학 또한 아버지의 격률을 연장합니다. 나는 본질적인 한 논점에서 사르트르에 충실하게 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상황을 논거로 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중심적인 논점이지요. 상황은 결코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멈추는 것이 옳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어떤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자유로운 의식이며, 그런 이상 우리는 어떠한 정황에서도 자기 고유한 책임을 치워버릴 수 없습니다. 상황이 우리의 의지가 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듯 해도, 우리는 그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를 바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르트르의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철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데 소용이 될 수 있을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던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발견할 때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마주침에서, 당신은 자신의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이기주의를 손상시킬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실존이 완전하게 다른 한 사람에 의지함을 받아들일 겁니다. 그것을 경험하기 전에 당신은 그걸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별안간 자기 고유의 실존이 타자에 대한 의존에 놓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습관적으로 취하는 조심스러움은 당신의 실존 안에 자리한 이 타자에 의해 손상됩니다. 이어서, 우리는 이 행복으로부터 귀결들을 끌어내거나, 이 시원적인 새로움의 영향 아래 살아가기 위해, 이 행복을 절정에서 유지하도록 노력하거나, 또는 그것을 되찾고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행복이 때로 만족에 반하는 방향으로 작용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 행복과 만족을 대립시키시는지요?

 

먼저, 행복은 근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하며(égalitaire) 타자의 문제를 통합하지만, 만족은 생존의 이기주의와 연결되며 평등을 무시합니다. 또 만족은 마주침이나 결정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만족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 내에서 좋은 장소를 발견하거나, 좋은 직업을 가지거나, 멋진 자동차를 사거나, 외국으로의 멋진 바캉스를 떠날 때입니다. 만족이란 것은 우리가 획득을 위해 싸웠던 것들의 소비입니다. 결국,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 내에서 적당한 장소를 점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거기서 얻는] 혜택을 즐기기(향유하기, jouir)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족은 행복에 대해서 주체성을 제한하는 형상이며, 세계의 규범들에 따른 성공의 형상입니다.

스토아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만족하는 데 만족하라.>> 이는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는 평범한 입장이지요. 하지만, 철학자로서, 나는 내가 행복이라 부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철학은 언제나 인간이 이러한 실재적 행복의 편으로 향하게 하기를 추구해왔습니다. 만족을 희생시켜야 그러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만일 행복이 불가능한 듯 보였던 무엇에 대한 강력하면서도 창조적인 실존을 향유하는 데 있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요?

 

세계에 대한 정상적인 관계는 만족과 불만 사이의 변증법에 의해 지배됩니다. 사실상, 이것은 요구의 변증법이며, 우리는 이것을 <<세계의 종합적 전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재적 행복은 사회적 삶의 정상적인 범주가 아닙니다. 당신이 행복을 요구하는데 안된다는 대답을 듣는다면, 당신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당신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 불가능한 무엇에 대한 요구를 그만두는 겁니다. 당신은 행복을 금지 당하고, 만족에 그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보수주의의 주체적 뿌리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 자신의 욕망을 굽히지 않는 것, 혹은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기를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세계를 바꿔야만 하는 순간이 있는 겁니다. 불가능한 것의 명령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인류의 형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행복할 때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지요! 행복함의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그리고 행복이 만족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옹호함으로써. 세상의 주인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다른 무언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를 택한다면,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신에게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의 문제이지요. 그리스 인민은 <<우리는 당신들의 금융적 전횡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게 살기 원한다.>> 유럽[연합]의 기관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에 반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해야 하며, 만일 당신들이 계속 바라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슨 일이 닥칠지 각오해야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인 종속을 거부할 때, 그들은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만족과 불만의 변증법에 머물기를 요구하는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것과 다른 무언가가 가능하다고 결정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 밝힙니다. 우리가 유토피아의 영역에 있지 않은 이상, 완벽하게 보수적인 여러 경제학자들은 그리스의 부채가 재구성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건 두 말 없이 부채의 삭제로 귀착되지요. 실제로, 유럽의 지도자들이 불가능하다고 고려하는 것은 인민이 이 사안에 관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인 경제 제재가 아니라 정치적 처벌입니다. 그것은 행복의 욕망에 대한 징벌입니다. 만족시킬 수 없는 만족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살아있지 않지만 살기를 희망하며, 언제고 행복해지고자 할 때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파스칼은 서술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절박해야만 할까요?

