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했을까. 이처럼 허망하고 서글픈 질문이라니. 한 인물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의 모습을 하나의 영상 안에 담아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을 관찰한 느낌이다. 저 영상 안의 인물은 한 때 숨을 쉬고 실존했다가 이제는 영원히 사라졌다.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가라앉으며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든다. 비열하게 생각하면 어이없이 끝나버린 영화속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인간의 삶이란 저렇게 허망한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겸허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점을 우주로 올려서 삶을 관조하게 하거나 불교의 ‘백골관’ 비슷한 효과인 것 같다. 부모가 누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은 것이 단 한 가지 이유에서만은 아닌 것 같다. 처음 발병했을 때는 의사의 시각으로 봤을 때 당시의 조현병 치료가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80년대 누나가 발병했을 때는 아마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을 썼을 것이다.) 추측대로 자식이 조현병 환자라는 것이 창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적응’하기 시작한 것 아닐까. 나는 그 가족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거기에 대해 섣부른 추측을 하는 것은 그 가족에게 실례가 될 것이지만, 감독이 영화를 공개한 이상 이런 상황도 감수하리라고 본다. 감독이 촬영을 위해 본가를 방문했을 때 부모가 누나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였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도 의외로 누나의 행동이 폭력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누나가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입원을 시켰을 텐데, 아마 두 노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발병만 했던 것일까. 차라리 누나의 입장에서는 폭력이라도 썼어야 했던 것일까. 사랑으로 뭉친 가족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대부분의 가족 역시 서로를 도구적으로 대한다는 게 진실일 수 있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 잠자를 떠올려 보자. 자식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야 ‘쓸모’가 있고, 부모는 얼마 이상을 벌어서 무엇을 해줘야 ‘자격’이 된다. 서로를 도구적으로 대할 때 가족 구성원이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진부한 말로 행복한지는- 논외의 대상이다. 가부장 가정에서 자주 있는 일인 것 같은데 가족구성원에게 문제가 있어도 가장은 우리 집에는 아무 문제 없어, 하는 식으로 문제를 덮어버린다. 가족 구성원의 속은 썩어들어가든 말든 마치 그런 일은 없다는 듯 평화로운 침묵이 가정을 덮는다.예전 마약방지 캠페인에서 나온 대사처럼 너만 가만히 있으면 모두가 편안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네가 가장 중요하고,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가족구성원은 이중명령같은 상황에서 혼란에 빠진다.(즉 시키는 대로 한다.) 그렇게 이 가족은 누나의 인생과는 상관없이 상황에 적응을 한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않고 누나와 장기간 집 안에서 칩거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머니가 누나를 돌본 것이 아니라 누나가 오히려 어머니의 공백을 메우는 상황은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딸을 그렇게 방치한 것은 어머니의 판단이었고 나는 따랐을 뿐이라는 아버지의 답변은 진실일 수도 있고 면피일 수도 있다. 조현병이 발병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국가고시와 의사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사망했을 때 ‘딸과 함께 쓴 논문’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며 ‘의학 연구자’라는 모델에 이 가족이 병적으로 집착하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그러고 보니 집 안에 고가의 실험기기가 있을 정도다.) 의대를 가기 위해 4번이나 도전해야 했던 딸은 발병하자 점술이라는 정반대의 벡터에 빠져들었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우리 인생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