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 / 창비 / 2008년 6월
평점 :
『심지어 엄마 아빠가 숨바꼭질하듯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엄마 아빠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마을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두 마음은 서로를 몰랐다. 부모를 잃었다는 절망감과 엄마 아빠가 어디선가 나타날 거라는 희망이 공존했다. 마음이 잠시도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그럴 때면 너풀거리는 치마를 입고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가 늘 거리를 떠도는 이유가 이해되었다. -p33 』
누군가를 잃는 다는 것은 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과 혼란을 가져온다. 더구나 그 존재의 상실감이 미처 자아가 채 성숙되기도 전에 느끼게 되는 거라면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을 일인 것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라지만 하루아침에 부모를 모두 잃은 어린 소녀 니은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내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이 생애 자신의 존재감을 부여해준 목숨과도 같은 부모를 잃고 다시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어린 소녀에게 얼마나 혹독한 일인가.
『아침마다 세상이 낯설었다. 날마다 사물들을 새로 익히고 양치질하는 방법을 새로 배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선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날마다 애썼다. 전날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때가 많았다. 전날 뒷산에 두고 온 영혼이 몸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문밖에서 서성이는 듯했다. 방파제나 매립지에 앉아 있던 나도 내가 아니었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낯선 공간, 처음 보는 세상이 있었다. -p41』
아침에 두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어제와 다름없이 또 하루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음에 감사해야 한다. 어제의 나로 오늘을 살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지만 만약 다름없이 지나온 삶의 순간에 찾아온 생소한 자리를 만나게 된다면 어떠할까. 낯선 장소, 낯선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더라도 나를 따스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이 또한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니은은 아빠의 고향 처용포에서 장포수 할아버지와 왕고래집 할머니를 만나게 되면서 두 분이 살아온 지난날의 이야기를 통해 이제껏 보고 듣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모두 어딘가에서 홀로, 타인이나 세상과 동떨어진 채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실감되었다. 자기 안에 고스란히 갇혀 잠든 사람이나, 잠들지 못한 채 깨어있는 사람이나. 그런 때면 사람들이 외롭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는지, 서로 적대적이기 때문에 저마다 외로운지 궁금했다. -p122』
사람들은 본래 외로운 존재라고 한다. 나 또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고 가듯 고질병처럼 외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친구들에게 푸념을 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위안을 얻고자 하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휑한 마음은 자석처럼 따라다니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이러한 감정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보란 듯이 아무것도 아닌 냥 치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더 힘겨워지기도 한다. 아직도 미성숙한 자아를 가진 인간인 채로, 나도 나로써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허나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모두가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거였다.
『여전히 벽에 기대앉은 채 나는 잃은 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예전에 탔던 노란 자전거가 몹시 그리울 때, 어린 시절 곰 인형을 다시 안고 싶을 때, 작년에 내린 눈을 다시 한 번 만지고 싶을 때, 그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마다 누군가 가슴을 한 삽씩 퍼가도록 내버려둬야 하는지. -p138 』
모두가 다른 아픔을 안고 있었다. 치유해야 할 상처, 그리움의 존재, 토닥여주고 싶은 것들이 가리워진 채 있을 뿐이었다. 고래잡이로 최고의 나날을 보냈던 장포수 할아버지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딸을 고이 키워온 왕고래할머니, 두 부모를 잃은 채 자괴감에 빠진 어린 니은이까지 모두가 다른 아픔 속에 슬픔에 겨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다시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재발견을 해나가고 있고 세상을 향해 한발자국씩 내딛고 있었다.
『내 속의 압력밥솥도 그대로 있었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던 압력밥솥이 다시 수증기를 뿜기 시작했다. 수증기는 날로 거세어져 위험을 경고하듯 딸랑딸랑 쇠붙이가 울렸다. 그동안 경험한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고 있었다. 마비된 듯 앉아 있다가 경황없이 떠돌고,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가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느낌과 머릿속에 쥐가 사는 듯 두통도 이어졌다.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모든 게 괜찮은 듯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널을 뛰었고, 한 두 시간 만에 그 모든 감정들을 롤러코스터처럼 타고 오르내렸다. -p207 』
이전에 김형경님의 심리 에세이‘사람풍경’을 읽은 적이 있다. 모두가 공감하는 우리들의 내면을 세밀하게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는 그녀만의 시각이 이번 신작 소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한 소녀가 겪은 상실감에 대한 치유의 과정을 그녀 주변에 있는 이들과의 교류와 관계를 통해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십대의 성장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큰 갈등과 혼란에 빠진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그녀만의 눈높이가 참 좋다.
『내가 지금 두렵고 답답하다면 처음 혼자 서는 순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처음은 거듭 찾아올 것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일들을 잘 맞을 준비를 하기로, 몸속에 작살을 꽂고 다니는 백사십살 먹은 고래한테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래도 괜찮을 것이다. -p247』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다. 이전에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어른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 당연히 어른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내가 되고 네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의 착각이었을 뿐, 진실로 성숙한 어른으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은 쉽지 않은 것이다. 지나간 일은 담담하도록 홀연히 떠나보내고 마음으로 기억하는 일마저도. 모두가 언젠가는 겪게 될 상실, 이는 인간관계를 막론하고 현실의 모든 사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광대한 우주, 인간의 삼라만상을 통틀어서 모두가 한번쯤은 겪게 될 상처, 치유, 성숙의 과정을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제 어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이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이를 먹고 몸이 커지고, 고래 배를 타거나 시집을 가는 것 말고, 엄살, 변명, 핑계, 원망 하지 않는 것 말고 중요한 것이 그것 같았다. 자기 삶에 대한 밑그림이나 이미지를 갖는 것. 그것이 쨍쨍한 황톳길을 땀 흘리며 걷는 일이든, 미끄러지는 바위를 한사코 굴려 올리는 일이든, 푸른 하늘에 닿기 위해 발돋움하는 영상이든.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p256』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니은의 마음을 결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홀로 서야 한다. 현실은 더 이상 어제로 돌아갈 수 없는 진행형이기에 다시금 힘을 내고 꿋꿋하게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그런 면에서 니은에게 나는 애처롭지만 마음껏 힘내라고 토닥여주고 싶다. 떠나보내고 기억하고 가슴에 안고 묵묵히 일어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