 

이것은 침울한 문구입니다! 하지만 파스칼이 그렇게 쓴 것은 바로 그가 다른 세상에서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행복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행복을 약속하는데, 그들은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증거로 독자를 열광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자에서 초월적인 행복을 꺼내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꿈꿔왔으나 결코 접근하지 못한 행복에 관한 이런 테제에 완전히 반대합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행복은 절대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만족의 형태로는 아니지요. 행복은 마주침과 결정에서 감당하는 위험이라는 조건 아래 가능하며, 이 마주침과 결정은 요컨대 어느 순간에 모든 인간의 삶에 제시됩니다.

 

하지만 병, 사고, 참사, 파열 그리고 갈등을 일으키는 분열 같은 불행은 어떨까요?

 

행복과 만족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불행이라는 말의 분리를 초래합니다. 깊은 불만으로 그칠 뿐일 불행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구렁에 빠져드는 상황에서도, 행복의 길이 완전히 막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가능성의 영역과 중요성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 세 걸음을 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마비에서 재활 중인 사람에게 그것은 엄청난 행복이지요.

그러므로 결코 행복이 없어졌다고 선언해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정해진 상황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변경하는 데 있으니까요. 행복은 추상적이고도 일반적인 불가능성들이 부과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뭔가요?

 

우리는 심각한 불만과 불가능한 것의 극단적인 연장이라는 상태를 불행의 일차적인 정의로 제시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또한 행복의 좌절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도입하는 충실성의 규범 – 언제나 마주침에 연결되며, 따라서 행복에 연결되는 – 은 이러한 행복추구의 영속성을 명령으로 제시합니다. 충실성은 유일한 윤리적 명령이지만, 이 명령은 무모한 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의 파국(catastrophes)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파국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쳐버리거나 포기함으로써 발생하며, 다른 경우에는 불충실이나 배신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내 철학에서, (mal)은 주체적으로 행복의 파국에 원인이 되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것을 재앙(désastre)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행복의 경험이 강렬할수록 끔찍해지는 경험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재앙을 아주 좋아하는데, 만족에 그치라고 요구하기 위한 중요한 논변을 거기에서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박탈된 존재(désêtre)"보다는 재앙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렇지요! 재앙의 위험을 무릅쓰지만 그래서 또한 실재적 행복의 위험도 감당하는 편이 처음부터 단번에 금지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내가 "박탈된 존재"라 부르는 것은 인간 주체를 그의 동물적 생존으로, 오로지 그의 만족으로, 그의 사회적 장소로 되돌리는 그러한 인간 주체의 보수적 성향입니다. "박탈된 존재"는 진정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체가 경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우정이란 관계는 이러한 즉각적인 욕구의 만족의 지배에 의해 변질되는 걸까요?

 

오늘날의 세계는 근본적인 이타성(異他性)과 교환의 모델을 가지는데, 그것은 상업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모든 관계를 잘 이해된 상호적 이익들로 이루어진 계약적 차원으로 환원하게 되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분리가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매우 빠르게 무언가의 낙후성에 대한 때 이른 느낌을 받습니다. 상품들의 낙후성에 비추어서 말입니다. 오늘날의 보수주의는 상품의 문제에 의해 침식되며, 이 문제는 당신이 언제나 새로운 모델을 사야 한다고, 그래서 이러한 상품의 낙후성을 상정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소비자는 지배적인 대상적 형상이며, 곧 세계를 움직이는 형상입니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걱정스럽게 사람들의 상품구매 수준을 추적합니다. 만일 갑자기 아무도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체계가 볼링 핀처럼 다 무너질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갑작스럽게 출현하거나, 새롭거나, 근본적으로 쓸모 없거나, 또는 범죄적으로 비열한 물건들을 구매해야 할 필요에 얽매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런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들의 유적인 형상을, 지금 공식적으로 경쟁을 중시하는 관계들로 오염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충실성을 찬양하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상품에 대한 집착 – 흔히 유행으로 가장된 – 이 행복을 훼손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충실성이라는 가치는 모든 형태로 위협받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자동차에 무한정하게 충실할 권리가 없으며, 다른 자동차를 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 체계가 위협받게 되니까요!

