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개구리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놀라운 글쓰기. 가장 대중적인 말하기를, 아니 거의 촌스러운 촌부들의 입을 빌려 어제의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집어내고 있는 가까운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이야기, 이것이 내가 이 <개구리>라는 제목의 훌륭한 소설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평가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 평가만으로는 부족한데, 이 소설에는 또한 어떤 시대적 정황과 관련하여 소설가 모옌이 커더우라는 편지의 발신자의 이름을 빌려 전달하는 중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과 시대를 온 힘을 다해 살아나가야 했던 - 다시 말해, 혁명 혹은 근대성이라는 미명 하에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행위를 실행해야했던 - 국가 공무원의 회한과 함께 현재 드러나고 있는 제도 및 사회적 모순이,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 내용
물론 소설이 오랜 세월의 기억을 담고 있기에 많은 인물들 간의 얽힘들로 인해 결코 단순하지는 않지만, 소설의 내용은 편지의 발신자 커더우가 스기타니 선생이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가 일종의 연대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에, 그 방식을 따라서 풀어낼 수 있을 듯 하다.
먼저 이 편지는 고모와 발신자 커더우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모 완신은 중국 공산당의 영웅적 인물 완류푸라는 의사를 부친으로 두고, 그의 뒤를 이어 의료계에 투신하여 조산원 및 산부인과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거의 만명에 달하는 많은 아이를 받아낸다. 고모는 조국을 배신하고 대만으로 날아가 버린 조종사와의 연애에 좌절한 이후 거의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과 당의 혁명노선에 헌신적이었다.
그 이후 문화혁명기에 고모는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결코 꺽이지 않았던 고모의 당에 대한 충성으로 자신의 공무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나간다. 그 임무란 다름아닌 계획생육이라는 국가 시책인데, 고모가 이를 위해 실행했던 과업은 선전, 정관수술 및 난소 루핑, 또는 심지어 임신중절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고모는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지우게 되는데, 심지어 7,8개월 된 아이를 지우는 위험한 수술의 강행으로 인해 산모들이 죽기도 한다.(편지의 발신자 커더우의 첫 아내 왕런메이 역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고, 국가의 계획생육 정책이 두번째 아이를 낳는데 부과하는 벌금이 이들에게 장애가 되지 못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된다. 심지어는 대리모나 불법적으로 후처를 통해 아이를 가지는 행태가 자행된다.(개구리 양식장은 이를 위한 시설이다.) 한편 그의 고향 마을에는 낭랑(우리로 치면 삼신할머니)을 모신 사당이 들어서고, 그 사당이 명물이 되어 지방 경제를 살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어쨌든 커더우 역시 늙으막에 둘째 아이(사내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에 뜰뜨고, 고모는 퇴임 이후 자신의 활동에 대한 일종의 회한으로 삶을 살아가고, 일종의 민간신앙에 빠져 자신이 지웠던 태어나보지도 못한 생명들에 대한 초혼(하오다서우 선생과 친허의 점토인형 만들기)으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는 현재의 자신과 고모가 처한 상황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 와중에서 벌어진 자신의 아내(샤오스쯔)와 대리모(천메이) 사이의 해프닝에 대한 약간은 희화화된 판결이 희곡화되어 제시된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야기해 볼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뤄보자.
2. <개구리>라는 제목 - 왜 고모가 아니라?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개구리>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가 있다. 개구리를 의미하는 한자어 와(蛙)라는 말은 갓난쟁이(蛙蛙)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 중에 반복적으로 말해지듯이 올챙이들의 생김새는 인간의 정자를 닮아있기도 하다. 이런 동형적인 유비에서, 매우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소설의 화자는 인간의 조상은 원인(원숭이)이 아니라, 개구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는 생명을 상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 소설은 커더우가 고모에 대해 풀어내는 이야기다. 물론 단지 고모의 이야기만이 아닌 화자와 고모의 얽힌 이야기들을 화자 자신의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화자는 고모에 관한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은 제목은 고모가 아니라 <개구리>인가?
사실상 이 <개구리>라는 제목의 설정이 보여주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은 개구리와 고모라는 대립항의 설정이 있다는 것이다. 고모는 전근대적인 산파들을 몰아내고, 근대적인 서양의술을 통해 아이들을 받아냈고, 국가를 위해, 혁명의 지속을 위해(제도화된 혁명의 다른 이름은 국가이며, 따라서 이것은 동어 반복이다), 근대화를 위해 계획생육을 실행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과거에 국가 그 자체였다. 실제로 그녀가 말하고 명령하는 것이 곧 법이었고 국가의 명령이었다. 소설 내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고모와 개구리의 적대는 분명하다.*
[* 고모는 젊은 시절 조산원 활동을 할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 치이는 개구리를 밟아죽였고, 현에서 계획생육 책임자 역할을 할 때는 개구리 때문에 놀라서 기절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대립인데, 말하자면 비과학적, 전근대성, 생명을 상징하는 개구리와 과학성, 근대성, 국가를 상징하는 공무원으로서의 고모 사이에 설정되는 대립이다.
하지만 고모와 개구리의 대립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고모에게는 어떤 내적인 분열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한참 왕성하게 활동하던 고모는 국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고모도 인간이었고, 늙어서 퇴직한 이후에는 - 특히 요즘과 같이 과거의 혁명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드는 시기에 - 자신이 과거에 거쳐왔던 행적에 대한 회환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라는 제목은 단지 개구리와 고모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 대립에서 개구리가 결과적으로 승자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점까지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적 모순들이 있다.
