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신참자, 가가 형사 시리즈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극화한 것이다. 이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영화, 내지는 드라마가 되는 것은 수순이다. 꼭 밟아야 하는 절차처럼 되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가 형사 이외에도 용의자 엑스의 헌신에서 나온 물리학자 유가와의 시리즈도 자리를 잡았다. 일본에서, 또 한국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과 영화는 많은 고정팬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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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소설을 너무 잘 적고, 일본에서 추리소설 분야에서 회장 같은 직위를 맡고 있고 돈도 많다. 그의 초기 소설은 트릭을 이용한 범죄에 추리가 하나씩 풀려가는 방식이었는데 백야행(나는 이 세 권짜리 소설을 너무나 재미있게 몇 번이고 읽었다)을 기점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분리되었다. 트릭을 풀어서 추리를 하는 소설과 가족이나 사회문제와 범죄에 대해서 쓴 소설과 가가 형사나 유가와 시리즈 소설로 나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감동이 도사리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언젠가부터 감동이 사람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도 한 때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나오는 족족 사 날렸던 적이 있었는데(회상에 젖는다). 아베 히로시도 후쿠야마 마사하루도 가가와 유가와로 계속 만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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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딸을 지키려는 부성애를 말하는 것으로 초반에는 복잡하게 사건이 얽혀 있다. 당연히 가가 형사가 이 사건에 뛰어들면서 하나씩 풀어나간다. 사건은 단순하게 현재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그치지 않는다. 교살 사건은 오래전, 거의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속에서 아사이 히로미(마츠시마 나나코)를 만나면서 매듭을 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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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고 아사이 히로미 역으로 나온 마츠시마 나나코의 연기는 몰입력이 굉장하다. 연기는 정말 잘 하는 것 같다. 근래의 한국 공포영화 장산범에서 망쳐가는 영화를 연기로 살린 염정아처럼 말이다. 게다가 캡처에서 아베 히로시가 말하는 것처럼 아주 미인이다. 일본 영화판에는 영화 유전자가 있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오래전 마츠시마 나나코의 등장은 일본 영화판의 여배우 판도를 뒤엎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쁜데 연기마저 잘 한다면 영화배우로는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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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시마 나나코가 결혼을 하면서 일본 영화계는 아마도 마츠시마 나나코 같은 배우를 찾아 헤맸고 그러다 마츠 다카코를 찾아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영화적 유전자를 이어받았을 정도로 외모, 연기력을 가졌다. 마츠 다카코는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를 통해 청순한 이미지를 각인시키며 영화에서 죽 롱런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마츠 다카코의 인기가 시들어 들어갈 때 일본 영화계는 다케우치 유코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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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유코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통해 일본인들의 감성을 건드렸고 이후 수많은 영화의 주연을 꿰찼다. 이 세 사람의 영화적 유전자는 그야말로 부모가 아이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듯 고스란히 물려받은 것 같았다. 사실 할리우드에도 미국식 영화적 유전자를 계승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미국은 영국인과는 다른 얼굴, 다른 여배우의 얼굴, 라라 플린 보일 같은 얼굴 적 유전자를 할리우드식 영화적 얼굴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다양해지는 사람들의 니즈를 맞추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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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시마 나나코, 마츠 다카코, 다케우치 유코는 나이가 들어감에 더 아름다워지고 연기도 좋아지며 여전히 주연을 맡고 있다. 그런 점이 좋다. 문소리의 영화 여배우를 보면 나이 들면 가차 없이 발로 차버리는 한국 영화판과는 다른 모습이다. 가정부 미타를 하면서 마츠시마 나나코는 더욱 영화계에서 주연을 차지하고 있고 마츠 다카코도 영화 ‘고백’이후 주조연을 하고 있으며, 다케우치 유코 역시 이혼 후 벌떡 일어나서 멋진 악몽의 조연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여전히 주연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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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영화계에도 예쁘고 연기 잘하고 멋진 여자 배우들이 많은데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나면 점점 멀어진다. 참 안타깝다. 그래서 ‘기도의 막이 내릴 때’는 그 앞의 시리즈가 있지만 그냥 봐도 되며,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교이치로 형사 시리즈를 좋아한다면 좋아할 만한 영화라 생각된다

