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싱어의 <될일은 된다>는 자신의 명상과 수행여정을 담은 자서전이다. 지극히 무난하고  촉망받던 경제학도였던 싱어는 어느날 자신의 에고를 경험하게 된다. 잠깐, 내가 지금 에고라고 했나? 에고가 대체 뭐지? 2010년 개봉한 <프레데터스>에 이런 장면이 있다. 주연 에이드리안 브로디가 프레데터를 피해 도망다니다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한 캐릭을 만난다. 근데 이 캐릭이 프레데터를 피해 살아남긴 했는데 그 충격으로 반쯤 맛이 가서 마치 옆에 누가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는 거다. 참지 못한 에이드리안 브로디가 총을 갈기면서 한 마디 한다. "네 머릿속 친구하고 살아"


싱어의 말인즉슨 우리가 모두 이 또라이 캐릭하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거다. 차이는 이 또라이는 직접 입 밖으로 말을 하고 우리는 안 한다는 것 뿐이다. 잠시 눈을 감아보자. 머릿속에서 끊임없는 중얼거림이 느껴지시는지? 아마 앞의 문장을 읽고 순간적으로 누가 눈을 감겠냐 하는 중얼거림부터 웃기시네 같은 중얼거림까지 생각의 단편들이 나왔을 수 있다. 친숙한 노래 곡조가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머릿속에 통제하지 못하는 생각의 흐름인 에고를 가지고 있으며 보통은 이 생각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생활한다. 자신이 아무도 듣지 않는 혼잣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싱어는 이 에고를 초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명상과 요가같은 수행으로 자신의 인생을 급변시킨다. 진짜 자신은 에고가 아니고 진정한 행복은 이러한 에고를 초월한 상태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경험은 동시대 명상가인 에크하르트 톨레나 앨런 왓츠가 말하는 것과 완벽히 동일하다.  내가 아는 이 방면의 선발대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나 라즈니쉬일 텐데 아마 같은 이슈를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리고 최초의 기원을 추적해 가면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가 버티고 계시다. 싱어 자서전이 가지는 차별점이라면 저자가 수행을 추구하면서도 세속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해탈하고싶은 욕망을 역설적으로 해탈을 포기하는 것으로 추구한 셈이랄까. 보통 우리는 거친 삶의 파도를 극복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주체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싱어에게 자신의 의지는 초월해야할 에고일 뿐이고 수행은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삶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주변의 요구에 따라서 강의를 시작하고, 집을 지어달라는 요청에 졸지에 건축가가 됐다가, 우연히 만든 컴터프로그램이 시장에 팔리기 시작하면서 회사를 만들고 사장이 된다.  나중에 백만장자 대열에 합류하는데 그가 한 "삶에 항복하기"실험의 결과는 삶은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하더라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면 "사람은 전부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정도랄까.  자. 5,60대가 되도록 청바지에 꽁지머리를 하며 크리야 요가를 수행하고 "항복 실험"을 외치는 싱어가 비합리적으로 보이시는지? 싱어 실험에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과연 100%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실제로 싱어는 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했다가(주변에서 강한 요청이 있는 경우?)어떤 경우에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그리고, 추상적인  "삶의 흐름"이라는 것도 단지 우연이거나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요인일 수 있다. 굳이 거기에 운명같은 색깔을 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에게 충분히 감정이입이 가능하다. 이 책에서 저자의 어조는 충분히 상식적이고 공감가능하다. 본래 출발이 백인 중산층에 플로리다 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생이니 자본주의 미국을 살아가는 현대인과 다를게 없다. 싱어의 가치관 역시 완전히 이질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강상중의 <살아야 하는 이유>를 보자. 이 책에서 강상중은 내 삶이 의미있냐는 질문은 내가 삶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이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라는 거다. 강상중은 빅터 프랑클에게서 이 관점을 빌려 왔는데 , 자기 앞의 모든 삶의 순간들을 조건없이 긍정하고 수용하는 이런 태도는 심리학과 철학에서 이미 있어왔으며, 싱어가 말하는 에고 포기라는 면과 일맥상통한다. 때문에 나는 마이클 싱어에게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었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요가난다에 대한 싱어의 존경은 각별하다. 토트넘 유스팀 꼬마가 경기장에서 해리 케인하고 악수하는 것 같은 느낌?  <영혼의 자서전>은 거의 성경 수준으로 떠받들여 진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스티브잡스가 자신의 아이패드에 유일하게 보관했다는 이 책을  3분의1정도 읽다가 팔아치운 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 선도를 닦는다는 신선의 책을 읽다가 두 저자가 만나면 어떨까 하고 심드렁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싱어의 경배를 접하고 나자 혹시 내가 놓친게 있나 싶어 이 책을 다시 집어들게 되었다. 일단 겸손이 필요하다. 분신술, 유체이탈,텔레파시가 꼭 불가능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여기까지는 모른 척 인정) 죽은자의 부활, 난치병의 치유?(거의 예수님 수준아닌가?) 아스트랄 유체와 영계가 등장하는 부분은 결국 읽지 못했다. (성미급한 사람은 기함, 나는 한숨이다) 다시 말하지만 관용이 필요하다. 내가 세상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로 영계가 있을 지도 모르고, 예수가 크리야 요가를 수행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런 관용을 왜 이 책에만 발휘하는 거지? 사실 읽다 보면 오래전 우리집 신문에 끼여 있던 "한국에 오신 재림예수" 찌라시가 생각난다.(재림예수가 한국인이었다) 아주 냉정하게 말하면 난 그 찌라시도 인정해야 한다. 악독하게 말하면 요가난다가 크리야 요가 홍보용으로 이 책을 쓴 거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과연 어떤 이적은 잡소리 취급받고 어떤 이적은 영적인 추앙을 받는다. 그 기준은 과연 뭘까. 요가난다에게는 힌두교라는 백그라운드가 있어서? 싱어의 명상체험을 보면 "에너지의 흐름"이나 요기 암릿 데자이와의 체험이  있다. 이는 소승불교 전통의 고엔카나 존 콜먼이 말하는 명상개념과는 좀 다르다. 나도 고엔카 10일코스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고엔카가 강조하는 것은 아니짜(무상)이지 차크라나 에너지니 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나 역시 10일코스에서 희한한 체험을 하긴 했는데 이런 애기를 하지 않으니 오히려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싱어는 처음부터 요가난다 류(?)의 체험을 했기 때문에 요가난다의 자서전에 꽂힌 걸까?  바바지나 비베카난다 등등 이 쪽 세계도 아마 만만찬을 것 같은데 잘못했다간 안드로메다로 빠질 것 같다. 요가난다의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요설일까 아니면 영적인 계시일까? 싱어형, 요가난다는 왜 좋아하시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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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08: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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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31 1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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