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공연 및 예술 작품을 대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예술로부터 어떤 현실로부터 볼 수 없는 다른 것을, 어떤 숭고한 것을 보기 위해서, 또는 단순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거나 예술로부터 오는 카타르시스를 취하는데서 그 목적을 찾는다. 요즘 세태에는 아마도 후자의 경우가 더 맞을 것이다. 특히 시간을 고정시킨 '거짓 움직임'의 기록인 영화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사실 이 [another year] 또는 [세상의 모든 날들]이라는 영화는 이런 목적으로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가 전달하는 것이 어딘가 매우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영화로부터 어떤 거대 서사나 옹호해야할 법한 대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절대 그런 것들과 접점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이클 레이가 전달하는 이야기는 매우 소소한, 정말로 우리 주변에서도 있을 법한 이야기다. 한 심리 상담사(제리)와 그녀의 남편(톰), 그리고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서 잡다한 업무를 수행하는 한 조울증적 성향의 여자(메리). 이들의 존재는 마치 이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람들인 양 친근하기만 하다.
어찌 보면 이야기는 매우 단순하다. 한 불행한 여자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욕망하다가 마치 없는 소외 당하게 된다는 그런 뻔한 줄거리. 그러나 그 안에는 우리가 결코 단순하다고 무시해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념을 말이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한 어떤 해석이나 의견을 가지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오히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에 다가가는 길을 막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보면 사람들은 쉽게 영화에 대한 과도한 해석으로 흐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영화를 같이 봤던 사람들이 영화 내에서 제시되는 어떤 대립 구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하듯이 말이다.
물론 실제로 영화에는 어떤 대립 구도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제리 그리고 메리는 같은 병원에서 일한다. 그들은 꽤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냈고 가끔 아니 꽤 자주 함께 제리의 집에서 모여 저녁 식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 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너무나 친근하고 좋은 제리와 그녀의 남편 톰은 돈이 넘쳐나서 주체를 못할 그런 형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영국의 중산층이 살 법한 정원이 딸린 집에 살며, 둘 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그들의 아들(죠)은 변호사다. 그들은 행복한 삶은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제리의 직장 동료 메리의 삶은 불행하기만 하다. 제리와 함께 일한다고는 하지만 메리의 일은 일종의 비서직이다. 전문직도 아니라 보람도 덜하고 물론 보수 면에서도 못할 것이다. 그녀에게는 과거 이혼 경력이 있으며, 현재 어느 정도는 알콜 중독 증세도 있다. 메리는 그런 자신의 상황에 너무나 불행하며 제리와 톰의 가족에게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것을 갈구하는 듯 하다.
어쨌든 제리와 톰도 이 불편하기만 한 친구에 대해 상당히 참아주면서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 가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 제리와 톰이 메리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피상적인 것이다. 톰과 제리는 메리가 대면하고 있는 일종의 벽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떤 의미에서 메리의 대사는 지속적인 독백의 그것이다. 차 문제, 남자 문제, 심지어 화장실에서 화장지가 없었다는 등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문제를 가지고 메리는 이들 부부에게 공감과 인정을 요구한다.
애초에 메리는 자신을 이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일종의 자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제리와 톰이 그녀에게 인정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불편한 손님/친구의 자리다. 어쩌면 여기까지가 그들이 인정해 줄 수 있는 한계범위였을 것이다.
메리는 제리와 톰의 아들 조에게 노골적인 애정을 표출하고, 결국 제리와 톰의 가족에게 소외 당하게 된다. 물론 집에서 쫓겨난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제리와 톰은 너무나 친절하며, 그래서 여전히 그들은 차마 메리를 쫓아내지 못한다. 그들 모두가(제리와 톰 그리고 아들 조와 그의 여자친구와 메리 그리고 톰의 형 로니)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리의 모습은 여전히 포함되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려내는 그녀의 마지막 장면은 철저히 혼자인 메리다. 심지어 제리와 톰의 가족들이 말하는 소리 마저도 사라져버릴 정도로...
