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대부분의 삶은 사라진다. 한 사람이 죽고, 그가 살아온 모든 흔적이 차츰차츰 사라진다. 발명가는 그의 발명품들로 살아남고 건축가는 그가 지은 건물들로 살아남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어떤 기념물도, 오래도록 지속되는 업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예외 없이 고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날짜를 뒤섞고 사실을 빼먹고 진실을 점점 더 왜곡시키고 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죽으면 이야기들도 대부분 그들과 함께 사라진다. -p 386』


어느 날 사랑했던 가족이 내 곁을 떠나고 나를 지탱해주었던 일마저 잃게 된다면? 이 같은 상상만으로도 우리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이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다. 이렇듯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이다. 삶의 막다른 길에 서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일어서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하며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실상 쉽지 않다.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 네이선 글래스는 59세의 전직 생명보험 영업사원이자 이제는 퇴직하고 인생의 후반부를 준비해야 할 우리시대의 가장이자 아버지이다. 다만, 제 2의 인생에 대한 기대와 설렘에 앞서 아내와의 이혼과 하나밖에 없는 딸과의 절연이 그에게 얼마나 큰 외로움과 소외감을 안겨주었을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군다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폐암”선고까지 받아 어떤 일에 대한 희망이가 기대도 가질 수 없으니 얼마나 절망적인 삶인가. 이토록 그는 보통의 중년들과 다르게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있었다.


그런 악재들 속에서도 남은 생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었던 네이선은 어린 시절 그가 보낸, 브루클린을 찾아 간다. 삶의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도 행복은 어디선가 조용히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아는 것일까. 그는 스스로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한 책”을 쓰기로 한다. 인간은 왜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아는 것일까. 때때로 나 자신조차도 그런 실수를 자주 범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리석게도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이 또한 나약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어느 날 네이선은 브루클린의 한 헌책방에서 잊고 지냈던 조카 톰과 만나게 되고 영문학을 전공하던 인재 톰이 스스로의 꿈을 저버린 채 택시 운전과 헌책방의 일을 하며 생활하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그 가운데 헌책방의 주인인 동성애자 해리(그 역시 평탄하지만은 않은 삶을 사는 인물이다) 한때 포르노 잡지 모델을 한 오로라, 그리고 오로라의 두 남자 사이에 아버지가 정체도 모른 채 태어난 열 살의 꼬마 아가씨 루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꼬마 아가씨 루시는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었는지 묻는 톰과 네이선에게 그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도리질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명한다.


아이를 맡기기 위한 여정 길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 사고 속에서 이들은 새로운 인물, 허니 차우더를 만나게 되고 훗날 그녀는 톰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찾아와 톰과 그녀는 하나의 가족을 만들어 새 인생을 시작한다. 한편, 네이선은 보석 디자이너인 낸시의 어머니 조이스와 친구처럼 연인처럼 함께 남은여생을 즐기며 살게 된다. 생의 마지막을 조용히 보내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만나게 되는 모든 이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연속성을 지니게 된다.


처절하리만치 슬프고 어두운 악의 그림자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찾아낸 네이선 글래스. 그는 다시금 건강을 되찾고 황혼의 사랑을 시작하고 딸과 화해를 하고 그가 잊고 있었던 새로운 가족들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서 행복을 찾게 될 것이다. 폴 오스터라는 작가는 부끄럽게도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난 것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는 그의 흡입력 있는 문체와 이야기 구성은 그야말로 높이 평가할 만한 것 같다. 그간 내가 읽었던 단편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누군가로 하여금 상처받고 상처를 준 이들의 삶의 표면은 그 자체로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잊고 있던 관계와 이를 해결해가는 과정이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기에 더 없이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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