이 명령은 집합적이거나 또는 개인적인 우주에 스며들어, 많은 분리를 만들어냅니다. 이 논리에 대해, 우리는 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격률을 맞세워야 합니다. <<너는 네가 원했던 것을, 네가 바랐던 것을, 네가 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을 계속 바랄 수 있다. 너는 그럴 수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

 

http://www.lemonde.fr/idees/article/2015/08/14/commentvivre-sa-vie_4724566_3232.html#4gFtxbPkQMr41HMC.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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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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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오류 수정
- 번역어를 위주로 오류를 잡았지만, 번역상의 오류나 어색한 표현 역시 고쳤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오류가 있기는 해도, 이책은 여전히 바디우의 생각을 일부나마 전달합니다. 앞으로 더 나은 출판사와 편집자를 만나 다시 출판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책 제목, <사도 바울: 제국에 맞선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 <성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Saint Paul: la fondation de l'universalisme>

12페이지 10번째 줄
나는 아주 늦게 마치 경이로운 시를 담고 있는 오묘한 텍스트들과 만나듯 그의 서한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 나는 마치 신기한(curieux) 텍스트들을 대하듯 경이로운 시를 담고 있는 그 편지들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13페이지
첫 줄, 사상가=시인 –> 사상가-시인,
4번째 줄, 사유=실천 –> 사유-실천
7번째 줄, 독특성 –> 단독성(singularité)

15페이지
제목, 바울, 우리의 동시대인 –> 바울의 동시대성(contemranéité de Paul)
6번째 줄, 다중적 –> 다수적(multiple)

17페이지
3번째 줄, 촉성 –> 강제(forçage)
아래에서 3번째 줄, … 선언하고 있는 사태 외엔 … –> … 선언하고 있다는 점 외엔 …

18페이지
2번째 문단, 3번째 줄, 보편성의 산출 조건들 –> 보편성의 유적類的 조건들(conditions génériques de l'univiersalité)
같은 줄, 포섭된 –> 붙들린

19페이지
9번째 줄, '서양적' 체계로 격하시키려고 하고 있는데 –> '서양적' 전체(집합, ensemble)에 할당하려 하는데
13번째 줄, 훨씬 더 좋기로는 –> 한층 더 나아가

25페이지
아래에서, 3~6번째 줄, 개별성 –> 단독성

26페이지
12번째 줄, 아동을 성추행한 가톨릭 신부들 –> 가톨릭 아동학자들(les catholiques pédologistes)
아래에서, 2번째 줄, 창조 –> 돌발(surrection)

27페이지
3번째 문단,
첫 줄, … 진리 과정이 정체성을 지향하는 것들 안에 닻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 진리 과정은 정체성을 지향하는 것들 안에 닻을 내릴 수 없다.
3~6번째 줄, 개별성 –> 단독성

29페이지
2번째 줄, 공정 –> 절차
13번째 줄, 산출적 –> 유적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인간=동물 –> 인간-동물

30페이지
11번째 줄, 종적 –> 유적

31페이지
두 번째 문단, 3번째 줄, 보편적 개별성 –> 보편적 단독성

32페이지
첫 문단 마지막 줄, 개별성 –> 단독성
두 번째 문단 4번째 줄, 개별적 –> 단독적
마지막 줄, 모든 공동체적 부분 집합에 대해 진리는 그것의 대척점에 존재한다. –> … 부분 집합에 대해 진리는 대각적이다(diagonale).
* 대각적이라는 말은 '빗금을 긋는다(제거한다)' 또는 '가로지른다(횡단한다)'의 의미.

33페이지
첫 문단,
진리는 모두에게 제공되고 말 건네진다. 어떤 귀속 조건도 이러한 제공과 말 건넴을 제한할 수 없다.
–> 진리는 모두에게 제공되어 각자를 향한다. 어떤 귀속 귀속조건도 이러한 제공과 도착을 제한할 수 없다.

34페이지
14번째 줄, 정황적 상태 –> 상황의 상태(l'état de la situation)
18번째 줄, 필연적 –> 필수적인
20번째 줄, 공정 –> 절차

37페이지
첫 줄, 성자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로 독실한 체하는 문체로 시작해보기로 하자. –> 보통의 전기에서 볼 수 있는 온건한 문체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아래에서 4번째 줄, … 장인이자 장인=상인이었다. –> … 장인이자 상인이었다.