이런 정황에 비추어 제리와 톰 그리고 메리 사이에 어떤 대립적인 지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의 형편을 일종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구도로 몰고 가서, 그런 시각으로부터 영화를 읽어내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 제리/톰은 브루주아지를 대표하는 어떤 착취하고 누군가를 희생시켜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자들의 형상으로, 그리고 메리는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하는 일종의 희생자이며 권리를 결여/박탈 당한 사람이고, 그런 박탈된 것 혹은 결여된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가 희생 또는 소외당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그런 해석/의견의 단골 메뉴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다.
우선 제리와 톰에 대한 해석. 이런 시각으로 볼 때, 제리와 톰은 부르주아지다. 당연히 그들은 일종의 착취자이며, 이런 완전히 만들어진 틀 안에서 그들이 가진 또는 가졌던 모든 것들 - 좋은 직장, 집, 아들, 심지어 주말 농장과 과거에 호주에서 2년 동안 오지에 갇혀 살면서 힘겹게 모은 돈으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섰던 여행 마저도 - 은 이들이 착취의 형상 또는 적어도 사회-경제적 위계에서 우위를 점한 자들임을 보여주는 근거로 비춰진다.
다음으로, 메리는 그저 어떤 부정적인 의미에서만 드러날 뿐이다. 마치 허용되었던 것을 빼앗긴 사람, 어떤 희생자로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영화가 시작하는 제리의 상담실 업무 장면에서 "세상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고, 세상의 모든 불행을 다 안고 있다는 표정으로 제리의 상담실을 나갔던 그 여자와 메리는 한 인물이 될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메리는 어떤 의미에서 신성시된다. 제리와 톰을 불편하게 했던 그녀의 모든 행동거지는, 그리고 제리와 톰의 아들에게 보였던 부적절한 처신은 잊혀지고 사회적인 부조리에 의해 희생된 자의 성화된 '얼굴' 만이 떠오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리의 형상은 영화가 시작할 무렵에 등장하는 불면증 환자의 형상과 겹쳐지게 된다 - 기억해 보자면, 그녀에게 세상은 불행한 것이고, 무엇보다 세상에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치 자신이 속한 장소와 동일시 되어버린 그녀의 삶은 변화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제리와 톰은 영원히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자가 되고, 메리는 영원히 자신의 불행한 처지에 머물러야 할 '희생자'일 뿐.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메리에게서 변화의 가능성은 배제되고, 메리는 장소와 동일시 된다. 영원히 변하는 않는 장소.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시각이 겨냥하고 있는 바가 일종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떤 사회 및 경제적 모순을 읽어내고, 영화 내의 인물들을 통해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해 나갈 수 있는 여지를 찾는 것이 바로 이런 시각을 내세우는 이유다. 그러나 비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단순히 말을 이한 말을 하는 것? 단순 대립적인 형상들만을 가지고는 그런 시각이 의도하는 모종의 비판은 가능할 지 모르나 어떠한 변화의 가능성 또는 어떤 운동의 가능성도 잡아낼 수 없다. 가능한 것은 오직 일종의 성화된 형상(희생자의 형상)으로서의 메리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장소의 형상으로서의 '불면증 환자'의 형상이 겹쳐질 뿐이다. 다시 말해 희생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사회 및 경제적 차이 혹은 모순은 영속화된다. 변화를 유발해야할 비판이 오히려 고착된 두 형상의 영속화에 기여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비판을 위해서라면 어떤 측면으로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지배적인 위계의 범주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제리와 톰의 편에서도, 그렇다고 이들에 의해 소외된, 희생자화 된 메리의 편도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보기 위한 필요한 세번째 형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기이하게도 우리는 어떤 분리된 혹은 감산된 메리를 생각해야만 한다. 희생자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순수한 존재로서의 존재로 그려지는 메리를 말이다. 분명히 이 영화의 이야기는 메리의 이야기이며 영화 내에서 순수한 존재로서의 존재, 지배자나 착취자의 정체성으로부터도, 희생자나 소외된 자의 정체성으로부터도 벗어나는 형상은 메리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형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제리와 톰의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함께 웃고 떠들며 과거에 제리와 톰이 어떤 여행을 했는지에 대해, 어디로 여행을 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때 메리는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되고 있다. 가족이라는 재현의 체계에 의해 현시되지 않는 공백과 같이. 여기에서 메리는 함께 식탁에 앉아 있지만 그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한다. 존재로서의 존재의 형상이 드러나는 순간, 메리에게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가온다. 일종의 실재에 대한 인식.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 카메라는 메리의 얼굴만을 잡아내며 소리는 서서히 사라져간다.
