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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사건 - 사랑과 예술과 과학과 정치 속에서
알랭 바디우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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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ic을 `산출적인`이라고 해놓고, forcing은 `촉성`이라고 해놨네요. 그럼 generic하고 식별불가능한 것의 관계는 어떻게 이야기하죠? 그리고 forcing이란 말, 집합의 원소들이 무슨 식물이인가요? `촉성`재배를 하게. 적어도 번역어만 가지고는 언어감각의 부재를 보여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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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13-09-3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간을 서두르는 듯한 인상이네요. 저자의 핵심 용어들 번역을 보다 신중하고, 어느 정도 맞춰나가 줘야하는 부분이 필요할 듯 합니다. 출간을 늦추더라도 번역어를 손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모피아 : 돈과 마음의 전쟁
우석훈 지음 / 김영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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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기 보다는(예를 들어 줄거리를 이야기 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이 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가지를 짚어보도록 하자. 특히 판타지적 장르의 측면에서, 모피아라는 제목에서, 경제학자와 철학자에 대해서, 그리고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을 말이다.

1. 대중적 판타지라는 장르

이 소설은 판타지다. 대선이 다가오는 시점에 나온 일종의 경제 판타지. 심지어 그 전개 자체도 마치 무협지를 보는 듯 하다. 마치 고인(高人)을 만나 공력이 증가하고(김수진과의 만남, 사랑, 도움), 어떤 기연(奇緣)에 의해 어떤 위치에 오르는(이현도에 의해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되는 오지환),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삶의 궤적을 그려내는 이야기. 

저자 역시 이 소설이 판타지라는 점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저자 서문). 저자 자신이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권이 바뀌어도 결코 바뀌지 않았던 권력에 대한 날선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회의 앞을 향한 운동을 꿈꾼다는 것은 나름 긍정할 부분이다.(조선 시대에도 이런 판타지소설들이 등장했으며,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나, 허균의 홍길동전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당연히 이 판타지 장르라는 지적은 그저 이 소설에 대한 폄훼만은 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판타지이기에 소설의 흥미는 높아지고, 이 독서의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의 설정은 이렇다. 야당에 의해 새롭게 드러선 민주 정권은 경제 개혁 혹은 경제 민주화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전 정권들을 통제했던 경제 관료 출신의 인사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가의 환율을 뒤흔들겠다는 위협을 가한다. 말하자면 국가 채권과 거의 같은 신용도의 공기업 채권들을 투매해서, 국가 채권의 신용도를 흔들고, 이를 통해 원 환율을 흔들겠다는 위협을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은행 출신의 경제학자 오지환은 이러한 기도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오늘날 우리가 모피아라고 부르는 자들과 대결하기 위해서.

2. 모피아

모피아라 불리는 관료들, 국가 경제의 방향을 좌지우지 하는 자들, 과거 재정 및 경제 관련 엄무를 담당하던 부처 공무원들, 이 사람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이 담당하는 업무에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작태를 부릴 때, 우리는 그들을 모피아라고 부른다.(MOFIA는 Ministry of Finance의 약자인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 

하지만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 우선 경제학자들, 즉 소위 세속 철학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다. 경제학자들, 시장과 돈의 흐름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철학.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듯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전혀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경제학자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주류라고 불리는 영미권 경제학의 경우, 계보를 따라서 올라가다 보면 '효용(utility)'라는 개념을 앞세워 철학, 특히 윤리학을 구성하고자 했던 공리주의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에게 '효용'이란 어떤 행위의 결과로 발생하는 쾌락의 양을 따질 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쾌락을 만들어 내는 것과 관련된 용어였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이라는 오늘날 경제학의 고전이라 회자되는 책 이외에, 전혀 이 책과는 연결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두 책을 연결지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쾌락의 총량을 따지기 위해 등장했던 효용이라는 개념이었다. 

경제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효용이라는 개념을 윤리나 도덕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탄생한 학문이다. 이제 경제학자들에게 효용이라는 말은 그저 재화 또는 이익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3. 경제학과 철학의 관계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여전히 철학자로 불린다. 유명한 로버트 하일 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 시대와 아이디어>라는 책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세계의 구조, 운동 원리, 변전에 대해, 그 근본에 대해 탐구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철학 이야기가 나왔으니 플라톤이 쓴 대화편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하자. 적어도 그야 말로 철학자들의 시조라 할 수 있으니 이 세속 철학자가 살아있을 당시에 있었던 풍조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섰던 재판정에 대해서 말이다. 

플라톤 생전의 아테네는 소피스트적 가치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였다. 말하자면 교육을 통한 능력 향상과 이에 의한 입신양명이라는 가치에 말이다. 그들은 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교육자들이었다. 언제나 지록위마(指鹿爲馬) 할 자세가 되어있는, 말하자면 언제나 자신의 원칙을 바꿀 수 있는 그들에게도 하나의 불변의 원칙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라는 원칙 말이다. 

