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위로라는 주제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 어떤 일정하게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작년 한해 우리는 청년에 대한 위로를 주제로 하는 책이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에 등극하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 책 이후로 여러가지 컨텐츠들이 - 심지어는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팟캐스트 컨텐츠들마저도 - 위로를 말하고 있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이 책의 제목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시구로가 세계 문학계 내에서 상당한 무게를 얻은 여러 책들을 선보인 이후에 쓰인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 결코 위로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물론 어떠한 위로도 제공하지 않는다). 당연히 여기에는 어떤 기묘한 역설이 존재하며, 이 역설은 위로라는 제목을 가진, 결코 위로를 말하지 않는 책이라는 역설로, 그리고 다시 그로부터 이어지는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역설'이라는 형용 모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위로를 주지 않는 이 책, 문제를 극한으로 몰고가는 이 책은 아무런 효용도 없다고 말해야만 할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 책은 그 악화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책이 드러내는 위로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해, 현대 문학이 드러내는 어떤 이념에 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잠시 이시구로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 이야기 해 보자. 여느 작가들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시구로의 작품들에는 어떤 특정한 정서가 묻어난다. 그가 쓴 모든 작품을 읽은 것이 아니기에 단정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두 작품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하나는, 장기 기증용 인간 클론이 허용된 허구적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강제적 장기 공여자들의 이야기를 담담한 필체로 다룬 <날 보내지 마>, 그리고 다른 하나는 2차 대전 직전, 나치 독일에 외교적으로 이용 당하게 된 영국 귀족을 주인으로 모시는 한 버틀러의 이야기를 역시 담담한, 아니 담담하다 못해 정체된, 분위기를 드러내는 <남아있는 나날>이다. 이 두 작품이 공유하는 어떤 필연 혹은 구조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인물들에 대한 어떤 말 못할 답답함과 소설 속의 현실과 인물의 인식 사이에 조성되는 불편함은 상상 이상이다.
기실 이러한 불편함, 혹은 불안이야말로 현대 문학을 규정하는 특징들 중 하나를 끌어낸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이전의 시기와는 다른 특성을 가진다. 어떤 폐쇄적인 인간의 자의식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 철학 및 근대 학문은 지난 세기에 들어 이전에 성취했던 인간에 대한 여러 통찰들에 대한 자신감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여건에 처하게 된다. 전쟁으로 점철된 20세기는 분명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홀로코스트'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학살의 기억은 인간을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어떤 것으로 기억하게 한다. 우리는 어떤 부정성을 통해서 규정될 뿐이며, 오로지 이전에 구축되었던 일자적인, 다시 말해 일관적인 체계를 부정할 수 있을 뿐이다. 문학 역시 이런 흐름 속에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문학은 어떤 것을, 하나의 서사를 구축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학이 처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이 풀어내는 이야기는 결국 완전하게 하나가 될 수 없는, 다시 말해 비일관적인 부분들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할 수 밖에 없으며, 이시구로가 기대고 있는 이 어떤 말할 수 없는 정서 역시 이런 상황 속에서 구축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역시 이러한 정황 내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읽었던 두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소설은 이시구로의 장치인 어떤 말못할 위화감과 답답함이라는 측면에서 앞에서 이야기 한 두 작품과 유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의 작품들이 적어도 현실에 가깝게, 그리고 현실의 구조와 법칙 내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면, 이 작품 속에서는 모든 배치가 뒤틀려 시작과 나중, 나중과 시작이 뒤바뀌어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오직 한 가지는 어떤 악순환에 가까운 무한한 -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는 - 서사적 연속성일 뿐이다.
1. 불안.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 소설이 드러내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소설이 드러내는 불안은 시작부터 제시된다. 중요한 연주회를 앞두고 중부 유럽의 한 도시에 도착한 세계적인 연주자 라이더가 도착한다. 그러나 호텔 로비에서부터 그를 맞아주는 사람은 없다.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피아노 연주자로 이 도시 전체가 야심적으로 준비하는 어떤 행사에 초대된 인물이다. 당연히 무언가 이상한 일이다. 어쨌거나 소설의 화자인 라이더만이 이야기하는 그의 일정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시간적으로 또한 공간적으로 일정하게 소화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일정 관리를 담당하는 행사 관계자는 그저 사과만을 반복할 뿐이며, 그는 이상하게 짜여진 알 수 없는 일정을 쫓아갈 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상한 책임들이 자꾸만 더해진다. 구스타프를 비롯한 포터 무리들은 그에게 무언가 그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무언가 모호한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하며, 역시 구스타프의 상식을 벗어난 부탁으로 만나게 된 소피와 보리스는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에게 더해지는 책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이상하게 그의 앞에 나타나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그는 영국에서 자란 사람인데, 이곳은 중부 유럽의 어느 도시다)은 그의 방문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라이더의 불안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타자의 욕망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의 자리로, 그가 절대로 알 수 없는 어떤 결정불가능한 것의 위치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라깡에 따를 때, 욕망이란 언제나 타자의 욕망에 대한 투영이며, 그런 이유로 나의 욕망의 대상은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은 결코 분명하지 않다. 물론 불안의 대상은 '없지 않다'. 그러나 불안의 구조를 살필 때, 타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불안의 대상은, 따라서 불안의 이유는 모호해진다. 사람들은 그에게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그는 이 불안 속에서 어떤 강박적 증상을 드러낸다.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자신있게 실행하고자 했던 연설들을 할 수 없게되는 그의 모습에서, 갑작스럽게 말이 막혀버린 듯, 말을 잊어버린 듯 한 그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더 생각해 볼 수 있겠는가? 어떤 구원자의 형상으로, 주인의 형상으로 들어선 이 도시에서, 그는 하나의 대상이 되고, 도시가 계획하는 어떤 거대한 성공의, 그러나 실제로는, 실패의 장기말이 되고 있다(쉽게 말해 이용당하고 있다). 이 알 수 없는 불안 속에서 말이다. 그로부터 드러나는 것이 바로 도시를 구조짓고 있는 어떤 무한한 순환, 공간적인 그리고 시간적인 뒤틀림 혹은 왜곡일 것이다.