38페이지
세 번째 문단, 두 번째 줄 원리 –> 교의(doctrine)

39페이지
5번째 줄, 위치 –> 입장(position)

40페이지
두 번째 줄, 그리스의 우화의 수사학 –> 그리스 소설의 수사학(la rhétorique des romans grecs)

43페이지, 6번째 줄, 실리시아 –> 킬리키아(혹은 길리기아)

48페이지, 첫 줄, 개별성 –> 단독성

49페이지
첫 줄, 사건적 거점 –> 사건의 장소(le site évènementiel)
아래에서 5번째 줄, 전통적 거점 –> 전통적 장소

50페이지
아래에서, 8번째 줄, 그것이 더 나쁘다 –> 더 나쁜 것으로(ce qui est pire*)
* 이 문구에서는 베케트의 산문 제목, '더 나쁜 쪽으로Worstward Ho'가 연상됨.

54페이지
아래에서, 3번째 줄, 거점 –> 장소

59페이지, 두 번째 문단, 6번째 줄, 당대적이고 –> 동시대적이고

63페이지
마지막 줄, …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영원히 어떤 신념이 가능하냐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확신이 여기에서 가능하며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이다.
주석, 장로 –> 교부 (* 클레멘스는 로마 교회의 교부)

65페이지, 두 번째 줄, … 집단들에게 보내기 위해 지도자로서 … –> … 집단들의 지도자로서 …

66페이지
두 번째 문단,
수수께끼는 주로 어떻게 이러한 상황적 텍스트들이 우리에게 전해져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그것들을 <신약성서>라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저작집 속에 엄숙하게 그리고 미심쩍은 방식으로 포함시켰는가이다.
–> 수수께끼는 오히려 어떻게 이러한 정황적 텍스트들이 우리에게 전해져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신약성서>라는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저작집 속에 이 텍스트들의 엄숙하지만 의심스러운 포함을 지시했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 문단,
두 번째 줄, 소장하고 –> 가지고
5번째 줄,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는 –> 저자가 의심스러운(apocryphe)

67페이지
첫 줄, 언급 –> 논평(remarques)
3번째 줄, 정전적이고 다차원적인 세속적 위상 –> 여러 세기에 걸친 정경적 순서(l'ordre carnoique multisequlare)
4번째 줄, 자발적 –> 임의적
15번째 줄, <데살로니가전서>의 첫 번째 서한이 –> <데살로니가전서(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가
16번째 줄, 가장 개연성이 높은 시점 –> 그럴법한 개연성이 있는

68페이지
8번째 줄, 완벽하게 –> 전반적으로(globalement)
9번째 줄, 그것을 –> 그의 행동방식을
11번째 줄, 그러한 장르의 관습들 –> 그러한 종류의 관습들
13번째 줄, 미확정성 –> 결정 불가능성(indécidabilité)
아래에서 3번째 줄, 스승 –> 주님(maître)

69페이지
4~10번째 줄
나머지,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런 현실적 중요성도 없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보기로 하자. 나머지(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는 확신 속에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확신을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변조까지 하는 것이다. 오직 응축된 스타일만이, 예언적이고 마법적인 문헌들의 매너리즘을 말끔히 벗어버린 스타일만이 그러한 환원에 어울릴 수 있다.
–> 나머지는, 곧 나머지 모든 것들은 어떠한 실재적 중요성도 없다. 말하자면, 나머지(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은 확신의 실재가 아니라, 그 확신을 방해하고 심지어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한 환원에 어울리는 것은 오로지 응축적이며, 예언이나 기적과 관련한(prophétique et thaumaturge) 문헌의 변덕(tics)이 제거된 문체 밖에 없을 것이다.

