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던지고 싶다
이명랑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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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자는 남자 때문에 불행해지는지도 모른다. 엄마도 아빠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고운 옷을 입고 사모님 소리 들어가며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연희네 경진이네 엄마도 둘째 마누라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사는 일은 안 생겼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아빠에게서 나는 여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검은 구름 같은 것을 본다. 어쩌면 나도 저 검은 구름 속에 갇혀 검은 구름이 몰고 올 굵은 불행에 온몸을 다 내놓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 p120』


하루 벌이를 위해 추위와 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 우리의 이웃들, 그들의 피와 땀이 어린 삶의 장소가 바로 주인공이 살고 있는 영등포 시장 뒷골목이다. 일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이량의 성장기적인 체험과 더불어 그녀의 시선으로 바라본 주변 인물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단 두 가지다. 양면 오리털 잠바만을 걸치고 바지도 팬티도 입지 않은 채로 길바닥에 누워 있던 남자, 또 하나는 사과 괘짝의 토막들을 자르고 다듬어 내게 책상을 만들어 주었던 남자다. 이 두 남자는 같은 사람일까? 가끔 나는 그 두 사람이 사실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한 남자는 쫓아 버리고 싶고 기억하기도 싫은 부끄러운 사람이고 도 한 남자는 일기장 갈피마다 곱게 접어 넣고 밤마다 몰래 꺼내 보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그 두 명의 남자 중 어떤 남자를 내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결국 먼 훗날까지 내가 나의 아버지로 기억하게 될 사람은 그 둘 중 누구일까? -p262』


이량의 아버지는 김일성대학 출신으로 6.25 때 인민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고 탈출을 시도하다 심한 고문을 받게 된다. 이후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점차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만다. 그녀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수치스럽고 숨기고 싶은 존재인 동시에 한없이 안타깝고 가엾은 동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 있고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지만 식당일을 하며 한 가정의 생계를 떠맡고 있는 어머니는 오로지 여자는 시집한번 잘 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말을 하기 일쑤다. 아버지의 오랜 병수발과 여자의 몸으로 혼자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그녀가 그간 얼마나 힘든 무게를 짊어진 채 살아왔는지는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같은 반 친구 이희선을 통해 소위 소녀들에게는 금지사항인 빨간 책을 접하게 되고 이후 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성장기 소녀에게 있어 이런 가슴 뛰는 놀라운 경험은 이후 둘도 없는 친구 경진과의 동성애로 발전되고 점차 성에 눈을 뜨게 된다. 또한 정육점 주인의 처남에게 평소 수학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찾아가지만 이는 반강제에 의한 성폭행으로 이어진다. 그녀의 의도와 거리가 먼 타인에 의한 충격적인 성경험은 오히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게 만들고 성에 대한 불신만 키우는 꼴이 된다.


『나는 시장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전혀 다르지 않다. 나도 그들처럼 남모르는 비밀 한 가지씩 품게 되었고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냥 그대로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아빠처럼 말이다. 한번 잘못된 인생을 가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는 거겠지. 나도 술을 마시게 될까? 술을 마시면 다 잊혀 질까? 경진이 보고 싶다. 그렇게 매몰차게 경진을 내 마음 속에서 내쫓지 말아야 했다. 남들의 이목이 두려워서, 결국은 나도 내가 경멸해 마지않는 어른들과 똑같은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겉과 속이 다른. -p225』


성장기 소녀인 이량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이들의 삶의 모습은 그야말로 타이어 빠진 자동차와 같다. 이상적인 꿈과 희망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잃은 채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 이 어린 소녀의 눈에는 얼마나 처량하고 안타깝게 느껴졌을까. 우리는 한낱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타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인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들은 경계선을 뛰어 넘어 나보다 타인의 삶을 저울질하고 타인이 받게 될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녀는 친구와의 이별, 폭력과 불륜, 계부에 의한 성폭행, 청소년기에 경험한 성과 본드 흡입으로 인한 구치소 수감까지 결코 가볍지 않은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한다. 그녀가 보고 자란 대부분의 여성들은 계부로 인해 혹은 남편으로 인해 성적인 놀림감 내지는 희생 제물인 셈이다. 사춘기 소녀가 성과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기에는 이 모든 게 한낱 어두운 그림자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식인으로써의 삶의 활개를 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 자신의 삶에 의지를 굳건히 했을지도 모른다.