2. 악무한, 공간과 시간의 뒤틀림. 이어서 우리는 순환과 무한이라는, 전자에 의해 후자가 지배되는 그러한 문제에 가닿는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에셔라는 예술가의 작업이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화가의 작품들은 한결 같이 동일한 어떤 주제를 구상화한다. 무한이라는 주제, 그러나 순환을 통해서만 그려내지는 이 무한은, 공간의 그리고 공간의 연장으로서의 시간의 뒤틀림을 구현하는 것이기에, 공간에 불안을 일으키며 그런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 <위로...>라는 작품 속에서 어떤 유사한 순환을, 뒤틀림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1953년 작 <상대성>, 에셔
에셔의 작품이 표상하는 것, 무한을 통한 순환, 우리는 수학이나 과학에서도 그러한 예를 쉽게 발견한다. 사실 이 작품을 보면서 뫼비우스의 띠나 펜로즈 삼각형 등을 기억해 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인식의 구조인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세계의 구조에 관한 문제인가? 어쩌면 <위로...>가 드러내는 뒤틀린 구조를 단순히 개인적 인식의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일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쉬운 길일 것이다. 마치 모든 문제가 개인의 문제, 개인의 심리적 병증인 듯, 사회적 위계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모든 징후를 순치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자아 심리학(ego psychology)'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손쉬운 해결은 뒤틀린 공간에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한 설정을 강요할 뿐이다. 실제로 이 자아 심리학의 문제는 불안을 어떤 현실적인 병증으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안이 증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구조적인 것이라면?
만일 모든 이야기가 일종의 우화라는 것을, 현실(reality)에 대한 반영인 동시에 어떤 현실의 실재(the real)을 드러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시구로가 <위로...>라는 작품을 통해 풀어내는 이야기를 단순한 허구나 개인적 차원의 무의식 정도로 환원해 버리는 길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 소설이 말하는 공간들의 불가능해 보이는 연결, 그리고 당연히 가능해야 할 공간의 닫힘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우리 사회에서, 그것도 말로 구성된 상징계의 법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법의, 아니 사법체계의 왜곡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최근에 개봉된 <부러진 화살>이 그려내는 법정 다툼이나, 얼마전 법원의 정치적 판결로 인해 현재 투옥 중에 있는 정봉주 전 의원의 판례는 그런 예를 보여주고 있다. 법정에서 법이나 사법체계가 아니라 법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억압되는 정당한 의문제기, 검사나 경찰의 증거 및 증언의 인과관계를 뒤집는 왜곡은, 사회 내에 내재하는 뒤틀림 혹은 왜곡의 좋은 예시라 말할 수 있을 법하다. 구스타프의 포터 무리와의 회합 이후, 컨서트 홀로 향하는 길에 라이더가 만나게 되는 막힌 담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이 이름 없는 도시에서는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결코 연결될 수 없는 장소들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정작 열려 있어야 할 곳은 막혀있는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이게 과연 소설적 허구로 치부해버리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일까?
3. 위로. 마침내 위로라는 주제로 논의의 방향을 돌릴 때가 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위로라는 주제가 제시될 때, 물어야 할 것은 두 가지일 듯 하다. 먼저, 무엇을 위한 위로인가? 라이더의 불안을 놓고 보자면, 위로의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은 불안에 대한,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부터 오는 불안에 대한 위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도시가, 그리고 그 도시에 제 발로 걸어들어간 라이더가 필요로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어떤 곤란한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이다. 라이더와 구스타프, 소피와 보리스, 그리고 도시 전체의 문제는 결코 잠시 앉아서 마시는 커피 한잔이나, 케잌, 잠간의 휴식 같은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하지만 소설에서 등장하는 위로는 대부분 이런 것이다). 잠시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보류하고 다음 문제를 살펴보자.
다음 문제는 '위로가 정말로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문제는 앞의 질문을 검토할 때 말한 것처럼 '구원'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다시피, 라이더는 일종의 구원자의 형상이다. 그는 능력을 갖춘 주인으로(방문자라는 의미에서 손님이기는 하지만) , 이 도시의 문제를 해결할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인해 그 역시도 어떤 대상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시 사람들 자체가 그가 실행하고자 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방해하고 있으며, 도시가 그려내는 허구적 현실에 포섭되고 있다.