72페이지, 두 번째 문단 첫 줄, 마르키온의 논설은 <대조표>로 … –> … <반명제들Antithéses> …

74페이지, 첫 줄, 이레나이우스 –> 이레니우스

75페이지, 세 번째 문단, 첫 줄, 코뮌주의 –> 공산주의

76페이지, 아래에서 두 번째 문단,
만일 우리가 바울을 그의 모든 발언들과 함께 우리 시대로 이식시킨다면 우리는 그의 발언들이 범죄적이고 타락했지만 로마 제국보다 무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능수능란하고 완강한 실제 사회와 맞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 우리는 그의 발언들을 범죄적이고 타락했지만 로마 사회보다 무한하게 유연하면서도 내구력을 갖춘 실제 사회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77페이지, 네 번째 문단, 첫 줄, 프랑스인으로 대독협력분자로–> 프랑스인이지만 독일에 협력하는 자로서

88페이지
4번째 줄, 다중을 –> 다수(multiple)를
8번째 줄, 환유적인 대표들로 –> 환유적 재현으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 표상하는 –> 재현하는

82페이지,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 분석적 담론 –> 분석가 담론

87페이지
5~7번째 줄, 담론들을 굴절시켜 하나로 종합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바울의 끊임없는 관심사였다. –> 담론들의 대각선을 종합에 대치시키는 것은 … .
12번째 줄, … 동일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 –> … 동일한 거리에 있는 … (또는 … 동일한 거리를 두는 …)

88페이지
6번째 줄, 7번째 줄, 배려된 –> 존경 받는(considéré), 배려 –> 존경(considération)
12~14번째 줄,
의미의 수호자로서의 '기억', 그리고 정치의 대리물로서의 역사의식의 중요성이 역설되고 있는 지금, 바울의 입장이 가진 힘을 놓쳐서는 안 된다.
–> 도처에서 의미의 수호자로서의 '기억'이, 그리고 정치의 대리물로서의 역사의식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지금, 바울의 입장이 가진 힘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16번째 줄, 사실 –> 참(혹은 진실)
16~18번째 줄, 그렇다고 하여 내가 …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 나는 … 의심하지 않는다.

89페이지, 5번째 줄, 정황의 현재적 가능성들과 –> 상황(situation)의 현실적 가능성들과

91페이지, 7~10번째 줄,
사도의 주체적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담론의 특징들이 앎[지식]의 미덕들이 사건에 의해 사라지는 표징을 통해 반복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사도의 주체적 형상을 연역해내는 그리스도교 담론의 특징들이 앎[지식]의 미덕들의 사건적인 사라짐이라는 표징 아래 요약되는 텍스트를, 우리는 … 찾아볼 수 있다.

95페이지, 9번째 줄, 브롱슈빅 –> 브룅슈빅

98페이지
5번째 줄, 전통적 –> 고전적(classique)
7번째 줄, 육체의 주체적 길 –> 육(chair)에 따른 주체의 길 (* 여기에서 '육肉chair'은 '육체corps'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
아래에서 7번째 줄, …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에서… –> … 있다는 점에서 …
아래에서 3~2번째 줄, … 변증적 추론뿐만 아니라 신앙에 대한 개연적 내기론도 … –> 변증적 추론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앙과 관련한] 개연적 도박의 논증도 …

100페이지, 3번째 줄, 증명 –> 증거

101페이지, 5번째 줄,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는 가늠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계산 불가능하다.

103페이지
첫 줄, 전통적 –> 고전적
6번째 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들' –> '말할 수 없는 말들(dires indicidables)'

105페이지, 마지막 줄, 개별성 –> 단독성

106페이지, 6번째 줄, 전통적 –> 고전적

109페이지, 마지막에서 5번째 줄, 육체 –> 육

110페이지, 6번째 줄, 10번째 줄, 마지막에서 5번째 줄, 육체 –> 육

113페이지
8번째 줄, 차별 –> 구별
15번째 줄, 육체 –> 육

114페이지
두 번째 문단
보편주의, 따라서 모든 진리의 실존은 대면할 것이라곤 오로지 사라진 사건뿐이라는 시련에 의해 기존의 차이들의 폐기와 그 자체가 분열된 주체의 도입을 요청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 보편주의는, 따라서 모든 진리의 실존은 기존의 차이들의 폐기를, 그리고 대면할 것이라곤 오로지 사라진 사건뿐이라는 시련에 의해 그 자체로 분열된 주체의 교훈을 요청한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7번째 줄, 형상화하는 –> 윤곽 짓는(configurant)
8번째 줄, 견고함 –> 일관성(consistance)
9번째 줄, 바울은 그러한 길을 따라가려고 시도한다. –> … 그러한 길에 착수하려 한다.