당연히 사회 내에서 소피스트들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정치가들은 소피스트들의 교육, 자신의 이익을 위한 교육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가 소피스트들로부터 배운 혹은 적어도 소피스트들과 같은 계열의 웅변술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의 경향은 시에, 특히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에 기초한 것이었다. 뭉뚱그려 말해서, 그 사회 자체가 하나의 소피스트적 교육의 장이었고, 바로 그 안에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델피의 신전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았던 사람, 그러나 이러한 소피스트적 교육의 장에서 통용되는 말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던 사람, 일종의 외국인으로서의 소크라테스가 말이다. 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자들과의 대결을 통해 탄생했다.

그렇다면 경제학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 세속 철학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일견 철학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버린 듯 보이는 학문은? 이 <모피아>라는 책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이 경제학자 대 경제학자의 대결을 그린, 모든 사람들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경제학자와 자신의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소수의 무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경제학자 간의 투쟁을 그린 허구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질문.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에도 경제학적 수치와 이론들로 무장하고 곡학아세(曲學阿世) 하는 무리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 뒤에는 이들의 궤변적 변설로 엄청난 이익을 보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재벌과 이들에게 기생하는 정치권)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비록 좀 지나치게 대결구도를 끌고 간 면이 없지는 않으나, 오히려 그런 방식으로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 예를 들어, 레이거노믹스를 이론적으로 뒷받침 했던 데마고그들의 공급측면 경제(Supply side economics). 부시 정권 역시 이 경제 이론에 기반하여 감세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거의 수명을 다한 현 정권과 그 정권과 공생했으나 그 수명이 다한 지금은 그 정권을 교체하겠다는 궤변을 풀어내고 있는 여당 대선 후보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라는 슬로건을 기반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자면, 세금을 줄이면 대기업 및 재벌에게 투자 여유분이 생겨서 투자를 많이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세수와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인데,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미국에서 부시 정권 8년,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궤변일 뿐이다.] 

4. 정치와 경제의 관계

기실 별 생각 없이 정치와 경제라는 주제를 보게 되면 둘을 연관시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제학자들은 모두의 이익을 혹은 효용을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몇몇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그들로부터 얻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무할 것인지라는 문제를 중심으로 둘로 갈리게 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경제학자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운영하는데 있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된다. 

특히 수출 지향적 경제 정책으로 일관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정책을 담당했던 당사자들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바로 수출 대기업들과 재벌이라 불리는 자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경기부양이라는 미명 하에 대규모 토건 사업을 담당했던 토건족 및 건설 관련 관료들의 이익이라는 지향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앞에서 경제학에 대해 물었던 질문 이외에 하나의 추가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현행적인 경제 운영 방식으로부터 듣게 되는, 모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탐욕을 부추기는 궤변을 그대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이를 전환하여 다른 방향으로 - 물론 그 길은 여렵고 힘든 것인데, 지금까지 가 본적이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 가기 위한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레이터 풀(더 큰 바보, greater fool)이라는 말이 있다. 금융 경제 쪽에서 쓰는 말인 이 말은 유가증권 시장에서 비싸게 사서(buy long) 싸게 파는(sell short), 다시 말해 손해보는 거래를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시장에서 모두의 지향점은 바로 이 그레이터 풀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의 용법을 한정된 영역에 가두지 말고, 밖으로 열게 되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자신의 더 큰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익을 공유하는 방향을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레이터 풀이라는 말을 듣게 될 사람들이 할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언제든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경제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투표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대중적 금융 판타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의 탐욕을 이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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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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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간의 문제 - 정체 혹은 운동의 부재와 관련된 

 

시간의 문제는 지금까지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사물의 변화와 운동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파악은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요한 집>은 바로 시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터키의,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어떤 정지 혹은 정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물론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이 소설에도 시간의 흐름과 이에 따른 소설상의 인물들의 움직임들이 있다. 시간이 되었기에(여름이 되어 할머니를 방문할 시간이 되었기에) 파룩, 닐귄, 메틴은 이스탄불 근교에 위치한 파트마의 집을 방문하고, 파트마는 이들을 기다리며, 이 집의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레젭은 이들의 방문을 위해 집을 준비한다. 작고한 아버지 도안의 묘소 방문, 역사학을 전공하여 조교수로 일하는 파룩의 지역사 탐구, 좌파 지식인 닐귄의 해변 방문과 그녀 뒤를 따라 다니는 극우파 민족주의자 하산의 비행들, 미국의 물질문명을 동경하며 철없이 부잣집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메틴, 모든 인물들이 시간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이동 및 행동을 놓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이외에, 다른 시간이 있다. 일상적 생활과 다른, 그 틀을 벗어나는, 그로 인해 어떤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 그러한 시간은 우리가 어떤 '사건'이라는 말로 나타내는 단절의 시간, 즉 그 시점의 앞과 뒤로 역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말하자면 사건의 시간이 말이다.  

