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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평점 :
그럴리가 없잖은가. 만약 이 책 한권으로 그런 것이 찾아진 다면 그건 저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논리전개나 문장의 밀도는 전작 고민하는 힘보다 더 떨어진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살기 힘들어졌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우리의 일상이 계속되리라고 왜 우리는 기대하는 걸까? 여기서 오히려 필요한 것은 맑스류의 정치경제학이거나 사회학인지도 모른다. 저자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저자의 본래 필드는 아닌 것 같다. " 태도" 를 중시하는 태도(?) 는 나에게 스토아 철학을 연상시켰다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말한 모 스토아 철학자) 그리고, 세상이 던진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삶이라는 문장은 니체류의 위버멘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저자는 신이 죽은 이후 삶의 의미를 인간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으며 그런 의미는 타자와의 마주봄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 것 같다(차라리 다시 신을 살릴까?) 타자와의 진지함에 대한 공명 (이건 불교를 나에게 연상시켰다. 최근에 읽은 불교 구루들이 하는 말이다 "만물에게 공감과 협동이 함께 하기를!). 하지만, 저자가 말한 "독아론과 커뮤니케이션의 충돌"은 나에게 난제이다. 아닌게 아니라 만약 타자가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가치관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에게 그런 타자 뿐이라면 타자를 통해 나의 의미를 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 왜 저자는 삶이 선이라는 전제하에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걸까. 아 물론 나도 삶이 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걸 논리적으로 증명하진 못하겠다, 저자의 모든 주장은 삶이 선이라는, 말미의 역자의 문장 -죽지마라-라는 의도하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난 (아직까지는) 죽지 못한다. 나의 몸이 그걸 거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번 읽었지만 아직 모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의 통찰은 여전히 빛나는 것 같다,
여담 하나.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의 공통된 생각- 일본의 학생운동은 한번도 진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간접적으로 그런 생각을 드러냈고 류는 십년도 더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이제 강상중도 같은 말을 한다, 세번이나 같은 말을 들으니 어째 그게 사실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