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나긴 이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52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제게 책이란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어떤 책은 빨리 읽고 싶고, 어떤 책은 잘 읽히지 않고, 어떤 책은 페이지를 넘기는 게 아까워서 아껴 읽고 싶어요.
오늘의 책은 세 번째 경우의 책입니다. 빨리 읽는 것이 아까워서 좀 미루고 있던 책이죠.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입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미국의 추리 소설 작가인데요. 하드 보일드 탐정 소설로 유명합니다.
하드 보일드는 ‘완숙한 달걀’이라는 뜻이며, 불필요한 수식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사실을 표현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스콧 피츠 제럴드가 하드 보일드한 글로 잘 알려져 있죠. 챈들러가 하드 보일드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많은 작가들이 챈들러와 그가 창조한 캐릭터를 사랑합니다.
‘기나긴 이별’은 1939년 출간한 챈들러의 소설 ‘빅 슬립’에서부터 등장한 탐정 ‘필립 말로’의 마지막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는 젊고 에너지 넘치던 20대 청년이 40대 중년에 이르기까지를 지켜보며 읽을 수 있죠.
작가 본인도 ‘기나긴 이별’을 자신의 최고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작가 스스로가 이렇게 말을 할 정도이니 그의 팬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소설이죠.
제목에서 풍겨지는 인상도 그렇고, 작품 전체적인 분위기가 잿빛입니다.
비열한 거리에서의 한 남자. 그가 사회와 인간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람과 인생을 꿰뚫는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소설에 저의 이상형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탐정 필립 말로는 미치게 멋져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소설 속 탐정들은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 났어요. 수학 공식을 푸는 사람처럼 척척 문제를 해결하죠.
하지만 필립 말로는 너무나 평범해요. ‘기나긴 이별’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전 허가받은 사립탐정이고 그 일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외로운 늑대인 셈이죠. 미혼에 중년이고 부자도 아니지요. 감옥에 한 번 이상 갔다 와봤고 이혼 사건은 맡지 않습니다. 술과 여자와 체스, 그리고 그 밖에 몇 가지 것들을 좋아하죠. 경찰들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친하게 지내는 경찰도 두엇 있습니다. 본토박이로 샌타로사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돌아가셨으며 형제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내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얻어맞고 쓰러진다고 해도 인생 끝난 듯이 충격받을 사람들은 없죠. 그런 일이야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고 요새는 어떤 일을 하든지 또는 아무 일도 안 해도 많은 이들이 당할 수 있는 일이니.”
필립 말로는 특별할 것 없는 대사들을 하지만, 저에게는 모두 명대사로 들립니다. 작가가 창조한 캐릭터이지만 완벽하지 않은 언행을 보이기에 진짜 살아있는 인간 같아요.
범죄자 몇 잡아봤자 크게 변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는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합니다. 산을 왜 오르냐는 질문에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고 답한 등반가처럼, 사건이 있으니까 해결을 합니다.
그 어떤 방해와 핍박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착한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저 공동체를 위해 할 일을 할 뿐... 그는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며 으스대지도 않아요. 오직 초지일관.
좀 유연하게 살아도 될 것 같은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기며 넘어가도 될 것인데, 용납하지 않습니다.
말투는 시니컬하고, 눈빛은 냉소적, 그러나 비정한 겉모습 뒤에는 불의를 외면하지 않는 따스함이 스며 있죠.
이 모습에서 다양한 캐릭터들이 떠오르지 않으세요?
저는 ‘베트맨’이 떠오르고요. 한국에서는 ‘비밀의 숲’의 김시목 검사(조승우)가 떠올라요.
아무튼 필립 말로의 모습은 어떤 남자가 멋진 남자인지, 사람은 어떻게 나이 들어야 추하지 않는지를 보여줍니다.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길어지는데요. 그만큼 인물이 매력적이란 말씀!
간략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사설탐정 필립 말로는 고급 클럽 <댄서스> 앞에서 억만장자의 딸과 결혼한 독특한 매력의 남자 테리 레녹스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레녹스를 말로가 집에 데려다 재워 준 인연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된다. 넘쳐나는 부에 둘러싸여 지내면서도 어딘지 어두운 일면이 엿보이던 레녹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레녹스는 장전된 권총을 들고 다급하게 말로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그는 간밤 자신의 아내가 누군가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고 말하며, 말로에게 한 가지 도움을 요청하는데…….