 

고요한 ... - 소설 자체가 드러내는 결과 

 

<고요한 집>은 왜 고요한가? 어쩌면 답은 매우 단순하다. 운동 혹은 변화가 없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소설의 액면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이야기 해보자. '고요한' 집은 일종의 결과다. 하산의 폭행으로 인해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닐귄, 그 집은 이 죽음으로 인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상태에, 슬프기도 하지만 단지 슬픔이라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빠진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고, 레젭은 이층에서 파트마가 부르는데도 올라가지도 않으며, 파트마는 그녀대로 자신의 과거의 노스탤지어(nostalgia)로 빠져들 뿐이다. 여기에서 시간은 글자 그대로 멈추어버린다. 그 누구도 어떤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찾아오는 정적, 고요, 바로 이와 함께 소설의 흐름 혹은 시간의 흐름은 종결된다. 물론 이 죽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사건적 시간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이 소설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소설 자체에만 국한하여 말할 때, 이 사건은 소설의 시간적 흐름을 멈추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혁명주의자 닐귄과 극우파 민족주의자 하산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단순한 치정 범죄로만 읽는다면 소설이 펼쳐내는 이야기를 너무나 협소하게 읽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이 집안에 대해, 혹은 터키의 근대에 대해 이야기 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 집 - 터키적 근대성과 그의 자식들

 

이 집안의 가계도를 그려 보자면, 셀라하틴을 정점으로, 아들 도안과 셀라하틴의 서자들인 레젭, 이스마엘, 삼대째로 파룩, 닐귄, 메틴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들인 하산이 있다.  

 

셀라하틴은 의사이며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고 터키의 근대화 및 변화를 주창했던 지식인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이스탄불 근교의 한 작은 도시로 쫓겨난다. 거기에서 그는 서구의 근대화 혹은 지식의 완성에 대항하는 터키만의 지식 혹은 백과사전의 기약없는 완성을 위해 매진한다. 

 

어쨌든 그와 파티마 사이에서 태어난 도안의 자식들인 파룩, 닐귄, 메틴은 어떤 의미에서 터키 근대성의 적자들이다. 

 

- 파룩은 더 이상 대문자 역사(History)를 쓸 수 없는 오늘날의 정황 내에 처한 터키 지식인의 모습이다. 하나의 역사, 즉 어떤 하나의 이름 아래(여기에서는 터키라는 큰 이름 아래) 위치하는 대문자 역사는 모든 각각의 이야기들(histories)을 유일한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인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서구의 지성사는 2차 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그 차마 말할 수 없는 범죄로 인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마치 미셸 푸코의 지식에 대한 고고학의 연구 방식을 보이는 파룩의 지역사 연구 장면은 각각의 이야기 혹은 작은 역사를 써나가는 오늘날의 경향을 보여준다.

 

- 닐귄은 좌파, 혁명주의자다. 분명히 좌파 혹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적 운동의 궤적은 근대와 함께한다. 아니 근대를 그 발단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산주의는 근대성의 자식들 중 하나다. 닐귄은 공산주의적 지식인의 그러한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 메틴은 서양의 특히 미국의 자본주의적 풍요를 동경한다. 그 역시도 자신이 동경하는 서양적 자본주의를 위해서라면 전통 따위는 상관이 없는 자인데, 우리는 역사에서 자유주의자들(liberals)이라고 분류되는 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을 본다.(사실 자유주의자들 보다는 오히려 방종주의자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들 셋 이외에 하산이 있다. 그는 셀라하틴의 서자들 중 도안이 준 돈을 받아 복권가계를 운영하는 이스마엘의 아들이다.

 

- 사실 앞에서 이야기 한 적자들 이외에 서출인 하산도 역시 터키라는 하나의 '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민족주의는 일종의 근대적 발명품이다. 유럽에서 근대적 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 유럽의 각 지역은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종교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다른 지역이었다. 심지어 가까운 지역에서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근대적 국민 국가 혹은 민족 국가가 들어서면서, 이를 해소하고 인민의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하기 위해 도입하게 된 이데올로기가 바로 민족주의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독일 나치즘을 들 수 있다(아리아인들의 순혈주의 및 고대 민족신화 발굴). 이러한 내세우기 어려운 측면으로 보자면, 민족주의는 일종의 근대성의 서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민족주의자 하산이 셀라하틴의 서출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 볼 수 있다. 

 

다시 '... 고요한' - 다시 그 질문으로

 

집안의 가계도를 보자면 정체 혹은 운동의 부재라는 것은 단지 소설에서 액면으로 드러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터키의 근대화 혹은 사회의 철저한 변화라는 의미에서의 운동의 부재가 더욱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먼저 파룩과 같은 포스트모던적 파편화의 지식인들이 실행하는 작업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 역시도 할아버지 셀라하틴과 같이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있는 것일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 이 작업의 의미는 셀라하틴이 자신의 작업에 부여했던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 오늘날 문화를 통해 자신의 나라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적다. 셀라하틴 베이의 백과사전적인 손자들은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심지어 생각의 수입자라는 측면에서도 셀라하틴 베이 만큼이나 급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그 누구도 내가 셀라하틴 베이 같은 사람들을 경시한다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오르한 파묵, <The Other Colors>, p131. 영문판 위키피디아 인용문을 재인용함.)  

