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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던지고 싶다
이명랑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8년 11월
평점 :
절판
『여자는 남자 때문에 불행해지는지도 모른다. 엄마도 아빠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고운 옷을 입고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연희네 경진이네 엄마도 둘째 마누라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사는 일은 안 생겼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빠에게서 나는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검은 구름 같은 것을 본다. 어쩌면 나도 저 검은 구름 속에 갇혀 검은 구름이 몰고 올 굵은 불행에 온몸을 다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 p120』
하루 벌이를 위해 추위와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 그들의 피와 땀이 어린 삶의 장소가 바로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영등포 시장 뒷골목이다.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량의 성장기적인 체험과 더불어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주변 인물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단 두 가지다. 양면 오리털 잠바만을 걸치고 바지도 팬티도 입지 않은 채로 길바닥에 누워 있던 남자, 또 하나는 사과 괘짝의 토막들을 자르고 다듬어 내게 책상을 만들어 주었던 남자다. 이 두 남자는 같은 사람일까? 가끔 나는 그 두 사람이 사실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한 남자는 쫓아 버리고 싶고 기억하기도 싫은 부끄러운 사람이고 도 한 남자는 일기장 갈피마다 곱게 접어 넣고 밤마다 몰래 꺼내 보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그 두 명의 남자 중 어떤 남자를 내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결국 먼 훗날까지 내가 나의 아버지로 기억하게 될 사람은 그 둘 중 누구일까? -p262』
이량의 아버지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고 탈출을 시도하다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이후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점차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수치스럽고 숨기고 싶은 존재인 동시에 한없이 안타깝고 가엾은 동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 있고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지만 식당일을 하며 한 가정의 생계를 떠맡고 있는 어머니는 오로지 여자는 시집한번 잘 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말을 하기 일쑤다. 아버지의 오랜 병수발과 여자의 몸으로 혼자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그녀가 그간 얼마나 힘든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왔는지는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이희선을 통해 소위 소녀들에게는 금지사항인 빨간 책을 접하게 되고 이후 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성장기 소녀에게 있어 이런 가슴 뛰는 놀라운 경험은 이후 둘도 없는 친구 경진과의 동성애로 발전되고 점차 성에 눈을 뜨게 된다. 또한 정육점 주인의 처남에게 평소 수학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찾아가지만 이는 반강제에 의한 성폭행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의도와 거리가 먼 타인에 의한 충격적인 성경험은 오히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고 성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꼴이 된다.
『나는 시장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 나도 그들처럼 남모르는 비밀 한 가지씩 품게 되었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냥 그대로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아빠처럼 말이다. 한번 잘못된 인생을 가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는 거겠지. 나도 술을 마시게 될까? 술을 마시면 다 잊혀 질까? 경진이 보고 싶다. 그렇게 매몰차게 경진을 내 마음 속에서 내쫓지 말아야 했다.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결국은 나도 내가 경멸해 마지않는 어른들과 똑같은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p225』
성장기 소녀인 이량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그야말로 타이어 빠진 자동차와 같다. 이상적인 꿈과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잃은 채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이 어린 소녀의 눈에는 얼마나 처량하고 안타깝게 느껴졌을까. 우리는 한낱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타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인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경계선을 뛰어 넘어 나보다 타인의 삶을 저울질하고 타인이 받게 될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는 친구와의 이별, 폭력과 불륜, 계부에 의한 성폭행, 청소년기에 경험한 성과 본드 흡입으로 인한 구치소 수감까지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한다. 그녀가 보고 자란 대부분의 여성들은 계부로 인해 혹은 남편으로 인해 성적인 놀림감 내지는 희생 제물인 셈이다. 사춘기 소녀가 성과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기에는 이 모든 게 한낱 어두운 그림자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인으로써의 삶의 활개를 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자신의 삶에 의지를 굳건히 했을지도 모른다.
활기에 가득찬 재래시장, 그 한복판에서는 누군가로 인한 상처와 아픔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이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소위 모범생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주인공 이량이 성장하기에 이 소설의 배경인 영등포 시장 골목은 빈민층의 삶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들과 달리 그들의 삶은 왁자지껄 비록 시끄러울지라도 소위 한 가족과 같으니 이들의 모습 속에서 이량은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