활기에 가득찬 재래시장, 그 한복판에서는 누군가로 인한 상처와 아픔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이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다. 소위 모범생이라 할 수 있는 우리의 주인공 이량이 성장하기에 이 소설의 배경인 영등포 시장 골목은 빈민층의 삶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웃에 누가 사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들과 달리 그들의 삶은 왁자지껄 비록 시끄러울지라도 소위 한 가족과 같으니 이들의 모습 속에서 이량은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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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서태후
펄 벅 지음, 이종길 옮김 / 길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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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펄벅, 그녀의 또 다른 작품“연인 서태후”를 최근에야 만나게 되었다. 7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는 이야기에 줄곧 흥미진진하게 빠져들 수 있었다. 작가는 한 시대를 풍미한 여인의 삶을 어디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녀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복잡한 삶의 정세 속에서 절대적으로 평범한 삶을 꿈꿀 수 없었던 한 여인이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한 남자를 한 평생 마음에 담아둔 채로 살아왔으면서도 그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외세의 침략에도 당당하게 보통의 남자들보다 더 강한 면모를 드러내며 통치자로써의 삶을 고수해야 했던 그녀. 이토록 비극적인 삶을 선택해야만 했던 그녀가 바로‘꽃과 칼날의 여인’서태후다.


책을 읽다보면 그녀를 나타내는 호칭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제에게 간택되기 이전부터 시작하여 황후에 오르기까지 그 세월의 흐름에 따르듯 연대기적으로 그녀의 권위와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도 변한 것이다. 청조 말기, 국사를 바로잡기에는 나약하기만 했던 황제 함풍제는 후궁이 되기 위해 모인 처자들 중에서 유독 늦잠을 자는 대담함까지 보인‘예흐나라’를 자신의 후궁으로 간택하게 된다.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다른 이들과 달리 황제 앞에서도 당당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드러내는 그녀의 당당함에 이끌린 것일까. 운명은 어쩔 수 없는 법, 안타깝게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미 황실경비대장인 영록이 자리하고 있다.


정혼자에 대한 연정을 드러낼 수 없었던 그녀는 훗날 황제가 서거한 뒤 본격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권위자로써의 명성을 드러내기에 전혀 아쉬움 없는 여인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여인으로써 한 시대를 이끌어가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 그리고 많은 이들의 세력다툼이 있었을까. 보편적으로 나약하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과는 달리 매섭고 강한 통찰력으로 자신의 권력을 손에 쥐기까지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겉으로 강해보이는 이들이 오히려 속마음은 더 여리지 않던가. 작가 펄벅은 그녀의 이런 섬세하고도 여린 여인이자 한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그려나가고 있다.


황제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부터 그녀의 삶은 전혀 색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만다. 단순하게 여인으로써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갖은 술수와 권력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탐욕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영록에 대한 연민까지. 현실은 그녀가 추구하던 이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인 것이다. 한 남자에 대한 지울 수 없는 사랑의 감정과 믿고 있던 이들에 대한 배신으로 그녀의 상실감은 더욱 커져만 가고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한다.


