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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내세. 아직 여기 있지 않은, 그래서 앞으로 도래할, 또는 가게될 세계. 이 소설의 원제 The Sweet Hereafter에 쓰여진 hereafter라는 단어를 뜯어 보자면 '여기' 이후에 있을, 일종의 '피안'을 뜻한다. 현실은 언제나 인간에게 있어 고통과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두려움을 부과하는 것이기에, 내세에 대한 환상은 언제나 평온함과 영면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뉴욕 주 북부의 한 시골마을 셈덴트가 가진 이미지가 그런 것이다. 그리 많치 않은 인구가 여기저기 드문드문 흩어져 살아가는, 도시의 각박함이나 바쁜 일상과는 다른, 그 곳에 가면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맛볼 수 있을 듯한.
이런 목가적 풍경을 지닌 마을에 눈 내리던 어느 날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다. 사고에 대한 사실적 개요는 매우 간단하다. 잔혹할 정도로. 마을의 스쿨 버스 운전사가 윌모트 평원이라는 곳의 직선도로에서 사고를 냈고, 여러 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나, 정작 운전 기사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 잔혹한 사건에 대한 세 사람의 기억, 그리고 한 사람의 개입을 통해 진행된다. 문제는 사고를 낸 당사자인 버스 기사 돌로레스 드리스콜, 그리고 그 사고차를 따라서 운전하고 있던 학부모 빌리 안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아름다운 소녀' 니콜 버넬의 기억(아니 그들의 삶)은 그리 단순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기억-상념. 언제나 기억은 좋은 기억 보다는 나쁜 기억이 우선되는 법이다. 게다가 기억은 마치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날개를 펼치는 착각의 편린들로 점철된다. 마치 눈내리는 날 도로를 차창으로 도로를 내다보는 듯 어떤 희뿌연 전망.
마을의 스쿨 버스 회사에서 일하며, 아이들의 통학을 돕는 돌로레스 드리스콜이 여느 아침과 다름 없이 셈덴트의 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있던 그 날 아침도 뿌옇게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상념으로 인해 복잡하고 어딘가 불투명한 의식 속에서, 매일매일 마치 버릇과도 같이 해 오던 자신의 일을 반복하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도 그녀의 의식은 마을의 몰락해 가는 모습들에 대한 상념과 회한, 관계가 소원해져가는 아들에 대한 당황스러운 기억, 아이들 하나하나의 모습과 그들의 부모들에 대한 짧은 생각들, 운전 중에 만나게 되는 난폭한 운전자들(도시에서 온 고급 승용차 운전자, 그리고 과속을 일삼는 덤프트럭 등)에 대한 불평, 스케쥴을 맞추기 위해 천천히 그러나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상황, 그리고 길 위를 지나는 갈색 개. 그녀의 기억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개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의 통학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체 구간에서 유일하게 속도를 낼 수 있는(속도규정의 범위 내에서) 윌모트 평원의 직선 길에서 그녀는 길을 건너는 개를 만나고, 이 개를 피하려고 하는 순간 차가 전복된 것이다.