 

파묵 자신의 말처럼, 셀라하틴의 작업은 사회를 보다 급진적으로, 철저히 변화시키고자 하는 갈망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의도는 존중되어야 한다. 

 

닐귄이 재현하는 좌파 지식인들의 경우, 그 운동의 힘이 너무나 미약하고 대중과 연결되지 못했고(닐귄과 하산의 적대), 메틴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애초에 자신의 나라의 상황 따위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서구적 자본주의의 풍요로움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이며, 하산이 재현하는 이슬람을 바탕에 둔 종교적 민족주의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변화는 과거로의 회귀, 즉 반동적 운동에 다름 아니다. 결국 그 집의, 혹은 적어도 이 책이 쓰여질 당시 터키의 고요함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다. 운동 또는 시간의 부재와 같은 어떤 것을 유발하는 무기력함, 편안함, 혹은 슬픔과 과거의 기억들에 둘러싸여, 그들은 닐귄의 죽음에도 할말을 잃은 채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트마의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책, 독서, 마차여행의 기억으로 이 글을 맺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반복되는, 그렇기에 즐거운, 그러나 결코 돌아오지는 않을 시간에 대한 기억으로... 

 

... 우리가 뒤로 한 길, 생각하면 아주 기분이 좋아지는 과거를 보고 있었다. 정말 좋았던 것은, 손에 들고 있던 그 책 때문에 뒤얽히고 복잡한 과거를 어쩌면 집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을 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이곳 내 침대에 누워 생각했던 것처럼. 넌 삶을 단 한 번의 그 마차 여행을, 끝나면 다시 시작할 수 없어, 하지만 손에 책 한 권이 들려 있다면, 그 책이 얼마나 복잡하고 모호해도, 다 읽고 나서, 그 모호함과 삶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 원한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수 있어, 그렇지 않니, 파트마? (p2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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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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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이야기의 발단은 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엘레강스' 에펜디라는 한 금박세공 장인의 죽음, 죽은 자의 푸념으로부터, 이미 나흘씩이나 한 빈 우물 바닥을 뒹굴며 썩어가고 있는 그의 푸념으로부터. 일종의 고발, 자신을 죽인 자를 찾아달라는 호소, 그로부터 이 소설을 읽는 지난한 지적 노동은 시작된다. 시종일관 시점의 변화를 통해, 분열적인 말하기를 통해 모든 일어나는 일의 전개를 제시하는 방식의 글에서, 고된 노동과 맞먹는 힘겨움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있겠는가? (이런 말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이 살인사건의 이야기를 쉽게 풀어내는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1591년(이 소설의 사건들이 벌어지는), 당시의 오토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3세는 1년 남은 이슬람력 헤지라 1000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형식의 화첩을 제작할 것을 명령한다. 물론 그 화첩의 제작 주체는 세밀화가들이지만 그 화첩의 그림들은 베니스 화가들의, 특히 세바스티아노의 화풍을 받아들여, 원근법을 사용하고, 술탄의 초상 및 각 사물들의 크기를 실물 크기로 그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술탄의 밀명을 받은 에니시테 에펜디는 궁정화원장 오스만의 가장 성공한 제자들인 엘레강스, 나비, 황새, 올리브 등을 포섭하여 화첩 제작에 나선다. 문제는 이들 중 누군가가 동료인 금박세공 장인 엘레강스 에펜디를 살해한 것. 마침 에니시테의 딸 세큐레를 연모하여 12년 전 동쪽 변방으로 쫓겨났던, 에니시테의 외조카 카라(에니시테는 카라의 이모부)가 화첩 작업을 돕기 위해 이스탄불로 돌아온다. 카라는 에니시테의 일을 도우면서 과부이자 두 아들의 어머니가 된 세큐레와 결혼했으면 하지만, 세큐레의 시동생 핫산 역시 세큐레를 노리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카라는 에니시테로부터 세큐레와의 결혼승락을 받아내지만, 결혼을 앞두고 에니시테도 자신의 집에서 살인자의 흉수에 당하게 되고, 제작된 화첩은 도난 당한다. 칼라는 살인자와 도난 당한 화첩을 찾고 자신의 집안을, 세큐레와 두 아들을 보호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다. 분명히 살인자는 그의 어린 시절 궁중화원 동학들인 나비, 황새, 올리브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이 치명적인 연쇄살인의 이유는 세밀화에 대한 의견차다. 카라는 살인자를 찾아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고 이들의 그림을 대면해 나가는 힘겨운 여정에 나선다.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면, 무언가 산만하게 분산된 이야기들 - 여러 사람들과 심지어 그림 속의 사물들을 통해 구술되는 듯한 느낌의 - 을 하나로 엮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어 16세기 말의 터키에서 완성에 이른 그리고 동시에 쇠락의 내리막길로 들어선 세밀화라는 예술적 과정에 대해 말하는,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 둘을, 서양과 동양 문화 및 예술의 대립을, 예술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는 놀라운 소설이 어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이 이를 수 밖에 없는 파국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소설과 <장미의 이름>이 지닌 공통적인 구도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2. 먼저 추리소설과 지적 노동에 대해서. 노동이라는 말이 과연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소설과 어울리는 말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추리소설은 일종의 유희를 위한 독서의 대상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유희 혹은 여흥을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면, 나는 그러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할 것이다. 