그러나 그 순간 메리의 얼굴은 어딘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영화 내내 메리는 어딘가 불안하다. 다른 인물들과의 대화 중에도, 술집에 홀로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반대편 테이블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남자를 보면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공감과 인정을 갈구하며 끊임없이 불안한 대화/독백을 이어간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가족으로서의 인정, 자신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져 가고 있음에도,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어떤 희생자의 정체성을 벗어버리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떤 편안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내 버리고, 그 맞지 않은 옷을 벗어버린 후, 그 집을 나서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때 만이 그녀는 더 이상 장소와 동일시 되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리의 형상, 즉 희생자의 정체성을 벗어버린 메리의 형상은 영화가 시작할 때 등장하는 '불면증 환자'와는 사뭇 구분되는 형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변화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제리가 말하는 그대로 메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담치료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도 일말의 변화는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통해서 메리는 자신이 원하는 일종의 모상적 대체물을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런 치료를 통해 순치된 메리는 제리와 톰의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을,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나 원하던 장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선택지 역시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결코 변화라 할 수 없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원하던 장소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방식의 변화는 단지 그녀가 가졌던 희생자의 정체성을 일종의 가정이라는 지배 구도 내에서 지배자(제리와 톰)에 속한 신민의 정체성으로 교체할 뿐이다. 오히려 진정한 변화는 메리가 제리와 톰의 가족이 차지하고 있는 식탁에서 일어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을 때 가능하다. 그들의 집안에서 가져야만 하는 정체성에서 벗어나 그 집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때 말이다.
물론 영화는 마지막 장면의 메리를 단지 가능성의 차원에 남겨 둔다. 영화의 관객은 메리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다. 가족이라는 정상성과 지배의 범주에 포섭되었을까. 비록 그것이 정말로 자신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용인해 주던 그 애매 모호함 속에서 안식을 찾을 수는 있다(용인이라는 말 역시 지배를 나타내는 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은 반대로 그 집을 나가 자신의 삶을 찾고, 어떤 낯설지만 새로운 것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려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현행의 정치 체제에서 우리에게 허용되는 유일한 대안은 마치 제리와 톰의 따뜻한 가족의 품과 같이 이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사회에 속한(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도) 자본-의회주의의 체제의 재현의 체계속에서 현시되지 못하는 공백으로 살아가는 메리와 같은 사람들은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리와 톰의 가족과 같이(톰의 형수 린다의 장례식 장면에서) 여전히 어떤 균열과 불화의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제리와 톰의 가정은 정말로 이상적인 것인가? 그리고 그에 유비될 수 있는 대의 민주주의 체제는?
만일 이 영화의 감독 마이클 레이의 작품이 분류되고 있는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단순히 현실주의가 아닌 어떤 경험이나 객관적인 것과 분리된 실재를 말하는 실재론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이 영화가 드러내고 있는 실재는 무엇일까? 현행의 체제와 경험과 눈으로 보아 아름다운 듯 보이는 '가시계'로부터 벗어날 어떤 일말의 가능성, 즉 과거가 반복되는 미래가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도래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계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