115페이지, 3번째 줄 현실[실재] –> 실재

116페이지
6번째 줄, (누락된 문장) … 차지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 –> … 차지할 수 있다. 사건을 선언하는 것은 그 사건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
12번째 줄, … 신은 본인을 … –> 신은 스스로를(또는 자신을) …

117페이지
9번째 줄, … 혈연관계로 만든다. –> 자식들로 만든다(filialise).
아래에서 4번째 줄, 공정 –> 절차

120페이지, 12번째 줄, 너머-존재의 원리 –> 초실존의 원리(principe de sur-existence)

123페이지, 5번째 줄, 그리스도는 지배자[스승]가 아니며, 제자들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 그리스도는 스승[선생]이 아니며, 그에게는 제자들이 있을 수 없다.

124페이지, 첫 줄, 사건은 이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잉여물이며, –> 사건은 이 모든 것들의 정해진 수를 초과하는 무엇이며, (* 여기에서는 surnombre의 의미를 살려서 고침.)

125페이지
아래에서 5번째 줄, 절대자의 갈보리 언덕 –> 절대자의 수난(un calvaire de l'Absolu) (* calvaire에는 고난, 수난 등의 의미가 있음.)
마지막 줄, 지적하고 –> 인정하고(avouer)

128페이지
4번째 줄, 잉여적 증여이자 측정할 수 없는 은총 –> 정원 외적인(*또는 정해진 수를 넘어서는) 증여이자 계산할 수 없는 은총
13번째 줄, 반변증적 –> 반변증법적
14번째 줄, … 내재적 힘의 불가피한 행사가 결코 아니라고 … –> … 내재적 힘에 의해 강제된 작용이 결코 아니라고 …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 인간의 동물적인[절대적인] –> 인간 동물의

129페이지
첫 줄, 참됨 –> 참(또는 진리)
2~3번째 줄, 그것은 은총과 만남이라는 어휘를 종교 안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떼어낼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 그것은 우리가 은총과 마주침이라는 어휘를 종교적 감금에서 떼어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4~6번째 줄, 유물론은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대문에 철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 되었다.
–> 유물론이 대상적인 것에 의한 주체적인 것의 결정이라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이야기는 철학적으로 실격된다.

130페이지
5~7번째 줄,
그러나 사건 그리고 그러한 사건을 따르기로 결정한 주체가 단언하는 희망은 그러한 고통[고난]의 유일한 실재로서 위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어준다.
–> 그러나 사건과 그러한 사건에 매인 주체가 확신하는 희망은 그러한 고난의 유일한 실재로서의 위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누어준다.
11번째 줄,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사유와 –> …에 매인 사유와
12번째 줄, 고통[고난] –> 고난
같은 줄, 동일한 기준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공약 불가능하다.

131페이지, 7번째 줄,
호승심을 섞어 간절히 호소하는 방식의 전술의 일환으로, –> 변론과 경쟁의 전술을 취하는,

132페이지,
두 번째 줄, 사건 이후적인 담지 –> 후사건적 효력; 같은 줄, 기준의 파괴 –> 기준의 폐기
4번째 줄, 공식 –> 정식
7번째 줄, 골고다의 십자가 –> 골고다의 고난; 같은 줄, 골고다의 언덕으로의 오름은 없다 –>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비탈길은 없다
12, 13번째 줄, 육체 –> 육, 형상화 –> 윤곽
마지막에서 5번째 줄, '삶과 마찬가지로' 제거; 세 번째 줄, … 아무런 관련도 없다. –> … 관련도 없으며, 삶 역시 그렇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줄, 총괄적 –> 유적

133페이지
첫 줄, 즉 분열된 주체가 전체로 부활하는 것임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즉 전적으로 분열된 주체의 부활이라는 것은
세 번째 줄, 육체 –> 육