이 소설 중에는 '거의' 전능에 가까운, 매끄럽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으며, 각 장의 이야기를 담당하고 있는 인물들, 살인자, 두 피살자들, 심지어 그림들 - 개, 나무, 금화, 죽음 등 - 의 철저하게 1인칭에 한정된 비일관적 서술들은 하나의 매끄러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을 방해한다. 이 소설이 비록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형식의 추리소설은 아니다. 이 비일관성의 구슬들을 꿰어 하나의 목걸이를 만드는 일은 어떤 비범한 능력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철저하게 독자의 몫으로 떨어지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노동이다.  

그러나 이 노동에는 단순히 즐거움을 위한 읽기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관점의 변화와 심리적 불안이라는 시험을 통과할 수만 있다면, 이 소설을 읽는 과정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생각들 또는 사유의 단초들을 말이다.

3. 이 소설을 끌어나가는 중심축은 대립항들 간의 갈등인데, 먼저 사랑이라는 축으로 이끌려 가는 대립항을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종의 여러 개의 겹쳐진 삼각형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a. 먼저 사랑스러운 딸을 아끼는 에니시테와 생과부가 된 세큐레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b. 죽은 형을 대신해 절세미인인 형수를 취하려는 핫산(형사취수제는 중동 지방의 오래된 관습이다)과 세큐레,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c.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소설의 말미에서 드러나는 카라의 오랜 친구 올리브 에펜디와 세큐레 그리고 카라가 그려내는 삼각형

을 말이다. 이 세큐레를 대상으로 하는, 그리고 종국에 카라가 승자가 되는 겹쳐져 있는 삼각적 관계들은 모종의 경쟁 및 긴장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소설의 전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삼각형들의 겹침의 중심에 있는 세큐레가 결코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방물장수 에스테르를 통해 매우 적극적인 개입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선택의 주체는 카라가 아니라 세큐레다.(또한 사랑의 매개자 에스테르의 역할을 살펴보는 것 역시 흥미진진한 일이다.) 

어쨌든 카라와 세큐레 간의 사랑은 다른 대립 및 갈등 관계들과 때로는 느슨하게, 그리고 때로는 긴밀하게 엮여나가면서 하나로 꼬아낸 보다 크고 탄탄한 줄을 형성하고 있다.  

4. 사랑이라는 축과 엮이는, 어쩌면 보다 중심적인, 축은 바로 살인사건의 원인이다. 서양의 화풍을 받아들이는 투르크 제국, 그것은 이미 궁정화원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화원들에게, 그리고 그들 중 에니시테 에펜디에 의해 차출된 네 명의 화원들에게, 일종의 충격이 될 수 밖에 없다. 살인사건은 제물이나 명예를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 아니라, 바로 이 문화의 충돌로 인해 빚어진 결과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피상적인 서술이 될 수 밖에 없는데, 보다 깊숙히 그 이면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예술 자체에 대한 의견 혹은 관점의 차이가 자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세밀화가 추구하는 화풍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그것은 오래 전에 동방(중국)으로부터 전래하여, 시라즈와 헤라트라는 지방에서 발전되어 이슬람 권 전체에 퍼진 화풍이다. 지평선이 화폭의 상단에 그려지고, 모든 인물과 사물들은 이차원으로 평면상에 배치된다. 인물들, 특히 여인들은 중국 당나라의 화풍이 그랬듯이, 약간은 퉁퉁하게 하얀 얼굴로 그려지고, 신분에 따라 인물의 크기가 달리 그려진다. 사물들 역시 과거의 고인들의 화풍에 따라 언제나 이상적인 형태로 정형화된다. 그에 반해 서양, 특히 베니스로부터 들어온 화법은 3차원적이다. 마치 현실에서 사물과 풍경을 보듯 모든 것은 가까움과 멂에 따라 음영과 색상이 배치되고, 인물들과 사물들은 신분고하에 관계 없이 동등한 크기로 다뤄진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여기에서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립을 볼 수 있는데, 말하자면 세밀화가들은 언제나 정형화된, 오래 전부터 내려온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신적인 시선을, 이데아의 바라봄을 추구하는데 반해(따라서 세밀화가들에게 눈멂은 화가로서의 결점이 아니라 보다 순수한 바라봄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서양의 화가들은 육안으로 직접 보는 것과 같은 현실적인 것을, 현실의 모방, 즉 (이데아의) 모방의 모방을, 그로부터 오는 눈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더라도, 살인자가 어떤 종교적인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였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5. 이 소설을 다른 중요한 현대 소설과 매듭지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수도원을, 특히 수도원 경내의 장서관을 중심으로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냈던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을 말이다. 플라톤주의와 교회의 권위를 대변하는 장님 호르헤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속권(俗權)의 도전을 대변하는 윌리엄의 대결은 놀라운 것이다.(혹시라도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물론 <장미의 이름>이 다루고 있는 대결은 결코 예술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대결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전된 책과 웃음의 문제, 사용권의 문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럼에도 <장미의 이름>이 그려내는 대립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이데아'와 '모방의 모방'의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내 이름은 빨강>이 그려내는 대립과 매듭지어질 수 있다. 그리고 두 소설에서 등장하는 이 순수한 플라톤주의자들 - 호르헤와 살인자 - 은 어떤 파국을, 재앙을 불러일으킨다.(<장미의 이름>의 호르헤의 경우, 수도원 및 장서관의 화재로 인한 소실. <내 이름은 빨강>의 살인자의 경우, 두 사람의 목숨 및 자기 자신의 파멸.) 