라이더가 묶고 있던 호텔의 지배인이자 행사 관리자 호프만의 행동이 이러한 문제를 단적으로 예시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한 우울증과 술에 빠져 살았으나, 과감히 술을 끊고 도시를 되살릴 음악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끌어내기 위해 분투하던 지휘자 브로즈키에게 다시 술을 권하고, 컨서트 홀로 향하던 그를 차로 치었으며, 브로즈키의 실패에 대한 사과의 변을 연습하던 호프만의 모습을 기억하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호프만은 도시 사람들, 즉 그들이 되살리고자 하는 도시의 '정신'을 위한 행사에 - 라이더를 방해함으로써 -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훼방을 놓는 도시 사람들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행태와 도시의 뒤틀린 공간이 드러내는 비정상적인 열림과 막힘의 구조는 과연 별개로 볼 수 있는 것인가. 도시 사람들이 모든 것이 왜곡된 도시 자체의 구성물은 아닐까. 브로즈키의 실패에 이은 소동 이후, 라이더가 목격하는 막이 내려간 무대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들, 텅빈 컨서트 홀에서, 일어난 것은 장소 그 자체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실패에 연이어 연회가 개최되고, 도시 사람들이 모여 어떤 '위로'를 구하는 장면이다. 라이더 역시 이러한 위로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도시를 떠나는 길에 잡아탄 도시 순환 전차는 위로를 제공할 법한 도시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커피와 롤빵을 갖추고 있으며, 라이더 역시 이 '소소한' 위로거리에 취해있기 때문이다. 책 번역자가 자신의 변을 통해 말하는 것처럼, 과연 그는 이 무한히 순환하는 전차에서 내릴 수 있을까?
4. 구원, 치료, 주체, 빠져나감의 이념.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이 소설에 대해 말해야만 할 것은 위로가 아니라 구원이며, 대상을 알 수 없는 불안의 치료다. 문제는 앞에서 말했듯, 불안은 증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안은 정서 혹은 정동이며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이다. 말하자면 이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억압할 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완전히 치료하거나 제거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럼에도 불안의 치료를 말하는 것은 불안이 욕망의 대상, 즉 실재에 대한 위치 변경을 통해 주체화를 유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소설이 그려내고 있는 왜곡된 상황 혹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위치 변경, 즉 빠져나감을 통해서 말이다.
소설 속에는 도시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뒤틀린 구조로부터 빠져나가는 용기를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 호텔 지배인 호프만의 아들 슈테판이 바로 그 인물인데, 그는 자식이 피아노 연주의 재능을 가졌으면 하는 부모의 기대에 스스로 부응하지 못함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책망에 빠져살던 인물이다. 하지만 라이더가 연주하기로 되어 있던 도시의 음악회에서 자신의 재능과 의지를 드러낸다. 문제는 슈테판의 부모가 여전히 아들을 못미더워하여 그의 연주를 외면해 버렸던 것. 결국 라이더의 조언과 자신의 재능을 믿고 용기를 낸 슈테판은 자신의 재능을 더욱 연마하고 펼쳐내기 위해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원했던 변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슈테판 한 사람 밖에는 없다. 문제는 도시의 정체와 뒤틀린 구조를 지속시키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결국 이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망상을 사랑했을 뿐'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말이다.
결국 이 위로를 말하지 않는 <위로...>라는 제목의 책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위로가 아닌 구원 또는 치료를 통한 주체화일 것이다. 소설적 허구를 통해 그려낸 디스토피아(distopia)로서의 현실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러가지 위로의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사회가 제공하는 오락과 휴식, 특히 십대 아이돌과 예능 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갖가지 눈요기 거리들, 뻔뻔스럽게도 '위로'라는 이름으로 청년들의 지갑을 터는 폐지의 가치 이상을 지니지 않는 책들, 그 이면에는 온갖 정치적 야합과 부패를 통해 결코 열리지 말아야 함에도 열려있는 길들과 건전한 사회에서라면 당연히 뚫려있어야 함에도 길을 막아 먼 길을 돌아가도록 만드는 높은 담들이 만들어내는 비상식적 구조가 놓여있지 않은가.(물론 그로 인해 가중되는 인간적 고통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쨌든 불안과 이 정동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증상들은 실재에 매우 가까이 있으며, 사회의 불안이 가중될수록 이 구조 내에 상존하는 '공백의 분출'의 가능성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이 거리의 좁혀짐에, 죽음 충동(death drive)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위해 행동하는 주체로서의 위치를 정립하는 것이다. 바로 이 뒤틀려 있지만 지식과 법이라는 이름의 정상성을 통해 상식으로 용인되고 있는 구조로부터 빠져나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만이 위로가 아닌 치료를,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치료를, 법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정의의 도래를 위한 정치를 위한 길이 아닐까.
- '불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웹진문지'에 실린 맹정현 선생의 글에 의지했음을 밝혀둔다. 훌륭한 글에 대한 어쭙잖은 이해로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