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끝난 후 20대 여성관객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나간다. 뭐 충분히 이해한다. 수십년전 종로의 <코아아트홀>에서 <애정만세>를 처음 봤을 때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어떤 영화는 스토리,배우의 연기를 볼게 아니라  한 편의 그림을 감상하듯 장면장면을 봐라봐야 한다는 것을 이제 알 것같다. 헤밍웨이가 단 몇 개의 단어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듯이 <안녕, 용문객잔>에서 채명량은 단 몇 개의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물론 <애정만세>처럼 퀴어 코드도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건 이 영화의 어쩌면 진정한 주인공인 '복화영화관'이다.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전, 머리가 허연 아저씨들이 영화관 로비 구석에서 "글쎄 이 영화 감독이 아직 20대라는구먼"하고 잡담을 주고받던 영화관이다.(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낡은 복도와 촌스런 붉은 스폰지로 마감한 출입문, 겨우 깨끗하다는 구색을 맞춘 화장실, 벽 한쪽에 위태하게 달려있는 인터폰.. 거기에 스며든 수많은 순간들과 사연들.. 이 영화는 글자 그대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보길 권한다. 장면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주는 울림이 크기 때문이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큰 파문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하이퍼텍나다와  동숭씨네마텍, 코아아트홀 그리고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작은 극장들, 그 시절 이후로다시 작은 영화관 지도를 그렸다. 신촌에 모여있는 에무시네와, 아트하우스 모모, 필름포럼 좀 멀리로는 여전히 꿋꿋한 씨네큐브, 아트나인,씨네필영화관 등이다. 의외로 예전보다 상영되는 프로그램들은 더 풍성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포스터까지 준다!. 얼마전에 에무시네마에서 <중경삼림>을 봤는데 요새 왕가위가 힙한지 젊은이들로 꽉 찬 객석을 보며 애네들한테 이 영화가 어떤 정서로 다가올지 궁금했다. 물론 다시 본 왕가위는 여전히 쿨하고 스타일이 넘쳤다. 이번에 <안녕, 용문객잔>을 보며 영화는 현대의 신화가 아닐까 하는 감정이 들었다. <중경삼림>의 다리미로 주름살을 편 듯한 임청하, 금성무,양조위, 왕정문, 영원할 것 같은 젊음과 넘치는 에너지들.. 영화가 상영될 때 마다 그들은 영겁의 삶을 산다. 깔깔대고 소리지르고 사랑을 한다. 복화영화관에서 흘러간 '용문객잔'을 보는 관객들. 그리고, 그만큼 흐른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관.. 그리고, 나는 20년전 영화를 보며 영화속 풍경을 다시 재현하고 있었다. 양귀매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이강생은 오랜만에 보는 친구같았다. 복화영화관의 불켜진 텅빈 객석은 마치 신화가 상영되는 제단처럼 보였다.  영화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면서 난 마치 이강생이 된 기분이었다. 아마도 작고 누추한 방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담배를 피겠지. 구석의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실지도 모른다. 한켠의 작은 TV에서는 싸구려 삼류 쇼의 웃음소리가 조그맣게 울릴 것이다. 영화는 신화다. 그리고 영화관은 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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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삶의 소명‘같은 것이 애초에 없을 수도 있긴 하다...




게다가 거티의 삶이 보여 주듯이, 종종 우리의 진정한 삶을 가장 좌 - P203

절시키는 사람은 부모, 연인, 배우자, 아이들이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또 그들을우리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여기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지 알게 해 주는 거울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오직 자신만이 그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웅의 소명을 따르다 보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방종과 자기애를 진정한 소명과 혼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삶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낙원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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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에서 고위관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궤변을 일삼는 이유다