빌리 안셀은 상처한 이후, 적어도 아니들이 사고로 죽기 전까지, 쌍둥이 아이들을 키우던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을 위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고 있는 학부모이며, 무엇보다 사고가 터졌을 때 먼저 달려가 아이들을 구한 사람이다 - 물론 이것은 그가 사고 버스를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아내, 그것도 친구의 아내와의 외도, 습관성 음주(다른 이름으로 알콜 중독),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 참전의 트라우마. 어쨌든 그는 사고를 가장 정확히 목격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고의 순간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외도 상대인 리사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이 사고에 대한 사법적 개입의 과정에서 증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사건에 대한 법적인 개입이 시작된다. 미첼 스티븐스 역시 도시로부터 온 변호사들 중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듯 그는 다른 변호사들과는 다르다. 그를 추동하는 것은 소송에서 이겨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분노인 것이다. 그에게는 조이(Zoe)라는 딸이 있다. 그의 딸 조이는 마약 중독자인데, 여느 중독자들과 비슷하게 갖은 거짓말로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내 바로 마약을 구입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이름 Zoe는 그리스어의 생명을 뜻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는 바로 Zoe, 즉 그의 딸이자 삶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런 그에게 있어 삶을 살아갈 유일한 이유는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일, 즉 자신의 직업에 따라 tort suit(손해 배상 소송)를 진행하는 것이다. 배상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다. 그의 모토 그대로 '사고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외부적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우선, 이 사건의 잔인한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실체적 차원을 넘어서는 잔여가 존재한다. 법은, 특히 현실에 있어 사건에 대한 결과를 조정하는 실증법은, 그 과정에 있어서나 또는 결과에 있어 매우 실체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과정은 증거와 증언에 기초하며, 그 결과는 경제적 배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를 추동하는 분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종의 복수 그리고 그 복수에 따르는 보상심리, 즉 '징벌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일 것인데, 과연 이것을 정의로 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외부성과 구도 내에 있는 모든 사건 당사자들의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입에도 일정한 한계가 수반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스티븐스의 외부적 개입이 성립하기 위한 결정적인 증인 니콜 버넬의 기억과 거짓말을 통해 소설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돌로레스가 과속을 했다는 그녀의 법정에서의 거짓 진술은 스티븐스의 소송 진행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녀가 이런 거짓말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니콜은 말하자면 마을에서 꽤 인기있는 여자 아이다. 학교에서 공부도 곧 잘 하고 예쁜 아이인데다, 성격도 밝은 편이어서 안셀의 쌍둥이 등 여러 아이들의 베이비시터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비밀이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니콜이 커가면서 그녀에게서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근친상간의 비밀. 그녀의 거짓말은 바로 이런 상황과 관련된다. 그 거짓말은, [행위와 그 변천The Act and Its Vicissitudes]이라는 글에서 슬라보이 지젝(Slavoj Zizek)이 제시하는 해석을 따를 때, 무엇보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그녀의 몸짓이었다.
지젝은, 언제나와 같은 그의 장황하고 정신 사나운 말하기 방식을 따라, 이 글에서 니콜의 선택에 대해 이런 것이야말로 영속적인 유한성의 지속 혹은 악무한에 단절을 가하는 이중적 몸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 몸짓에서 지젝이 말하는 것과 같은 주체의 몸짓을 찾을 수 있을까? 지젝의 설명을 따르자면, 소송은 분명 그녀의 가족 - 가족의 머리는 언제나 가장이며,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는 예외있는 전체라는 향유의 구조 내에서 모든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가 된다 - 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게 되는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정의를 실현 할 수 없는 법률의 집행으로부터 (그리고 따라서 지역의 사회적 구조로부터), 니콜은 스스로를 분리해낸다. 그 결과, 이 두 유한성의 연결에서 스스로를 단절한, 지젝의 해석에 따르자면, 니콜만이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행위적 주체의 형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는 과연 어떤 주체일까? 그녀는 어쩌면 정말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벗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역 사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녀가 소송을 막기 위해(혹은 그저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전복적 몸짓으로) 선택한 거짓말은 그녀를 일종의 영웅으로 만들어 낸다. 소송과 그에 이은 미디어라는 이름의 게걸스러운 대머리 독수리들로부터 지역 사회를 보호한 영웅.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타나는 자동차 경기장의 장면에서 그녀가 받았던 박수와 환호의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게다가 보기에 따라서 그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위치의 역전을 보이는 듯 하기도 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근친상간이라는 금기의 문제에서 금기를 범한 아버지는 (자신과 니콜 사이에만 머물러야 할 추악한 비밀로 인해) 오히려 향유 관계의 (폐기가 아닌) 역전을 통해 니콜에게 구속되는 듯 한 뉘앙스가 보인다. 이것은 라깡의 주체의 네 담론 중 주인 담론에서 히스테리 담론의 이전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하자면 주인과 노예만이 바뀔 뿐, 여전히 지배의 구조는 남아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니콜은 진정한 변화와 구원의 주체라기 보다는 그저 모호한 또는 몽매주의적 주체(obscurantist subject)일 뿐이다.
