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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평점 :
행복의 정복
(The Conquest of Happiness)
나는 행복의 정복이란 이 책의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행복이라는 포지티브한 추상명사와 정복이라는 다소 네거티브한 정복이라는 명사의 조합이 좀 어색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렇게 어색한 제목을 가진 책들은 번역가가 제목을 의역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원제는 'The Conquest of Happiness'이다.
즉 행복의 정복이 정확하게 맞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책의 제목인 '행복의 정복'을 어색하게 생각했을까?
행복은 정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아니면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였을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행복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저자 버트런드 러셀은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명망있는 철학자이다.
행복의 정복은 1930년에 쓰여진 책인데, 반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통찰이 돋보인다. 명저라고 생각된다.
이 책의 구성은 심플하다.
1. 행복이 당신 곁을 떠난 이유
2. 행복으로 가는 길
목차만으로도 확인 할 수 있듯이 러셀은 이 책의 전반부에서 사람들이 왜 행복하지 못한지를 밝히고 후반부에 가서 행복으로 가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전반부의 행복하지 못한 이유들에 대한 다양한 통찰은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던 반면,
후반부의 행복을 정복하는 방법들에는 적극적으로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문제점을 알면 그에 따른 해결책은 각자의 성향대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생각할 만한 화두를 많이 던져준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외에도 많은 저작물을 남겼는데 '서양철학사'를 비롯한 러셀의 다른 책들에도 관심이 간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씩 읽어보고 싶다.
본문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이 글에서는 문명국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마다 겪고 있는 일상적인 불행에 대해 다룰 것이다. 즉 분명한 외적요인이 없으니 달아날 길이 없는 것 같고, 달아날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참아내기 힘든 불행을 치유할 방법을 제시하는 데 이글의 목적이 있다. 이런 불행은 대부분 세계에 대한 그룻된 견해, 잘못된 윤리와 생활습관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요인들은 인간이나 짐승이 누리는 행복이 근본적으로 의존하기 마련인 자연스런 열정과 굑구를 짓뭉갠다. 이런 불행은 개인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 나는 보통의 운으로도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몇가지 변화의 방법을 제안할 작정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심리학적으로는 정신병자와 다를 게 없었지만 꿈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꿈을 실현할 때마다 점점 꿈의 범위를 넓혀갔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꿈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었다. 이름난 정복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정복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 그는 신이 되기로 결심했다.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술에 젖어 지내고, 난폭하게 화를 내고, 여자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 본성을 이루는 다른 여러 요소들을 희생해 한가지 요소만을 개발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는 없다. 또한 자신의 엄청난 자만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온 세상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해서 근본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요즘에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간 불행한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절마의 늪에 빠져 어떤 만족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고통을 잊으려고 기분전화만을 추구한다. 이런 사람은 '쾌락'의 광신자가 된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줄여서라도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려고 한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하는 것은 일시적인 자살이나 다름없다. 술에 취해서 누리는 행복은 불행을 잠시 중단시키는 데서 오는 순간적이고 소극적인 행복이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생존을 위한 경쟁이란 말은 실제로는 성공을 위한 경쟁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경쟁을 하면서 내일 아침을 먹지못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을 뛰어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들은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쳇바퀴에 갇혀 있는 신세가 아니다. 그들이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쳇바퀴가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쟁은 지나치게 냉혹하고 집요하며, 필요이상으로 근육을 혹사시키고 의지 또한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도록 만든다. 이런 경쟁이 삶의 근본 철학이 될 수 있는 시기는 기껏해야 한두 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경쟁은 신경의 피로를 초래하고, 여러가지 도피현상을 일으키며, 쾌락 추구를 사업만큼이나 긴장되고 어려운 일로 만들어버려(휴식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마침내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못해 재고가 바닥나는 지역에 도달할 것이다.
질투는 평범한 이간 본성이 가진 여러가지 특징 중에서 가장 불행한 것이다. 질투가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을 안기고 싶어하고, 또 처벌을 받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때는 반드시 행동으로 옮긴다. 그리고 질투하는 자신 역시 불행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대신,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워한다. 그는 가능하다면 다른사람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장점,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그들의 장점을 빼앗는다.
질투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여러가지 불행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다. 자신의 눈앞에서 형제나 누이가 더 귀여움받는 것을 목격한 어린아이는 질투하는 버릇이 몸에 배게 된다. 이런 아이가 사회로 나오게 되면 자기가 희생양이 되는 불공평한 대우에 눈을 치켜뜨게 되고,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기면 당장 알아차리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상상함다. 이런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자신이 경멸당한다고 상상하지 않도록 친구들이 항상 조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귀찮은 존재가 된다. 이런 사람은 처음에는 아무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다고 생각할 뿐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이러한 생각을 사실로 만들어 버린다.
현대는 특별히 질투가 만연해 있는 시대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가난한 나라는 부유한 나라를, 여자는 남자를, 정숙한 여자는 정숙하지 않으면서도 처벌받지 않는 여자를 질투한다. 질투가 다른 계급과 민족, 다른 성간의 정의를 이룩하는 주요한 원동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질투의 결과로 빚어진 정의는 자칫하면 최악의 것, 즉 불행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증가시키기보다 오히려 행복한 사람들의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는 정의가 되기 쉽다.
그러나 아주 이른 시기부터, 자녀에 대해 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감정과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욕구 사이에서 갈들이 일어난다. 부모가 자녀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느정도까지는 자연적 필요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지만, 자녀는 되도록이면 빨리, 되도록 여러가지 방법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부모의 권력욕은 이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갈등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폭군 행세를 계속하다가 자녀들에게 반발을 사는 부모도 있고, 이러한 갈들을 의식하고 자신이 이렇게 모순된 감정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부모도 있다. 이러한 갈등을 겪은 순간 부모는 자녀를 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온간 정성을 다해 키운 자식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보는 순간, 부모의 마음속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솟구친다.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복은 마치 무르익은 과실처럼 운 좋게 저절로 입안으로 굴러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세상은 피할 수 있는 불행, 피할 수 없는 불행, 병, 정신적 갈등, 투쟁, 가난 그리고 악의로 가측 차 있다. 이런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개개인을 둘러싸고 있는 엄청나게 많은 불행의 원인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