134페이지
5번째 줄, 한 사람, 한 사유, 한 실존 –> 하나의 인간, 하나의 사유, 하나의 실존
6번째 줄, 차원 –> 층위
7번째 줄, 개별적인 –> 단독적인
11~14번째 줄, 다시 말해 죽음의 인간적 발명에 의해 본인 또한 포획된 그리스도는 자신이 삶을 발명하는 곳도 바로 그러한 지점(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자체로부터임을 드러내기 위해 죽는 것이다.
–>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자신도 죽음의 인간적 발명에 사로잡히게 되는, 바로 그 지점(인류에게 [발명의] 능력이 주어지는)에서 생명을 발명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16번째 줄, 인간의 유적 성격 –> 인간의 인간성(l'humanité de l'homme)
17번째 줄, 육체 –> 육, 객체 –> 대상
아래에서 두 번째 줄, 죽음은 신 자체와 동등해지기 위한 수단이다. –> 그것[그리스도의 죽음]은 신 자신과의 평등을 위한 수단이다.
같은 줄, 육체 –> 육
마지막 줄, 신 자체와 –> 신 자신과

135페이지, 세 번째 줄, 영을 내재화하는 장치 –> 영의 내재화를 위한 구성물(montage)

136페이지, 5, 6, 11, 15번째 줄, 사건의 거점 –> 사건의 거점, 거점 –> 장소

140페이지, 마지막 줄, 세계적 행보 –> 행성적 방황(érrance planétaire)

141페이지, 세 번째 문단, 1~4번째 줄,
… 두 사람이 반철학을 형이상학자와 현자의 변덕과 왜소함에 대한 '비판'과 – 아무리 근본적인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 더 이상 관계하지 않는 지점까지 끌고 나갔기 때문이다.
–> … '비판'을, 아무리 급진적이더라도, 더 이상 관건이 되지 않을 지점까지 끌고 …

142페이지, 마지막에서 5번째 줄, 거점 –> 장소

143페이지, 마지막 줄, 거점 –> 장소

144페이지
5번째 줄, 바울의 사유는 부활 속으로 육화를 파기한다. –> 바울의 사유는 육화를 부활 속으로 용해시킨다.
8번째 줄, 폐지시키고 –> 지양止揚하고(relève)

145페이지
7번째 줄, 육체 –> 육
마지막 줄, 사건적 주어짐 –> 사건의 주어짐

146페이지, 8번째 줄, 무상성 –> 값없음 (* 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147페이지, 6번째 줄, '예외가 없음' –> '예외 없음'

148페이지
첫 줄, 개별자 –> 단독성
6, 7번째 줄, 사태적 –> 상태적(étatique)

149페이지
8번째 줄, 보답과 관련되는 –> 보수와 관련되는(salairiale)
9번째 줄, 코뮌주의적인 것으로 부를 수 있게 –> 공산주의적인 것으로 선언할 수 있게
아래에서 7번째, 2번째 줄, 무상성 –> 값없음
아래에서 2번째 줄, 말 건넴 –> 전달

150페이지
11번째, 14번째 줄 무상적인 –> 값없는
12번째 줄, 말 건네질 –> 전달될
14번째 줄 말 건넴 –> 전달

151페이지
1번째, 2번째, 3번째, 마지막 줄, 다양성 –> 다수성(multiplicité), 다자 –> 다수(multiple)
6번째 줄, 무상성 –> 값없음

152페이지
첫 줄, 다양성 –> 다수성
두 번째 문단,
자기 자신을 넘쳐나면서 보편성을 지탱하고 있는 다양성. 자기 자신을 넘쳐나기 때문에 이 다양성을 총체성으로 표상하는 것은 배제된다. 그러한 넘침은 어떤 전체에도 준거할 수 없다. 넘침이 차이의 폐기 – 넘쳐나는 과정 그 자체인 – 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그 자체로 초과적이며 보편성을 지탱하는 다수성. 그 자체에 대한 초과는 이 다수성을 총체성으로 재현하는 것을 막는다. 그러한 초과는 어떤 전체에도 준거할 수 없다. 넘침이 차이의 폐기 – 곧 초과의 과정 그 자체가 되는 폐기 – 를 정당화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번째 줄, 사건이후적인 다양성 –> 후사건적 다수성
13번째 줄, 다자 –> 다수
마지막에서 네 번째 줄, 종교적 –> 고백적인

