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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전쟁 - 전통주의의 복귀와 우파 포퓰리즘 ㅣ 걸작 논픽션 28
벤저민 R. 타이텔바움 지음, 김정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8월
평점 :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 하는 전통주의가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대문자 “T”로 시작하는 전통주의(Traditionalosm)는 인도유럽 종교의 세계관에 묘한 영성주의가 결합된, 지난 100년간 지하에서 가까스로 명맥을 이어 온 철학적,영적 학파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높으신 정치 엘리트와 지적문둥병자” 들이 어떻게 결합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마치 에코의 소설 <푸코의 추>를 논픽션 버전으로 보는 느낌이다. 템플기사단이 현실에서 암약하는 것을 목격한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랄까,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본 것은 어설픈 제의를 실천하는 서커스단이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기시감과 함께 불안감이 확 든다.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이 xx법사가 시키는 대로 북한을 선제공격한다고 생각해 보라. xx법사는 사이비라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트럼프 옆의 스티브 배넌, 푸틴 옆의 알렉산드르 두긴, 보우소나루 옆의 올라부 카르발류는 허풍쟁이가 아니다.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에 책사들이 합종연횡했던 것처럼 이들이 전통주의라는 오컬트를 배경으로 두고 내셔널리즘, 포퓰리즘 등이 섞이면서 세계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추적한다. 전통주의의 기조는 현대가 암흑의 시대이고 새로운 황금시대가 오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스티브 배넌이 선택한 트럼프는 거기에 딱인 인물이면서 지금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새삼 새롭게 느껴진다. 요즘 여론조사 조작으로 시끄러운 명모씨처럼 스티브 배넌도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와 브라이트바트 같은 매체로 미국 대선에 개입했다. 물론 스물 몇살까지 소젖 짰다는 명모 씨와는 달리 스티브 배넌은 젊은 시절 <영원의 철학>(올더스 헉슬리,김영사)을 탐독했던 영적 구도자에 가까웠다. 요즘 공직자 청문회에서 지명된 후보자가 왜 이상한 말을 자꾸 하는지, 독도 조형물이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은근한 가스라이팅이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가 지원한 이런 활동은 극우계가 말하는 소위 메타 정치의 강화되고 혁신된 형태다. 정치가 아닌 문화를 통한 캠페인 전략이다. 예술, 엔터테인먼트, 지성주의, 종교, 교육을 통한 투쟁이다. 우리의 가치관이 형성되는곳은 투표소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사회 문화를 바꾸는데 성공하는 사람만이 정치적인 기회를 창조해낼 수 있다. 여기에 실패하면 미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의 상식에서 극우 정치란 공적으로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무엇이었다.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려면 메타 정치 캠페인은 둘 중 하나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자신들의 메시지를 기존의 문화채널 내부로 이물감 없이 침투시키는 방식, 아니면 자신들만의 대안적 채널을 만들어 주류 문화와 대결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위키피디아 항목들을 은근히 편집하거나 새로운 하위문화를 창조한다. 공적 교육 과정을 개정하거나 별도의 정신에 입각한 사립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전자의 방식들은 일반 대중에게서 더 넓은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해 외연 확장을 노린다. 후자의 방식들은 사회 안에 별도의 평형사회를 형성해 주류와 권력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크고 급진적인 사회로 키우고자 한다. 굳이 전통주의에 영향을 받은 우익 지식인의 저작을 읽지 않아도 이러한 전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앤드루 브라이바트가 잘 표현했다.
"정치의 문화의 하류다." - P84
저자는 콜로라도 대학 민족음악학 교수로 스티브 배넌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하며 두긴, 올라부와도 관계를 유지했다. 거기다 블랙워터에 극우 출판사, 유럽 극우 컨퍼런스 등 자극적인 소재들이 마구 등장해서 흥미를 돋군다. 만약 저자가 신중한 학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썰’정도 치부될 정도다. 소설같은 문장은 아니고 등장인물도 많아 읽는데 약간의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얇은 분량에 영화처럼 흥미진진한 전개다. 대안우파라든지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같은 단어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 우익도 이렇게 분석하는 작가는 없는 걸까? 요즘 드는 생각인데 예전에 유행했던 말처럼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 같다. 미성숙한 한국사회의 적폐처럼 묘사되던 학벌주의는 미국 공화당 중도보수의 모습이다.(<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토마스프랭크,갈라파고스) 한국에서 일어나는 젠더문제와 현상들은 한국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다.(<인셀테러>,로라 베이츠 ,위즈덤하우스) 저자가 묘사하는 세계권력의 핵심은 누군가 세계권력을 움직이는 비결이 담긴 책이 여기 있다고 해서 어렵게 구해 펴봤더니 던전앤드래곤 공략집이었다는 식이다. 대한민국 우익은 파보면 뭐가 나올까? 일본신도? 우리나라 우익이 어디에서 발현해서 어떻게 분화하고 결합했는지 연원을 따져가며 분석하면 재밌는 책이 될 것 같은데. 아마 MSG를 듬뿍 친 인스턴트 라면 같은 맛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