돌로레스는 이 모든 과정에서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한 안도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녀는 오히려 극도의 불안의 상황에 처한다.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던 동네 사람들은 그녀와 그녀가 마치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결정해 주는 듯이 여기는 일종의 대타자로서의 남편 애벗이 거기에 없는 사람인 듯 취급한다. 마치 그녀의 삶을 상징하는 듯한 '덜컹이'는 어렵게 어렵게 서로를 부수는 자동차 경기장 안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승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차 '덜컹이'가 여러 차들에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철저한 고독을, 처절한 유한성을, 누구도 그녀와 함께 할 수도 없고, 심지어 함께 그 자리에 있던 애벗 마저도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는 일종의 안도감을 표현한다. 모호한 혹은 몽매주의적 행동의 주체 니콜의 거짓말로 인해 자신이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한 편의 구원 서사를 목격하게 된다. 이러한 구원이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아들의 철저한 고독, 자신의 단독자로서의 상황에 대한 처절한 깨달음과 단말마적 비명, 그리고 그 단독자의 죽음과 이후의 부활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이러한 구원 서사를 신약 성서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그리고 모든 것을 잃고 친구들에게서 마저도 비난을 받으며 신을 호출하는(또는 신의 구원을 부르짖는) 구약 성서의 욥에게서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 내에서 이러한 구도 속에 놓이는 단독자의 이름이 바로 돌로레스(Dolores)[슬픔]라는 것이다. 그러한 철저한 홀로 있음의 경험과 자기 파괴(그녀가 몰던 GMC 자동차 '덜컹이'의 파괴로 재현되는)의 순간에 그녀는 일종의 자기 구원, 안도감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은 어떤 것일까? 이제 모든 고통이 지나갔으니, 그 고통의 깊이에서 그것이 지나간 이후에 찾아오는 일상적 평온함을 통해 일종의 상승으로 작용하는 그런 형식의 안도감. 이런 의미의 안도감의 이름을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카타르시스 혹은 승화. 그는 [시학]에 제시된 비극론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어쨌든 이런 수동적 형태의 구원도 우리는 구원이라 할 수 있을 터이고, 나름의 안도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닌 다른 형식의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그녀가 얻게 되는 깨달음은 그녀에게 더 이상 의지할 상징 체계 혹은 대타자의 지배 구조의 폐기를, 남편 애벗도 결국은 자신과 동등한 지위로 끌어내리는 작용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평등한 주체, 지배의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주체의 가능성을 찾게 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보고, 이후의 삶에서 진정한 주체로서 거듭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적 장소로서 제시될 뿐이다. 이러한 삶의 카타르시스적 극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시 평온한 자신의 기억-상념 속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자신으로 돌아가게 되는 길일 뿐이다. 이러한 길은 진정한 구원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름 돌로레스(Dolores)가 함의하는 비탄 혹은 그에서 기인하는 카타르시스의 영속적인 순환의 영역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그러한 길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 '달콤한 내세'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한 영원회귀적 기억-상념의 달콤함은 단순한 허구적 현실의 영역에만 귀속되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거의 좋았던 기억이, 과거의 기억의 정치가 팽배하고, 사회적 안정과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일상의 평온함 속에 정의에 대한 요구를 묻어버리는 현실에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결코 진정한 행위의 주체를 찾을 수 없다. 오직 관습과 윤리에 순응하며, 자신의 생존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동물적 자동성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오늘날 어디에서 이런 영원회귀 혹은 악무한을 절단하는 주체를, 진정한 구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주
1. 문제는 이 개의 존재 마저도 어떤 막연한 상상 혹은 기억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고가 나던 지점에 정말로 그 개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한다.
2. 데리다(Derrida)는 법/정의의 관계에서 오는 역설을 말한다. 데리다의 논리를 따를 때, 정의는 법의 집행을 담보하는 어떤 것이다. 그에 반해 법은 어떤 해체가능한(deconstructible) 문자의 체계이지만, 반면 정의는 법과는 달리 해체불가능한 잔여물(indeconstructible remains)이지만, 법을 통하지 않고는 구현될 수 없는 역설이 성립된다. 스티븐스의 분노와 징벌적 정의의 유혹은 법정에서 구현되는 경제적 거래관계를 담보하겠지만, 진정한 정의는 이를 초과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가진다. 무엇보다 이 사건은 사건에 책임을 질 법적 주체의 문제에 있어서도 너무나 모호하기만 하다. 법적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증거 보다는 증인의 증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특성도 또한 그 한계를 더욱 좁히고 있다.