157페이지
정리 1에서,
일자는 모두에 대해 있으며, 율법이 아니라 사건으로부터 유래한다. –> 오직 모두를 위한 일자와 같은 것이 있으며(Il n'y a de l'Un que pour tous), 이는 율법이 아니라 사건으로부터 유래한다.
마지막에서 3번째 줄, 일자 –> 일자와 같은 것

158페이지
두 번째 줄, 다양성 –> 다수성
네 번째 줄, 주체와 관련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론 –> 주체와 관련한 따름정리(corolaire subjectif)
6번째 줄, 유한성의 암호 –> 유한성의 기호(숫자, chiffre)
7번째 줄, 육체 –> 육

159페이지
13번째 줄, 다양성 –> 다수성
14번째 줄, 육체 –> 육

160페이지, 5번째 줄, 자리를 잡고 –> 자리 잡고

161페이지, 마지막 줄, 공정 –> 절차

162페이지
두 번째 줄, 공정 –> 절차
6번째 줄, 암호 –> 기호(숫자, chiffre)

169페이지, 6번째 줄, 전투적 –> 투사적

171페이지
4~11번째 줄,
이런 식으로 생각된 사랑의 법은 심지어 과거의 율법의 내용을 환기함(바울은 단 한번도 정치적 동맹의 확장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으로써도 지탱될 수 있다. 사랑을 통해 그러한 내용을 돌에 새겨서는 안 된다는 단 하나의 준칙, 즉 죽음으로 다시 추락하는 고통에 관한 준칙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법은 믿음에 의한 주체화에 전적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
이렇게 생각할 때, 사랑의 법은 심지어 오래된 법[구약]의 내용을 통해서도 견고하게 다져질 수 있는데(바울은 정치적 동맹의 확장 기회를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그 내용이란 사랑에 의해 – 죽음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감수하더라도 – 돌 위에 새겨서는 안된다는 단 하나의 준칙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의 법이 믿음에 의해 전적으로 주체화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줄, 다양성 –> 다수성

172페이지
첫 줄, 다양성 –> 다수성
6번째 줄, 준칙으로 하여금 이해되기 위해서는 믿음을 요청하도록 만든다. –> 이 준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요청된다.

173페이지, 열 번째, 16번째 줄, 말 건네는 –> 전달되는

176페이지, 3번째, 마지막에서 5번째 줄, 말 건넴 –> 전달, 말 건네지는 것 –> 전달되는 것

177페이지
3번째 줄, 말 건넴 –> 전달
4번째 줄, 전투적 –> 투사적

180페이지, 두 번째 줄, 전통적인 심판적 종말론 –> 고전적인 사법적 종말론

183페이지
8번째 줄, 우연히 지금 살고 있게 된 –> 오늘날의
13번째 줄, 큰 무게를 가질 –> 매우 중요한

185페이지, 8번째 줄, 총칭적 –> 유적인

187페이지, 아래에서 3번째 줄, 개별성 –> 단독성

189페이지
5번째 줄, 진실 –> 참(또는 진리)
6번째 줄, 공정이 –> 절차가
7번째 줄, 총칭적인 하나의 다양성을 –> 하나의 유적인 다수성을

190페이지
7번째 줄, 총체성 –> 유적인 성질(또는 유적 속성)
아래에서 6번째 줄, 사건이 일어나는 거점(유대적 거점) –> 사건의 장소(유대적 장소)

193페이지, 10번째 줄, 진리 공정 –> 진리 절차

195페이지, 아래에서 10번째, 말 건넴 –> 전달, 전투적 –> 투사적

198페이지, 마지막 줄, … 모든 것을 통해 내부로부터 … –> … 모든 것의 내부로부터 …

199페이지, 마지막 줄, 유대적 거점 –> 유대적 장소

201페이지 마지막에서 6번째 줄, 204페이지 7번째 줄,
곧이어 균형 맞추기 –> 이차적 균형잡기[혹은 대칭화](la symétrisation seconde)

208페이지 아래에서 7번째 줄, 209페이지 아래에서 8번째 줄, 진리 공정 –> 진리 절차

210페이지 10번째 줄, 진리 공정 –> 진리 절차

211페이지
2번째 줄, 산출하는가를 –> 생산하는가를
5번째 줄, 산출 –> 생산

212페이지 첫 줄, 말 건네는 것 –>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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