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자에게 아주 친절한 책은 아니다. 번역도 썩 잘된 것 같진 않고, 내용을 더 보강해서 개정판이 나오면 좋을 거 같다. 차라리 영화 <빅쇼트>를 보고 난 다음 이 책을 읽는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묘사된 월스트리트 채권시장의 특징은 주식시장과 달리 가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시장이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이 적군의 동태를 염탐하듯 금융권 관계자들과 미팅하는 장면들이 곧잘 나온다. 등장하는 CDOABX하는 단어들에 기죽을 필요 없다. 전부 외부인의 개입을 달가와하지 않는 월가에서 일부러 암호처럼 만들어 낸 거니까.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시장은 월가의 금융업자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거다. 마치 비트코인이 없던 시장을 만들어 낸 것과 같다. 물론 CDO는 실물자산과 실낱같은 연결이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핵심적인 역학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시장을 둘러싸고 마치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식으로 모든 관계자들이 삽질을 한 거다. 신용평가사, 은행, 보험사, 심지어는 정부까지. 이들은 급할게 없었다. 아무리 큰 구멍이 나도 땜빵해 주는 나같은 호구 납세자가 있으니까. 영화 <인사이드 잡>에서도 지적했던 건데 남의 돈으로 파산잔치를 벌인 이들은 수천만달러의 인센티브는 깨알같이 챙겨갔다. 책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스티브 아이스먼이 월가를 탐험하며 느낀 것은 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지독한 사기꾼이거나 멍청이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CDO 시장이 실물경제와 완전히 따로 노는 모습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실은 허울이고 몇몇의 대형금융기관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영화 <빅쇼트>, <인사이드 잡>, <마진 콜>을 잇달아 봤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세상에 믿을 놈 없다'이다. 고양이한테 생선가게를 맡긴 게 아니라 하이에나한테 투뿔 한우를 던져주는 격이다. CDO를 만든 사람도 CDO의 정확한 구성을 모른다. 신용평가사는 고객을 잃을까봐 트리플A를 남발한다. 정부관계자는 스티브 아이스만이 말하는 것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막판에 CDO가 부도날 것 같으니까 모건스탠리,골드만삭스 같은 대형금융회사가 CDO를 추천상품으로 팔고 관련한 신용부도스와프를 사서 부도가 나면 이익을 챙긴다. (<인사이드 잡>에 나오는 내용이다. <마진 콜>이 아마 이 내용을 극화한 것일 게다. 우리나라도 홍콩ELS 어쩌구 하면서 뭐가 있지 않았나? <인사이드잡>의 한국판 비스끄리한건지 모르겠다.) 결국 이들이 한 일은 남의 돈으로 돈 따먹기 내기를 한 거다. <마진 콜>에 나오는 대사처럼 대신 삽질을 했으면 구멍이라도 팠을 거다. <인사이드 잡>의 대사처럼 현실의 엔지니어들은 다리를 만들지만 월가의 금융인들은 꿈을 만들고 그 꿈이 악몽으로 변하면 피해는 다른 사람들이 입는다. 2008년에 나는 30대초반의 직장인이었는데 사실 금융위기는 다른 나라얘기였다. 월급이 깎일 일도 없고 자산 손실을 얘기하기엔 모아놓은 자산도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들의 무분별한 행동 하나하나가 먼 이역만리에 사는 누군가에게 분명히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거기에 대응하지 못한 사람은 갑자기 몰려온 쓰나미에 무기력하게 쓸려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런 느낌을 상상할 수 있는 이유는 갑자기 오른 집값 덕분이다. 나는 그냥 내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며 열심히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월가의 금융인같은 애들이 장난을 쳐서 갑자기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면? 분명한 건 정부와 기득권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는 거다. <인사이드 잡>에서는 시종일관 정부가 금융기관 편을 들다가 금융위기가 터지자 세금으로 이걸 땜빵하고 금융위기를 유발한 장본인을 금융개혁 책임자로 다시 선임하는 과정까지 나온다.(이걸 보고나면 우리나라 국민연금이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엔클로저 운동 때문에 농민이 어쩔 수 없이 노동자가 되는 것처럼, 그냥 살던 땅에서 쫓겨나서 경매사이트나 대부업체를 기웃거리는 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이익을 얻는 건 금융기관이나 부동산회사일 것이다. 정말 이중삼중으로 쪽쪽 빨리는 거다.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전부 꿈일지도 모른다. 언제 악몽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꿈 말이다.

 

ps.1 영화 <빅쇼트>를 이제야 봤는데 맥도날드에서 깔끔한 햄버거 세트를 먹는 기분이다. 명배우들과 재치있는 연출의 콜라보.