필립 말로는 친구의 도피를 도와주고, 그의 아내가 죽은 사건에 휘말립니다. 친구는 자살을 했고요. 죽은 여자의 아버지는 사건을 덮으려 합니다. 그즈음 베스트셀러 작가를 도와 달라는 의뢰가 들어오고, 작가의 부인은 매력적인 외모로 유혹을 합니다. 그런데 작가가 죽고, 필립 말로는 범인으로 몰려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인물들이 소설의 후반부로 갈 수록 퍼즐처럼 척척 맞물립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로운 소설이죠.
그런데 ‘기나긴 이별’을 단순한 추리소설로 부르기는 아쉬워요. 이 속에 담긴 인간의 본능과 욕망 사회에 대한 진실이 큰 깨달음을 주거든요.
고전이지만 현대에도 상징하는 의미나 표현의 센스가 전혀 떨어지지 않는, 배울 점 많은 소설입니다.
‘기나긴 이별’에 애착이 가는 또 하나의 이유는, 소설을 쓸 당시 레이먼드 챈들러의 아내가 죽어가고 있었다는 배경 때문입니다.
작가로 성공하기 전의 챈들러는 스캔들 때문에 직장에서도 해고 당하고 좌절과 생활고에 찌들어서 살았어요.
그를 용서하고 붙들어준 사람은 18세 연상의 아내 시시 챈들러였어요. 챈들러는 아내의 격려와 지원 덕분에 작가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폐섬유증으로 투병을 해요. 1953년에 기나긴 이별을 발표하자, 다음해 챈들러는 아내와의 기나긴 이별을 합니다.
이후 챈들러는 술에 빠지고 방황합니다. 5년 뒤 필립 말로가 등장하는 미완성작 ‘푸들 스프링스’를 남기고 챈들러도 아내의 뒤를 따릅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소설 같은 사랑 이야기입니다.
기나긴 이별을 읽으며 챈들러가 글을 쓰는 상황을 떠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창작의 시간은 고통을 잊게 해주는 진통제였을것입니다. 또한 그는 아내가 죽기 전에 인생 최고작을 완성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을것입니다.
작가는 고통의 시간을 거닐었지만 그때 최고의 작품이 탄생 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나요?
우리가 지금 좌절과 고통에 빠져 있어도, 이 시기가 언젠가는 희망과 감동을 전하는 열매가 될 수 있잖아요.
이렇게라도 생각을 해야지 이 비열한 거리에서 우리도 버틸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며 기나긴 이별과의 이별을 준비 했습니다.
기나긴 이별이 저에게 준 화두가 또 있는데요. 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무엇과 이별했을까?”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이별이 등장해요. 어떤 이는 사랑하는사람과 육신의 이별을 하고, 어떤 이는 스스로 세상과 이별을 해요.
어떤 이는 정의롭고 열정적이던 근사한 자신과 이별하고, 추한 속세에 물들어 버렸죠. (얼굴은 젊어 보이지만 머리는 하얗게 센 테디 레녹스가 그런 인물)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이미 죽어 놓고 죽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시체 같던 인생과 이별합니다.
이런 이별에는 유효기간이 없어요. 어떤 이별은 평생에 걸쳐서 아주 긴 시간이 걸려요.
저도 예전의 자신과 이별을 했어요.
사회에 나오니 배운 것과 현실의 괴리감이 무척 컸어요. 권성징악은 소설에나 등장하는 이야기 같았어요.
좌절이 익숙해지고 포기가 빨라졌어요. 주체성을 잃고 휩쓸려 살다보니 언젠가부터 오늘의 나를 싫어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슬프고 아파요.
“여러분은 무엇과 이별했습니까?”
너무 늦지 않았다면, 붙잡을 수 있는 시기라면.. 이별하지 않고 지키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기나긴 이별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들을 했네요. 기나긴 이별을 읽으며~ 참 많은 생각들을 했네요. 인생이란게 참 재밌지만 울적하기도 해요. 갑자기 김렛 칵테일을 마시고 싶네요.(이 소설에도 등장하는)
이만, 이 서평도 여기서 굿- 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