6. 우리가 알듯이, 어떤 순수함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재앙으로 이어진다. 현실에는 결코 순수한 것이 없다. 순수에 대한 집착은 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의 자리를 현실 속에 마련하기 위해 불순한 것들을 몰아내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종교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비신자들, 또는 보다 그럴듯한 말로 하자면, 이교도들을 살해하는데 전혀 망설이지 않고, 사랑의 순수함에 대한 대한 열정은 완전한 타자로서의 둘이 지닌 각각의 차이를 무화하려 하며, 순수한 정치에 대한 열정은 모든 불순한 자들을 축출하여 정치의 가능성을 독재, 혹은 전제정으로 제한시킨다.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있어, 자기 이외에 모든 것 또는 모든 이는 그 불순함에 있어 의심의 대상이 되며, 그런 의미에서 순수함에 대한 열정이란 결국 자기애 혹은 자기중심성의 다른 이름이 될 뿐이다.(소설의 말미에서 살인자가 훔쳐간 화첩을 회수했을 때, 그 화첩의 중심에 살인자의 형상이 그려져 있음을 상기해 보라.)

현실 속에서 살아가기, 자신과 다른 타인들과, 자기의 순수성이 아닌 타인의 불순함으로 오염된 세계 속에서 견뎌내기, 그것이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다. 그리고 또한 한편으로 명심해야할 것은 순수함을 추구하는 자를, 그리고 자신의 순수함을 위해 남을 이용하거나, 심지어 쓰러뜨릴 수 있는 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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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놀라운 글쓰기. 가장 대중적인 말하기를, 아니 거의 촌스러운 촌부들의 입을 빌려 어제의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집어내고 있는 가까운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이야기, 이것이 내가 이 <개구리>라는 제목의 훌륭한 소설에 대해 내릴 수 있는 평가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런 평가만으로는 부족한데, 이 소설에는 또한 어떤 시대적 정황과 관련하여 소설가 모옌이 커더우라는 편지의 발신자의 이름을 빌려 전달하는 중국 현대사의 어두운 단면과 시대를 온 힘을 다해 살아나가야 했던 - 다시 말해, 혁명 혹은 근대성이라는 미명 하에 말할 수 없는 끔찍한 행위를 실행해야했던 - 국가 공무원의 회한과 함께 현재 드러나고 있는 제도 및 사회적 모순이,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 내용


물론 소설이 오랜 세월의 기억을 담고 있기에 많은 인물들 간의 얽힘들로 인해 결코 단순하지는 않지만, 소설의 내용은 편지의 발신자 커더우가 스기타니 선생이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가 일종의 연대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에, 그 방식을 따라서 풀어낼 수 있을 듯 하다. 


먼저 이 편지는 고모와 발신자 커더우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모 완신은 중국 공산당의 영웅적 인물 완류푸라는 의사를 부친으로 두고, 그의 뒤를 이어 의료계에 투신하여 조산원 및 산부인과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거의 만명에 달하는 많은 아이를 받아낸다. 고모는 조국을 배신하고 대만으로 날아가 버린 조종사와의 연애에 좌절한 이후 거의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과 당의 혁명노선에 헌신적이었다. 


