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 영화는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으로 포장된 텅 빈 영화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의 악의에 시달리다 결국 자신이 악이 되는 영화라면 아서가 정신과에 다니는 설정은 없는게 낫지 않을까. 조커는 왜 악인이 된 걸까? 라는 물음에 원래 그런 놈이다 라는 답변이 되어 버리니까. "가취" 때문에 번역논란이 있는 것 같은데 난 마지막 머레이와의 대화의 정확한 뉘앙스가 궁금하다. 오히려 이 부분이 대충 넘어간 것 아닐까. 영어가 짧은 나로선 그냥 느낌적 느낌. 영화가 끝난 다음 내 마음대로 조커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까 상상해본다. "흥 그게 법을 어긴 거라고? 너희는 너희들이 지킬 수 있는 것만 법이라고 정해논 거야"  " 내가 죽으면 너희는 내 시체를 밟고 갈걸"  이 대사는 그럴 듯 한걸.  이 영화는 "조롱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화가 아닐까. 이 영화에서 조롱을 참는 사람은 난장이 광대 뿐이다. 아서는 세상을 웃기는 광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웃음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웃음이 조롱의 의미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토마스 웨인부터, 월가 얼간이들은 아서의 웃음을 조롱으로 받아들인다. 아서조차 머레이의 조롱을 참지 못한다. 아서가 그를 죽인 것은 그를 무대로 불러 웃음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서는 인정을 원한다. (남자는 인정을 원하고 여자는 공감을 원한다는 오래된 격언) 영화 초반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청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하지만, 정작 인정을 원했던 머레이(아버지 대역)가 그를 비웃고 어머니가 그를 학대한 계모라는 것이 드러나자 어머니와 상징적인 아버지를 죽인다. 인정을 원한다는 것과 조롱을 참지 못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아닐까. 인정을 원한다는 것은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는 가치 있기를" 아아 안돼. 이런 문장과 이런 캐릭터에 공감한다면 상태가 안 좋은 거다. 근데 영화보고 나오는데 대기하는 관객들 보면서 크하하하 웃고 싶어지는 거 있지. 젠장. 어쩼든 배우들의 연기 디테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긴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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