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형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당연히 죽음에 대한 토론이 벌어진다. 테스형은 헤어진 여친 앞에서 나 잘살고 있어 라고 객기를 부리듯이 죽음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철학자는 오히려 죽음을 반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내가 지금 죽여줄께, 하는식으로 성질을 부릴 필요는 없다. 그냥 문학적 레토릭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아마 고대 그리스는 현대와 같은 분위기 아니었을까. 지극히 물질주의적이고, 현세적인, 세속적인 시대. '건강한 육체의 건강한 정신'이라는 표어는 원래 끝에 물음표가 붙는 의문문으로, 비아냥의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고 한다. , 너처럼 건강하면 머리도 알차냐? 이 골빈 것들아, 하는 빈정거림 정도의 의미인 것이다. 어째 요즘 육체파 인스타 프로필이 떠오르지 않는가. 테스형에게 감각과 육체는(삶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철학자들의 직무인 현명함과 진리에 대한 탐구를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감각은 상대적이다. 가장 좋은 예가-마이클 셔머가 직관을 믿지 말라고 하며 종종 드는 예인데- 지동설과 천동설의 차이이다. 감각적으로는 지구가 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지동설도 감각적인 데이터로 규명되긴 하지만, 테스형에게 진리는 '추론'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여기서 추론이라는 것이 현대의 상식적인 의미인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다.) 문제는 테스형이 말하는 진리라는 것이 추론이라는 단어의 관점에서 보면 e=MC2 같은 명제적 진리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몸으로부터의 영혼이 풀려남과 분리"(67E)라는 문구에서 보면 불교의 수행과 열반의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김주일 선생님의 답변에 따르면 진리와 현명함은 모든 삼라만상의 배후에 있는 일종의 이법같은 것이다.) 고대철학이 현대의 분석철학이나 언어철학이 아닌 하나의 삶의 태도이자 방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피에르 아도) 실제 파이돈에서 테스형이 몸과 영혼,‘철학자의 수행을 말하는 대목은 불교의 염오나 위빠사나 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감각으로부터 평정심을 유지하며 완벽히 평온한 상태. 하지만, (테스형의 어법을 빌리면) 현명한 이여, 그대는 과연 어떠한 감각적 쾌락없이도 충만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인가? 퇴근 후 한 잔의 맥주와 애인과의 달콤한 키스를 모두 버리면 거기에 남는 것은 어떤 삶인가? 아니 그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감각의 특징 중 하나가 적응성이라고 한다. 아무리 자극적인 감각도 결국 적응이 되면 평범해 진다는 거다. 고통과 쾌락은 결국 짝지어져 있다는, 고통이 있기 때문에 쾌락도 존재한다는 불교식 통찰을 테스형은 두 개의 머리를 가진 한 마리 뱀으로 설명한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철학자는 왜 진리와 현명함을 열망하는가? 그것이 철학자에게 어떤 쾌감과 만족감을 안겨주는가? 그 만족감은 감각적인 쾌락과 어떻게 다를까?

이후 주제는 상기설로 이어지는데 이는 영혼이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앎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원래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인데 때문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식이다.

 

p.s. 우리는 신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신이 부르시기 전까지는 스스로 죽음을 택해서는 안된다... 소크라테스의 이 논리를 나는 중학교 때 (기독교신자인) 학생주임으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그 때 학생주임의 말은 고3 때 자살폭풍에 시달리던 나에게 죽음을 막을 수 있는 훌륭한 하나의 알리바이가 되어 주었다. 물론 여기서도 딴지를 걸 수 있다 어떤게 신의 부름인지 아닌지(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필연이라고 이야기한다.)를 어떻게 아느냐는 거다. 필연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의 겹쳐진 우연이거나 단지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이 겹친 것일 수 있다. (, 그것은 얼마든지 다른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럼 난 여전히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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