그 이후 문화혁명기에 고모는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결코 꺽이지 않았던 고모의 당에 대한 충성으로 자신의 공무원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해나간다. 그 임무란 다름아닌 계획생육이라는 국가 시책인데, 고모가 이를 위해 실행했던 과업은 선전, 정관수술 및 난소 루핑, 또는 심지어 임신중절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고모는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지우게 되는데, 심지어 7,8개월 된 아이를 지우는 위험한 수술의 강행으로 인해 산모들이 죽기도 한다.(편지의 발신자 커더우의 첫 아내 왕런메이 역시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자본가 계층이 등장하고, 국가의 계획생육 정책이 두번째 아이를 낳는데 부과하는 벌금이 이들에게 장애가 되지 못하면서, 일종의 사회적 불평등이 야기된다. 심지어는 대리모나 불법적으로 후처를 통해 아이를 가지는 행태가 자행된다.(개구리 양식장은 이를 위한 시설이다.) 한편 그의 고향 마을에는 낭랑(우리로 치면 삼신할머니)을 모신 사당이 들어서고, 그 사당이 명물이 되어 지방 경제를 살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어쨌든 커더우 역시 늙으막에 둘째 아이(사내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에 뜰뜨고, 고모는 퇴임 이후 자신의 활동에 대한 일종의 회한으로 삶을 살아가고, 일종의 민간신앙에 빠져 자신이 지웠던 태어나보지도 못한 생명들에 대한 초혼(하오다서우 선생과 친허의 점토인형 만들기)으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는 현재의 자신과 고모가 처한 상황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 와중에서 벌어진 자신의 아내(샤오스쯔)와 대리모(천메이) 사이의 해프닝에 대한 약간은 희화화된 판결이 희곡화되어 제시된다.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았으니, 이제 이야기해 볼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뤄보자.



2. <개구리>라는 제목 - 왜 고모가 아니라?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개구리>라는 제목은 어떤 의미가 있다. 개구리를 의미하는 한자어 와(蛙)라는 말은 갓난쟁이(蛙蛙)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 중에 반복적으로 말해지듯이 올챙이들의 생김새는 인간의 정자를 닮아있기도 하다. 이런 동형적인 유비에서, 매우 비과학적인 방식으로, 소설의 화자는 인간의 조상은 원인(원숭이)이 아니라, 개구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는 생명을 상징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 소설은 커더우가 고모에 대해 풀어내는 이야기다. 물론 단지 고모의 이야기만이 아닌 화자와 고모의 얽힌 이야기들을 화자 자신의 입으로 풀어내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화자는 고모에 관한 이야기를 편지로 쓴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은 제목은 고모가 아니라 <개구리>인가?


사실상 이 <개구리>라는 제목의 설정이 보여주는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은 개구리와 고모라는 대립항의 설정이 있다는 것이다. 고모는 전근대적인 산파들을 몰아내고, 근대적인 서양의술을 통해 아이들을 받아냈고, 국가를 위해, 혁명의 지속을 위해(제도화된 혁명의 다른 이름은 국가이며, 따라서 이것은 동어 반복이다), 근대화를 위해 계획생육을 실행하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과거에 국가 그 자체였다. 실제로 그녀가 말하고 명령하는 것이 곧 법이었고 국가의 명령이었다. 소설 내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고모와 개구리의 적대는 분명하다.* 

[* 고모는 젊은 시절 조산원 활동을 할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 치이는 개구리를 밟아죽였고, 현에서 계획생육 책임자 역할을 할 때는 개구리 때문에 놀라서 기절 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대립인데, 말하자면 비과학적, 전근대성, 생명을 상징하는 개구리와 과학성, 근대성, 국가를 상징하는 공무원으로서의 고모 사이에 설정되는 대립이다.  


하지만 고모와 개구리의 대립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고모에게는 어떤 내적인 분열이 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한참 왕성하게 활동하던 고모는 국가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고모도 인간이었고, 늙어서 퇴직한 이후에는 - 특히 요즘과 같이 과거의 혁명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드는 시기에 - 자신이 과거에 거쳐왔던 행적에 대한 회환으로 가득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라는 제목은 단지 개구리와 고모 사이의 대립만이 아니라, 그 대립에서 개구리가 결과적으로 승자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는 점까지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드러나는 새로운 사회적 모순들이 있다.


3. 생명의 승리, 그러나 사회적 모순


그 승리는 커더우의 고향 가오미 둥베이현에서 - 더 나아가 중국에서 - 직접적으로 말해지지는 않지만 공공연한 비밀인 어떤 사회적 모순을 떠안고 있다. 고모의 퇴직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의 공공연한 후퇴를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중국이 수정주의 노선에 의해 자본을 받아들임으로써 수많은 신흥 자본가들 - 그 중의 다수는 국가와 결탁하여 이권을 챙긴 전직 당-관료(샤오사춘으로 대변되는) - 이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은 자본을 무기로 계획생육을, 더 나아가 일반 인민대중이 지켜야만 하는 법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함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개구리 양식장을 떠올려보자. 이 시설 혹은 회사가 취하는 이익은 겉으로 말하는 개구리를 사용한 약품 및 기능성 화장품 생산이 아니다. 오히려 불법적인 대리모 위탁으로 돈을 버는 것이 목적으로 하는 회사인 것이다. 바로 이들의 주 고객이 새로이 등장한 자본가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일종의 종교 시설이다. 과거 혁명기에 쇠퇴했던 낭랑묘(娘娘廟)라는 아이를 점지해준다는 신을 모시는 사당은 복원되어 지역의 명물이 되어 있다. 관광객들과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 그들에게 물건을 팔아 돈을 버는 상인들. 거기에서 팔리는 물건들 중에는, 퇴직 이후 고모가 하오다서우, 친허 등과 함께 만들어내는 점토 인형들도 있다.  


