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verly 베벌리
닉 드르나소 지음, 박산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 " 겉보기엔 단정하고 무난한 미 중산층 이면에 놓인 추악한 현실을 묘사한 장르"가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위기의 주부들>이나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 토드 솔론즈의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같은 느낌의 콘텐츠들.  비아냥이 아니고 만약 지금 우울해지고 싶다면, weirdo(?) 해지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숏컷>처럼 미국의 교외마을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을 에피소드 형식으로 모아 놓았다. 기괴함, 당혹함, 쓸쓸함, 등의 정서가 주를 이룬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왕따 살은 애타게 동료를 원하지만 결말은 더 큰 불행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평범하고 무난한 가족이 나오지만 액자구조의 티비드라마와는 달리 갈등은 해결되지 않는다. 저자가 주로 집중하는 것은 가정내의 "리비도"인 것 같다. 가정내에서의 리비도 표현은 금기이기 때문이다. 이 금기를 위반하고 좌절한 타일러는 타인과의 소통(연애)에 실패하고(자기의 욕망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후줄근한, 어느정도는 위험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미국식 핵가족 양식은 아마 현대의 대부분에게 적용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여기 등장하는 부모들은 술에 쩔어 폭력을 휘두르거나 바람을 피워서 자녀 가슴에 상처를 주는 부모들이 아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인간적이다. 게다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왠지 슬픔에 젖어 있고, 일탈을 저지른다.  짧은 이야기지만 여러번 다시보게 되는 , 씁쓸한 여운을 주는 만화다.특히 도시의 추운 겨울 밤을 배경으로 한 마지막 에피소드는 요즘 날씨와 싱크로되면서 우울함과 황량함을 '지대로' 느끼게 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플] 3년 전 페이퍼다. 우연찮게 이번주에도 <미성년>을 강의한다....
https://bookple.aladin.co.kr/~r/feed/5569348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불쉿 잡 - 왜 무의미한 일자리가 계속 유지되는가?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김병화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직업이, 어떤 일이 가치있다는 느낌은 주관적인 것이다. 어떤 직업이 가치없는 "불쉿"인지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저자는 결국 그 직업에 종사하는 대다수 사람의 의견과 느낌을 따라야 한다고 한다. 이 때의 쓸모없다는 느낌은 마르크스의 "소외"개념과도 결이 다르다. 공장라인의 생산자는 그래도 무언가 작동하고 운용되는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불쉿"은 더 근본적으로 쓸모없는 것을 만들거나, 허무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저자는 가치라는 것에 대해 교환가능한 "가치"와 그렇지않은 "가치들"을 구분하는 정도의 통찰에서 머문다. 왜 살벌한 자본주의에서 후한 보수의, 그 직업의 종사자들이 "쓸모없다"고 느끼는 "일을 위한 일"이 늘어가는 걸까?

구조적 층위에서의 설명:  지금의 자본주의는 순수한 자본주의가 아니다. 차라리 "경영봉건주의"에 가깝다. 경제학이 상정하는 순수한 합리적인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순수히 경제적인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와 정치는 섞여 있으며 구조조정은 항상 일선의 생산자들이나 하위노동자들이 대상이고 고연봉의 화이트칼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일종의 경영관료주의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시간을 살 수 있다"는 발상 역시 기묘한 것이다

 

문화적 심리적 차원에서의 설명:  우리에게 일이란 "원래 하기 싫은 것"이고 일이 하기 싫은 정도에 따라서 보수가 결정되는 기묘한 심리가 있다. 저자는 청교도 윤리부터 썰을 풀지만 납득은 잘 되질 않는다. 즐거움은 그 자체가 보상이기 때문에 보수는 적게 받아도 된다는 심리가 있다.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일이 없어도 근무시간을 풀로 채우고 바쁜 척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망"을 사기 때문이다. 나 혼자 죽을 수 없지, 하는 느낌? 지금 우리사회의 화두인 "공정"도 실은 "원망"이라는 감정을 포장한 것 아닐까? 

 

 전반적으로 책의 내용이 애매모호하고 산만하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확실히 가르마를 타 주지 않는다.  저자가 내놓는 여러가지 원인분석도 심드렁하다. 하지만, 저자의 얘기를 전부 무시할 순 없다. 이 책의 의의는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저자가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침묵하던 다수"가 커밍아웃을 시작했다.  공감 100%인 부분은 불쉿잡 종사자가 얼마나 피폐해지는 부분을 저자가 사례를 들어가며 묘사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트위터를 통해 사례를 모집했다.)  저자는 불쉿잡 종사자들이 월급루팡하는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고 한다. 결국 그들이 근무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페이스북이나 고양이 밈 만들기이다.  결국 저자의 논지는 기본소득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귀결된다.

 

이 때 두 가지 반응:  우리모두 소득을 나누고 대신 근로시간을 줄이자고?  온 인류가 그렇게 했으면 기아는 진즉에 사라졌을 걸?