 그렇지만 "그 직원이 낙인찍힌 무리에 속하는 일은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환자에겐 직원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심각한 차별이라는 결과로 실현할 만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힘이 없기 때문이다." "묵직한 위력으로 낙인을 찍는 것은 "교육기관, 직업, 주거, 의료 등 주요 생활 영역에 대한 접근권을 통제할" 힘, 바로 권력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이 낙인찍히고 정체성이 손상되어 삶의 기회를 상실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권력이 없기때문이다."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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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생존자가 말했다.
전쟁 때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하다고.
저 살겠다고 자식 버리고 가는 부모도 한둘이 아니라고.
사람이 더는 사람이 아니라고. - P27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은 죄책감과 고통을평생 가슴에 묻고 산다고. - P28

바람만 불어도그때의 기억이요동친다고.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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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중독 - 공부만이 답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엄기호.하지현 지음 / 위고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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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기호: 우리 사회는 '교육 중독'이다. 공부는 가르칠수 있는 것('구경'할수 있는 것, 예를 들면 미적분)과 가르칠 수 없지만 배울 수 있는 것, 살아가면서 터득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예를 들면 연애)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교육시스템에 집어넣어서 오히려 삶을 협소하게 만든다. 삶과 공부를 분리시켜 공부할 때 삶을 유예하게 하니 삶은 미완성일 수 밖에 없다.(하지현의 부연: 법학,의학처럼 요약정리가 중요한 학문도 있지만 사회학이나 물리학처럼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내는게 목표인 학문도 있다. ... "그렇게 일부 영역에서만 적용되어야 할 것을 전영역에 걸쳐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죠" ..."굉장히 매끈하게 요약정리해서 정답을 향해 주저없이 돌진하는 형태가 모든 공부의 전형이 되어 있고 그런 식으로 공부해야지만 안심을 하고 시간낭비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죠")-> 이렇게 공부를 정의하면 공부는 산업이 되고 최적화,효율성,완벽주의가 미덕이 된다. 때문에 이런 공부를 경험한 학생은 이후 실패에 취약하고, 유연성 공감능력 등이 부족하게 된다. 


동감하지만 덧댄다면: '가르칠 수 없지만, 배울수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너무 극단적인 것 아닐까? 그렇다면 제도적인 시스템을 따르던, 따르지 않던 간에'인성 교육'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100% 모른다면 엄기호가 말하는 '경험을 통한 배움'역시 불가능한 것 아닐까? 경험을 통한 배움도 그것을 배울 수 있는 기반이 경험을 하는 사람의 내부에 있어야 하고 그 기반을 '교육'이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하지현: 좀 더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통찰. '치킨 게임'과 '군비 경쟁'을 그만두자. 공부로 출세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는데 지금 중산층은 판돈만 계속 올리고 있다. '강남불패'라는 말처럼 10위권의 시장은 여전히 있고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상류층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잃을게 너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삶의 경쟁력은 떨어질 것이다. 오히려 '디투어링'을 권한다. 필요한 것은 학력에 따른 차별감소와 사회복지망 확충 등 사회적인 요소이다. 

"지난 백년간의 교육시스템의 정수는 많이 아는 자가 성공하고, 성공한 자는 능력있는 자다. 공부는 효율성을 위해 존재하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자는 무능한 자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다., 라는 생각이에요. 개인의 능력문제로 치환해 버리는데, 그것이 공부능력으로 국한된게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가치'로까지 확대되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 이것은 결국 차별과 혐오로 이어진다. 


동감하지만 덧댄다면: 마치 '게임이론'처럼 공부가 더 이상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통찰이 역설적으로 계급을 고착시키는 메커니즘을 가져온다는 관점이 있다.(예를 들어 <하류지향>(우치다 타츠루,민들레) ) 하지현의 관점이 오히려 하류지향으로 흐를 가능성은 없을까? <파크애비뉴의 영장류>(웬즈데이 마틴,사회평론)나 <야망계급론>(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오월의봄)에서 묘사되는 엄마들의 치맛바람은 우리나라 빰친다. 교육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플루토라트"(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열린책들)들은 왜 교육과 학벌에 목을 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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