그렇다. 자본의 무법성과 편재성과 결탁하여, 언제나 그 모순을 감추어주는 역할을 자임하는 종교, 오래된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어를 빌려 말하자면 '인민의 아편', 어쩌면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편지와 희곡이라는 형식이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4. 편지와 희곡이라는 형식


이 소설이 취하고 있는 편지라는 형식의 글쓰기는 항상 누군가를 향하는 것이다. 발신인과 수취인이 있는 형식. 그러나 문제는 이 소설의 허구적 수취인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옮긴이가 밝히고 있듯이, 이 글의 수취인은 분명하지 않다. 스기타니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밝혀진 허구적 인물은 과연 현실의 어떤 특정 인물로 특정될 수 있는 인물인가? 예를 들어, 오예 겐자부로 같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 글이 공개된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단순히 어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뿐만 아니라, 소설가 모옌의 자국민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독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가 쉽게 우편물이라고 말하는 어떤 것 - 편지나 엽서 같은 - 에는 어떤 방황적인 측면이 있다. 여기저기를 떠돌아 수취인을, 누군지 특정되지 않은 수취인을 향할 때까지, 계속 돌고 돌면서 어떤 확정되지 않은 의미를 생산하는...* 

[* 데리다는 우편물의 이런 측면을 도착방황성(destinerrance)이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데리다가 이 말을 쓰는 맥락은 밀봉되지 않은 엽서에 대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공개를 위해 출판된 글이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편지가 지닌 방황성이란 어떤 매여있는 대상이나 의미가 없기에, 고정되지 않는 의미에, 있는 것이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편지가 있는 것이 분명치 않은 비실존과, 유령들과, 태어나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닿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황성을 통해서일 것이다. 고모가 말년에 결혼한 하오다서우 선생과 그녀의 추종자 친허와 함께, 그녀가 지웠던 아이들의 영혼을 불러넣어 만들어내는 인형들. 


희곡 혹은 연극이라는 형식 역시 주목해야 한다. 연극은 일종의 집단적 의례다. 무대가 설치되고, 배우들이 어떤 허구의 이야기를 육화해내며, 이 물질적 실천에 대해 일희일비하는 관객들이 모여 함께 만들어내는 의례. 특히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구성하는 이 집단적 의례를 위한 '글쓰기'가 절정에 달하는 장면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좀 더 명확해진다. 물론 마치 '판관 포청천'을 연상하게 하는 - 그로 인해 웃음을 자아내는 - 판결의 장면은 한 죽은 아이의 어머니(불법적인 방식으로 커더우의 아이를 대신 낳았으나 불행히도 아이가 죽어버린 천메이)와 한 살아있는 아이의 어머니(이후에 기적적으로 커더우의 아이를 가지게 된 늙은 산모 샤오스쯔) 사이의 송사를 다룬다. 그 판결의 결과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희곡 혹은 연극이 다루는 내용이 과거에 자행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그 희곡이 목적으로 하는 것은, 혹은 더 나아가, 그 희곡의 절정이 되는 판결의 목적은 잘못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한풀이 같은 것, 말하자면 일종의 굿판이 아니냐는 것이다. 계획생육 자체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 모순의 봉합을 위한 굿판.    


5. 소격효과 - 생명이 아니라 다수를 향해


그러나 이런 의구심을 뒤로 하고, 생각해야만 할 것은 옮긴이가 저자의 말을 인용하여 전하고 있는 '소격효과'라는 말이다. 소격효과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연극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로부터, 현실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 현실의 문제로부터 거리를 둘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보다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바로 이 소설의 간접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와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될 때, 문제는 오히려 매우 난해한 것이 될 수 있지만, 이 문제에서 거리를 두거나 혹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문제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며 해결가능한 것이 되기도 한다.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점이다. 분명히 과거 혁명의 실천에는 과오가 있었다. 혁명, 전근대의 타파, 혹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침습적인 정관 수술, 루프 수술 등은 차치하고서라도, 거의 나올 때가 다 된 아이들을 낙태시키는 말할 수 없이 끔찍한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 그런 행위가 과오라는 점은 누구에게도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 과오의 인정이 과거로의 회귀가 되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자본가가 등장하여, 국가의 법망을 피해 일반인들은 꿈도 못 꿀 일들을 자본의 힘으로 행하는 새로운 - 그러나 한편으로 과거의 반복일 뿐인 - 신분제 사회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우리가 지양해야할 어떤 것이다. 편지의 형식 역시 단순히 사라져간 비실존의 소환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형식을 통해 언뜻 언뜻 드러나는 사회적 균열의 지점들이 바로 제거되어야할 사회적 모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구리>라는 제목에 대해서도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명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은 동어반복적일 수 밖에 없으며, 그런 점에서 개구리를 생명과 연관시키는 것은 진부하다. 개구리는 오히려 '다수'와 연관되어야 한다. 일자로서의 국가에 대립하는 다수로서의 개구리들, 인민대중들, 중요한 것은 신비화된 - 그리고 자본과 결탁하는 - 추상적 생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그들 개개인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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