 

또는 "꿈은 꾸어야만 이루어지는 거심"(우라사와 나오키 "몽인")

 

저물어가는 한 해를 두고 왠지 시간이 빨리간다던가, 내가 여태껏 뭘 했지? 하는 상실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책이 힘이 되었으면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귀신과 괴물 - 조선 유교사회의 그림자 문화동역학 라이브러리 24
강상순 지음 / 소명출판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귀신이 그 사회의 무의식이나 억압된 면을 보여주는 일종의 징후라는 관점이 이제는 낯설지 않은 것 같다. 저자가 유교국가 조선의 선비들이 기록한 귀신이야기를 분석한 책이다.  히스토리채널 보는 기분으로 편하게 볼 수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논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라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지만, 가독성이 좋아서 부담없이 글자를 훑어내릴 수 있다. 요새 이삼십대들은 "제사"라는 것을 어떻게 여길까?  아직  제사가 필수라는 이미지가 남아있을까? 이 글을 보면 사대부들이 지내던 제사를 일반 민중들에게 퍼뜨리기 위해 귀신이야기를 활용하는(죽은 귀신이 제사음식을 먹는다) 분석이 나온다. 귀신조차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것이다. 이 전략을 쓰면서 사대부들은 일종의 모순에 직면한다. 유학은 원래 쿨한 "고대의 유물론"에 가깝기 때문이다. 리(理)라는 추상적 원칙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이 죽으면 물질로 돌아간다는 유물론적의 관점을 가진 유교가 "종법주의"(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다.)와 그 상징같은 제사를 일반 민중에게 퍼뜨리기 위해 기존의 귀신관념과 일종의 타협을 하는 것이다. 요새 "가부장제"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덧칠해져 있고, "종법주의"란 말을 들으면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들지만 우리의 무의식에는 아직도 그 코드가 남아있지 않을까? 새삼 이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푸코의 계보학적 느낌으로 제사를 바라보게 된다. 당연히 넘을 수 없는 규범 같은 건 없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리 배트 20 -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글.그림, 나가사키 다카시 스토리 / 학산문화사(만화)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화에 대한 식견이 그닥 있는 건 아니지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보다보면 약간의 사대주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등장인물의 권위 내지는 진히어로정석루트(?)를 보증해주는 것이 서구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마스터키튼>의 키튼은 SAS 교관 출신의 혼혈인이고, <몬스터>의 배경은 아예 유럽인데 주인공은 유능한 일본인 의사다. <20세기 소년>은 일본이 배경이지만 제목의 20세기 소년은 티-렉스의 히트곡이다.  가장 최근작인 <몽인>에도 프랑스에 대한 동경이 배경으로 깔린다. 우리가 박찬호나 류현진을 보면서 자랑스럽다고 느끼는 정서같이 서구의 문화와 기준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한 주인공들은 그것을 백그라운드로 해서 일본으로 귀환한 후 일본내의 난제를 해결한다.메이저리그 투수가 등장할 때 허접한 일본악당들은 제압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음 그러고보니 에스비에스 드라마 <미세스 캅>의 선전문구도 뉴욕발 어쩌구 였네. <빌리배트> 역시 미국에서 인정받는 만화가 케빈 야마가타가 주인공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초기 소설에 서구문화가 소품으로 쓰이던 것 하고 비슷한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우라사와 나오키를 일본만화의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필름2.0에서 쓴 기억이 난다. <20세기 소년> 때 어찌나 극찬이 쏟아졌던지 헐리웃 영화에 비교됐던 것 같다.  하지만, <빌리배트>는 기묘한 실패작처럼 느껴진다. 물론 우라사와 나오키라는 이름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재미는 있다. 하지만, <20세기 소년>에서 쓰여졌던 기법들-시간을 뛰어넘어 이야기를 교차편집하며 전체 구조를 짜올리는 것-이 너무 남발되는 것 같다. 캐릭터는 얄팍하게 느껴지고(캐릭터를 시간을 들여 구축할 수 없으니 전형적인 패턴으로 캐릭터를 묘사한다. 일본인 감독은 찢어진 눈에 작은 키, 주인공의 조력자는 스파이더맨의 네드처럼 묘사하는 식이다), 이야기도 에피소드별로 따로 노는 것 같다. 달에 왜 박쥐가 있는지 떡밥은 계속 던지는데 결말에서 속시원히 설명해 주는 것도 아니다. 즉, 그 설정은 그냥 후까시인 측면이 강하다. 그래도 인상적인 것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은 결말이다. 그나마 주인공 격인 케빈 야마가타와 케빈 굿맨은 디스토피아가 다가올 것을 알고 있지만, 지구를 구하지 못한다. 케빈 굿맨이 할 수 있는 일은 황폐해진 지구에서 오로지 만화를 그리는 것 뿐이다. 마지막 대사까지 "잘 그리네. 그런데 왜 안그리지?"다. 하지만, 수 십년 뒤 그 최후의 만화를 본  전쟁터의 소년은 "세계를 구하겠다"고 다짐한다. 케빈 굿맨이 그린 만화가 "낙타 위의 마지막 지푸라기 하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에  기후변화까지 솔직이 앞으로 좋은 일이 생길 가능성은 별로 없게 느껴진다. (뭐 나는 다르게 예상하신다면 그건 축하할 일이고.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갑자기 내가 환경운동이나 인권운동에 뛰어든다고 세상이 바뀔까. 케빈 굿맨 역시 디스토피아 앞에서 더없이 무기력하고 불행하다. 하지만 케빈 굿맨은 폐허가 된 지구에서 끝까지 만화를 그리면서 자못 여유롭게 아내와 커피를 마신다. 언젠가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진인사대천명"의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소명"에만 집중하는 것.설사 그게 눈앞의 불행을 막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한 방울의 물이 되어 대양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그게 앞으로 닥쳐올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살아가는 태도라고 우라사와 나오키는 말하고 싶은 걸까."계속 그려"라는 박쥐의 마지막 말은 창작의 한계에 부딪친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 같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