3. 라깡의 네 주체에 관한 담론을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 담론. 이것은 지배의 구조가 분명한 일반적 향유를 말한다. 말하자면 주인 A가 노예 B를 지배한다. 두 번째로 히스테리 담론. 이것은 주인 A와 노예B의 향유 관계의 역전을 말한다. 세번째로 대학 담론. 이것은 대학에서와 같이 주인도 노예도 없는 상황을 가정한다. 주인 기표의 자리는 비어있으나 여전히 지식이 대타자의 구조로서 작동한다. 네번째로 분석가 담론. 분석자와 피분석자는 처음에는 일종의 지배구조에 편입된다. 피분석자는 분석자에게 마치 고해를 하듯 자신의 모든 것을 고찰의 대상으로 제시해야 하며, 이런 절차에서 언제나 그렇듯 분석자에게서 일종의 대타자를 찾는다. 그러나 이 담론의 끝은 분석자가 바로 그 대타자의 지위에서 내려와 분석자와 동일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피분석자가 의지할 대상은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 의지할 대상임을 깨닫는데서 종결된다. 니콜이 이러한 주체적 담론의 구도에 들어간다면 주인 담론의 노예로부터 히스테리 담론의 노예(또는 주인)으로의 전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4. 무엇보다 니콜이 사건에 대한 외부적 개입을 차단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듯이 보인다. 앞의 주석에서 이야기 한 그대로 스티븐스의 분노에 찬 징벌적 정의 그리고 법을 통한 법적 정의는 그 자체로 한계를 가지며, 결코 정의 그 자체를 끌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티븐스의 개입의 노력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지역 사회 내의 통학 버스 운행 방식이나, 버스 통행로 개선 등과 같은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이에 대해 테드 제닝스(Ted Jennings)는 그의 책 데리다를 읽다/바울을 생각하다[Reading Derrida/Thinking Paul] 2장에서 데리다의 사유가 단순히 법/정의의 대립항에서만 머무르지 않으며, 정의/법/법률(또는 법체계, laws)의 삼항적 사유를 제시했음을 말한다. 이런 도식에서 법 자체는 정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법률 혹은 실체적 법을 초과하는, 법 위의 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스티븐스가 행한 개입의 노력은 정의 그 자체를 포착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미치려는 법 바깥의 법, 또는 법 위의 법, 또는 법에 맞서는 법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니콜이 자신의 복잡한 상황(아버지의 근친상간의 기억-상념, 자신이 반신불수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절망, 죽은 아이들에 대한 기억 등 그녀의 상황의 모든 원소를 포함하는)으로 인해 선택했던 거짓말은 바로 이런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5. 이 소설에서 우리는 두 명의 등장 인물에게서 (라깡적 의미에서의) 어떤 지배 구조 혹은 대타자적 향유의 구조를 발견하게 된다 - 니콜-아버지 그리고 돌로레스-애벗(그녀의 불구자 남편). 니콜-아버지의 지배 관계는 쉽게 눈에 띄는 형식이다. 아버지는 전체 중 하나의 예외로서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향유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이 사건을 계기로 뒤집어진 주인-노예의 구조에 들어가게 된다.
돌로레스-애벗의 관계는 어찌 보면 전체적인 줄거리에서 약간은 부차적일 수도 있으며 잘 눈에 띄지 않는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비록 그녀의 남편 애벗이 불구의 몸이긴 하지만, 돌로레스의 삶에 있어 애벗은 가장 현명하고, 그녀의 삶에 의미를 주고, 그를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결정도 할 수 없으리만치 그녀에게 있어 남편은 중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철저한 단독자적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의 남편을 포함한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모종의 지배 구조에서 벗어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소설의 결론부의 해석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6. 슬픔 또는 비통함을 의미하는 이름. 예수의 수난을 기리는 보다 직접적인 종교적 의미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근원적인 어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비탄을 금지 못하는 성모의 슬픔과 연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