3. 생명의 승리, 그러나 사회적 모순
그 승리는 커더우의 고향 가오미 둥베이현에서 - 더 나아가 중국에서 - 직접적으로 말해지지는 않지만 공공연한 비밀인 어떤 사회적 모순을 떠안고 있다. 고모의 퇴직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공공연한 후퇴를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중국이 수정주의 노선에 의해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수많은 신흥 자본가들 - 그 중의 다수는 국가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긴 전직 당-관료(샤오사춘으로 대변되는) - 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자본을 무기로 계획생육을, 더 나아가 일반 인민대중이 지켜야만 하는 법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함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개구리 양식장을 떠올려보자. 이 시설 혹은 회사가 취하는 이익은 겉으로 말하는 개구리를 사용한 약품 및 기능성 화장품 생산이 아니다. 오히려 불법적인 대리모 위탁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으로 하는 회사인 것이다. 바로 이들의 주 고객이 새로이 등장한 자본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일종의 종교 시설이다. 과거 혁명기에 쇠퇴했던 낭랑묘(娘娘廟)라는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은 복원되어 지역의 명물이 되어 있다. 관광객들과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상인들. 거기에서 팔리는 물건들 중에는, 퇴직 이후 고모가 하오다서우, 친허 등과 함께 만들어내는 점토 인형들도 있다.
그렇다. 자본의 무법성과 편재성과 결탁하여, 언제나 그 모순을 감추어주는 역할을 자임하는 종교, 오래된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어를 빌려 말하자면 '인민의 아편', 어쩌면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편지와 희곡이라는 형식이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4. 편지와 희곡이라는 형식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편지라는 형식의 글쓰기는 항상 누군가를 향하는 것이다. 발신인과 수취인이 있는 형식. 그러나 문제는 이 소설의 허구적 수취인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옮긴이가 밝히고 있듯이, 이 글의 수취인은 분명하지 않다. 스기타니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밝혀진 허구적 인물은 과연 현실의 어떤 특정 인물로 특정될 수 있는 인물인가? 예를 들어, 오예 겐자부로 같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 글이 공개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단순히 어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뿐만 아니라, 소설가 모옌의 자국민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가 쉽게 우편물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 - 편지나 엽서 같은 - 에는 어떤 방황적인 측면이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아 수취인을, 누군지 특정되지 않은 수취인을 향할 때까지, 계속 돌고 돌면서 어떤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생산하는...*
[* 데리다는 우편물의 이런 측면을 도착방황성(destinerrance)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데리다가 이 말을 쓰는 맥락은 밀봉되지 않은 엽서에 대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공개를 위해 출판된 글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편지가 지닌 방황성이란 어떤 매여있는 대상이나 의미가 없기에, 고정되지 않는 의미에, 있는 것이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편지가 있는 것이 분명치 않은 비실존과, 유령들과,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닿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황성을 통해서일 것이다. 고모가 말년에 결혼한 하오다서우 선생과 그녀의 추종자 친허와 함께, 그녀가 지웠던 아이들의 영혼을 불러넣어 만들어내는 인형들.
희곡 혹은 연극이라는 형식 역시 주목해야 한다. 연극은 일종의 집단적 의례다. 무대가 설치되고, 배우들이 어떤 허구의 이야기를 육화해내며, 이 물질적 실천에 대해 일희일비하는 관객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내는 의례.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구성하는 이 집단적 의례를 위한 '글쓰기'가 절정에 달하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좀 더 명확해진다. 물론 마치 '판관 포청천'을 연상하게 하는 - 그로 인해 웃음을 자아내는 - 판결의 장면은 한 죽은 아이의 어머니(불법적인 방식으로 커더우의 아이를 대신 낳았으나 불행히도 아이가 죽어버린 천메이)와 한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이후에 기적적으로 커더우의 아이를 가지게 된 늙은 산모 샤오스쯔) 사이의 송사를 다룬다. 그 판결의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희곡 혹은 연극이 다루는 내용이 과거에 자행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 희곡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혹은 더 나아가, 그 희곡의 절정이 되는 판결의 목적은 잘못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한풀이 같은 것, 말하자면 일종의 굿판이 아니냐는 것이다. 계획생육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모순의 봉합을 위한 굿판.
5. 소격효과 - 생명이 아니라 다수를 향해
그러나 이런 의구심을 뒤로 하고, 생각해야만 할 것은 옮긴이가 저자의 말을 인용하여 전하고 있는 '소격효과'라는 말이다. 소격효과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연극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부터, 현실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 현실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둘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보다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이 소설의 간접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와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될 때, 문제는 오히려 매우 난해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이 문제에서 거리를 두거나 혹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문제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며 해결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점이다. 분명히 과거 혁명의 실천에는 과오가 있었다. 혁명, 전근대의 타파, 혹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침습적인 정관 수술, 루프 수술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거의 나올 때가 다 된 아이들을 낙태시키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 그런 행위가 과오라는 점은 누구에게도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오의 인정이 과거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자본가가 등장하여, 국가의 법망을 피해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일들을 자본의 힘으로 행하는 새로운 - 그러나 한편으로 과거의 반복일 뿐인 - 신분제 사회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지양해야할 어떤 것이다. 편지의 형식 역시 단순히 사라져간 비실존의 소환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형식을 통해 언뜻 언뜻 드러나는 사회적 균열의 지점들이 바로 제거되어야할 사회적 모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라는 제목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명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동어반복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점에서 개구리를 생명과 연관시키는 것은 진부하다. 개구리는 오히려 '다수'와 연관되어야 한다. 일자로서의 국가에 대립하는 다수로서의 개구리들, 인민대중들, 중요한 것은 신비화된 - 그리고 자본과 결탁하는 - 추상적 생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 개개인의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