그녀가 살아온 삶의 모습은 강인한 철의 여인을 떠올리기 쉽지만 알고 보면 이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초지일관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여인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매순간 갈등하고 고뇌하며 아파하는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중국의 마지막 여제 서태후. 그녀의 모습은 현재 어떻게 평가되고 있을까. 같은 여자로써 냉대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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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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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 윌리엄 포크너』


학창시절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영어였다. 다분히 어렵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영어를 즐기며 배울 수 있었던 것은 한 분의 훌륭한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는 스승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게도 새로운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옆에서 지켜봐주신 스승에 대한 고마움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고 기억에 남는다. 내가 장영희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은 한 신문사의 영시칼럼을 통해서였다. 매일 아침이면 신문을 오리고 스크랩하던 나는 그 분이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라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던 것 같다.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히 죽음 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넘어져 봤기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p 316』


그리고 수필집“내 생애 단 한번”을 통해 그녀가 어릴 적 소아마비라는 병을 겪었고 그 이후엔 두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 살아왔으며 두 번의 암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에 장애 없는 사람은 없고 희망은 자신만의 특별한 힘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본능적인 힘”이라 말한다. 내가 그 분의 솔직담백한 글을 읽으며 가장 감동받은 것은 솔직하고 당당하고 무엇보다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마인드다.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p 318』


모두가 바라는 최고의 이상적인 삶의 목표는 행복일 것이다. 다만 우리의 삶이 단 하나의 감정만으로 일관화 된다면 이것 또한 얼마나 지루하고 덧없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희노애락’이라는 이름의 포물선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더 큰 행복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다양한 색깔의 인생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들이 치열한 삶과 현실의 나를 견주어 볼 수 있으며 이는 희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책은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이름으로 한 신문에 연재했던 문학 칼럼을 한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가 소개한 문학 작품들을 메모하느라 일부의 시간을 소요해야만 했다. 아마도 장황하게 책의 줄거리만을 요약하고 설명하는데 그쳤다면 호기심이 덜 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작품들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과거 그녀가 만나고 헤어졌던 이들과의 아련한 추억이 곁들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간혹 지난 앨범을 들춰보며 추억에 잠기는 우리의 모습도 이와 매한가지인 일이 아닐런지.


청소년들에게는 고전 문학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줄 것이며 어른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줄 것이다. 한시 바쁜 현실의 시계 초침에 맞춰 살아가느라 놓치기 쉬웠던 여유를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명구들을 읽으며 한시름을 놓기 바란다. 어차피 문학은 우리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든 사소한 허구에 불과한 것 이니까.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고 희망의 싹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장영희 교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다.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분, 이 분의 책을 읽을 때면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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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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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삶은 사라진다. 한 사람이 죽고, 그가 살아온 모든 흔적이 차츰차츰 사라진다. 발명가는 그의 발명품들로 살아남고 건축가는 그가 지은 건물들로 살아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기념물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업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날짜를 뒤섞고 사실을 빼먹고 진실을 점점 더 왜곡시키고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죽으면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p 386』


어느 날 사랑했던 가족이 내 곁을 떠나고 나를 지탱해주었던 일마저 잃게 된다면? 이 같은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이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다. 이렇듯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이다. 삶의 막다른 길에 서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일어서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하며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실상 쉽지 않다.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는 59세의 전직 생명보험 영업사원이자 이제는 퇴직하고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해야 할 우리시대의 가장이자 아버지이다. 다만, 제 2의 인생에 대한 기대와 설렘에 앞서 아내와의 이혼과 하나밖에 없는 딸과의 절연이 그에게 얼마나 큰 외로움과 소외감을 안겨주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군다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폐암”선고까지 받아 어떤 일에 대한 희망이가 기대도 가질 수 없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삶인가. 이토록 그는 보통의 중년들과 다르게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었다.


그런 악재들 속에서도 남은 생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던 네이선은 어린 시절 그가 보낸, 브루클린을 찾아 간다. 삶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도 행복은 어디선가 조용히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아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을 쓰기로 한다. 인간은 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일까. 때때로 나 자신조차도 그런 실수를 자주 범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리석게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또한 나약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네이선은 브루클린의 한 헌책방에서 잊고 지냈던 조카 톰과 만나게 되고 영문학을 전공하던 인재 톰이 스스로의 꿈을 저버린 채 택시 운전과 헌책방의 일을 하며 생활하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그 가운데 헌책방의 주인인 동성애자 해리(그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사는 인물이다) 한때 포르노 잡지 모델을 한 오로라, 그리고 오로라의 두 남자 사이에 아버지가 정체도 모른 채 태어난 열 살의 꼬마 아가씨 루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꼬마 아가씨 루시는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는지 묻는 톰과 네이선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도리질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명한다.