2. <인사이드 잡>은 2011년 아카데미에서 수상한 금융위기의 내막을 파헤친 다큐다. 영화에선 정의의 편인 칸 IMF총재가 한국에서 개봉하기 전 성폭행 미수로 물의를 일으켜 인지부조화가 생기는 대목이 있다. 내노라하는 자신만만한 하버드 경제학자들이 감독의 질문을 받고 갑자기 버벅대는 장면은 지금 봐도 아이러니다.


3. <마진 콜>은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바로 직전 월가 금융기관의 하루를 묘사한다. 케빈 스페이시, 폴 베타니, 제레미 아이언스, 데미 무어 등 이름난 배우들을 전부 모아놓았는데 시너지효과가 그렇게 크지 않다. 무사만루에 2득점 같은 느낌.


4. 스티브 아이스만이 숫자를 들고 시장동향조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 '사회통계학'이라는 학문이 떠오른다. 통계학과 전공했으면 월가를 꿈꿨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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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커 씨, 사실인가요? - 베스트셀러 저자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말하지 않은 사실들
이승엽 지음 / 어떤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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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들은 얘기. 회계담당자를 뽑는 자리에서 영업이익을 계산해보라는 면접관의 요구에 구직자들이 한 말: 구직자 A-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 후 영업이익은 OO원입니다.” 구직자 B- 역시 계산기를 두드린 후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00원이고, 낙관적으로 계산하면 00원입니다.” 구직자 C- 숫자를 한번 쓱 본 후 영업이익을 얼마로 해 드릴까요?”. 당근 취직한 사람은 C.

저자에 따르면 핑커를 비롯한 신낙관주의자들은 팩트라는 것을 산 속에서 산삼 찾는 것처럼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영업이익이나 평화’, ‘민주주의같은 개념부터가 인공적 창조물이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들이대는 객관적 숫자들이 산출되는 과정에는 연구자들의 관점, 이데올로기가 주관적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더 짜증나는 건 이들의 이데올로기가 서구의 세기라는 말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개발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서구 덕분에 갈수록 살기 좋아졌으니까 정치에 신경쓰지 말라는 주장은 배고픈 시절을 못 겪어봐서 데모한다는 오래전 꼰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나아가 착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개돼지로 보나고 입에 거품을 물 만하다. 이들은 여러 가지 통계를 들이대며 이것이 팩트라고 주장하는데 저자는 이런 팩트가 어떻게 가공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추적하며 이들의 주장 역시 편향되었음을 밝힌다. 반대로 저자는 세계화 개발패러다임이 오히려 빈곤을 증가시켰다는 요지를 펴는데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핑커의 통계를 워낙 조목조목 발라낸 뒤라 저자가 제시하는 통계도 혹시?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만약 우리 모두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면 팩트는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가장 근본적인 사회적 가치관의 합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런 합의 위에 쌓인 팩트들이 하나의 결론을 유도해 낼 것이다. 하지만, 맥락이 제거되고, 제시된 현실에서의 함의가 무시된 팩트는 양 진영의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독단적으로 만든다. 저자는 핑커의 책에 이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팩트는 맞지만 맥락면에서 독자들을 호도하는 예로 든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을 읽을 까 하다 포기한 책인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안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핑커의 벽돌책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시각을 외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싶다. 이런 관점을 보여준 게 저자가 처음일까.(아직 대학생임) 이 책을 외려 번역해야 하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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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커 씨, 사실인가요? - 베스트셀러 저자 스티븐 핑커와 한스 로슬링이 말하지 않은 사실들
이승엽 지음 / 어떤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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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커, 별 거 아니네 한국 대학생한테도 처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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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낙관주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해석의 층위에서 팩트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실관계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겠다는 신낙관주의의 팩트도 복잡하게 펼쳐진 사실관계 가운데 선별된 것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신낙관주의의 팩트가 강력한 힘을갖는 것도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의 제약하에 (종종 정치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임을 무시할 수 없다. 신낙관주의자들은 이런 의미관계를 물신화해, 마치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신들의 팩트에는 주관적이해와는 무관한 자기완결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사실관계와 이해관심이 부여하는 의미의 힘은 취하는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 신낙관주의의 팩트물신주의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문제적인 까닭이 여기 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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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모든 곳에 있기도 하고, 그 어느곳에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랑이란 ㅇㅇㅇ이다‘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 규정을 우리의 복잡한 현실적 정황에 바로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다. 개념 규정의 ‘더블 바인드‘(double bind)‘, 즉 ‘필요성‘과 ‘불가능성‘이 여기에서 작동된다. 한편으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그 개념을 지속적으로 생각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 규정의 ‘불가능성‘을 언제나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랑이란 어쩌면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구체적 정황에 따라 생각하고다시 생각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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