아이를 맡기기 위한 여정 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사고 속에서 이들은 새로운 인물, 허니 차우더를 만나게 되고 훗날 그녀는 톰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찾아와 톰과 그녀는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새 인생을 시작한다. 한편, 네이선은 보석 디자이너인 낸시의 어머니 조이스와 친구처럼 연인처럼 함께 남은여생을 즐기며 살게 된다. 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보내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처절하리만치 슬프고 어두운 악의 그림자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찾아낸 네이선 글래스. 그는 다시금 건강을 되찾고 황혼의 사랑을 시작하고 딸과 화해를 하고 그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가족들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서 행복을 찾게 될 것이다. 폴 오스터라는 작가는 부끄럽게도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난 것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그의 흡입력 있는 문체와 이야기 구성은 그야말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 같다. 그간 내가 읽었던 단편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누군가로 하여금 상처받고 상처를 준 이들의 삶의 표면은 그 자체로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잊고 있던 관계와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기에 더 없이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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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자전거 - 장애아 부모들이 들려주는 삶의 지혜와 용기
스탠리 D. 클레인 지음, 킴 스키브 엮음, 이나경 옮김 / 청림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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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 대한 편견의 늪에 빠지기 쉽다.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단지 나의 가치 기준점을 벗어났을 때 우리가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간단하게 생각해서 우리가 생판 모르는 낯선 이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으로 단정한다. 그 사람과 직접 대화를 나눠보고 생각하는 바를 이해하게 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먼저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편견의 틀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장애’라는 말은 몸의 기관이나 기능이 온전하지 못해 정상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보통사람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장애인들이 받게 될 상처는 생각지 않고 가볍게 상처가 될 말을 내뱉는다든지 무슨 벌레라도 본 것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많다. 이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이다. 장애는 그들의 의지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유전자적인 대물림으로 인한 선천성 장애와 사고나 기타 등의 이유로 후천적인 장애를 가지게 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은 이처럼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를 둔 부모들이 겪은 일들이 담겨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아이가 장애를 가졌다는 선전 포고를 누군가로부터 듣게 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직접적인 경험이 없어서 그 부모들의 마음을 전적으로 헤아릴 순 없으나 내일의 태양이 사라지고 순간 어두운 그림자로 탈바꿈되며 바로 절망감에 빠져들게 되고 이후 내 아이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장애라는 벽을 넘어서고 보통이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의 모습을 찾게 되기까지 아이보다 배로 힘든 시간을 겪게 되는 부모들은 하나의 동질감을 토대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오늘 한번 넘어서면 다시 일어나 두 번 더 연습하면 되고 부정적인 한계를 먼저 그어버리지 말고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이들에게 기회를 주면 분명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더라도 장애를 극복한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자폐아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끊임없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훗날 부모가 없는 냉혹한 현실에서도 자립하여 생활할 수 있게 일상의 모든 것을 연습시킨 장애인 수영선수 김진호 군의 어머니. 이 분을 통해 나의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큰 꿈을 품게 되었다는 부모들도 많을 것이다. 사지육신이 건강하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삶의 축복이자 감사할 일인지 우리는 쉽게 잊고 살게 된다.


그들이 다시금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아 가도록 우리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듬어 주고 바라봐주어야 할 것이다. 내 아이가 오늘 건강하다고 해서 내일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불행이지만,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뒤에서 이들을 격려하는 이는 바로 부모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안정적이고 어떠한 편견도 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배려해줄 수 있는 마인드를 키워야 한다. 장애라는 편견의 옷은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는 똑같은 행복의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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