 

 

마츠시마 나나코

 

마츠 다카코

 

 

다케우치 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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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문둔갑은 객관적인 시각을 빼버리고 남자 중학생의 주관으로 보면 정말 홀딱 빠져버릴 영화다. 기문둔갑은 2편의 예고편이나 입문 편쯤 된다. 오래전 원표의 공작왕, 서극 감독의 촉산, 골방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읽었던 광대한 대륙의 무협소설 그리고 현대판 어벤져스의 액기스를 뽑아서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공작왕은 만화로도 재미있었지만 OVA도 괜찮았다. 촉산의 광활한 활공을 현대판에 맞게 재해석한 영화 같았다. 문파의 대립과 요괴와 능력을 지닌 인간과의 결투는 중학생, 남자 중학생의 반짝이는 눈으로 감상하게 만든다. 요즘 중학생은 아닐지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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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평 감독으로 원화평은 자신의 영화에 코믹한 모습으로 자주 등장했다. 기문둔갑이라는 영화는 원화평이 1982년에도 제작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현재에 엄청나게 발달한 기술력으로 다시 한 번 기문둔갑을 제대로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화가 미국에도 많다. 반지의 제왕이 그렇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를 듣고 톨킨은 반지의 제왕을 썼다. 그 이전에는 호빗이라는 작품을 창작했다. 엄청난 상상력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상상의 대지와 종족들을 80년대, 90년대 중반까지 표현해낼 능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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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스파이더맨도 그러했다. 슈퍼맨은 크로마키 기법으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으나 스파이더맨은 그 몸 동작이나 움직임으로 빌딩을 타고 오르고 거미줄을 잡고 움직이는 표현을 영화적으로 해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영화적 기법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반지의 제왕도 스파이더맨도 제대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트랜스포머를 기점으로 영화는 그래픽 산업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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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둔갑은 비평을 하고 혹평을 늘어놓자면 끝도 없을 영화다. 82년도의 기문둔갑이 내용면으로 나았다면 지금의 기문둔갑은 그래픽으로 훨씬 낫다고 또 말할 수는 없다. 기문둔갑 만의 클리셰와 대륙의 작위적인 장면과 할리우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래픽을 따지자면 점수를 주기 싫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사춘기 냄새 폴폴 나는 중학생으로 돌아가 말똥말똥 눈을 뜨고 기문둔갑의 볼거리에 마음을 뺏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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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둔갑은 끝으로 가면 힘을 잃고 만다. 처음부터 마음을 가져다 버린 기문둔갑은 그 힘을 끌지 못한다. 그렇지만 2편이 나올 것이다. 그때는 각 캐릭터가 가진 제대로 된 능력의 무협을 볼 수 있G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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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온’은 남녀가 뒤 바뀌는 흔한, 판타지 물이다. 오래전 정준과 김소연의 체인지(도 일본의 리메이크다)부터 근래의 정소민과 윤제문의 ‘아빠는 딸’이 있고, 우리나라를 벗어나면 남녀가 바뀌는 판타지 물은 넘쳐난다. 판타지이기 때문에 리얼리티가 조금 떨어져도 괜찮게 감상을 할 수 있다. 흔한 클리셰의 향연이라도 산으로 가지 않고 그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 한다면 꽤 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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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일본의 영화로 주인공은 강 짱(이라고 불러도 될까), 강지영의 원탑(이라고 해도 될까)에 가까운 영화다. 강지영은 그동안 드라마, 영화에서 본격적인 입지를 가졌고 또 그걸 굳혀가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카라의 강지영의 팬이라면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연기는 3년 전 암살 교실에서의 이리나 센세이의 수평선에 있다고 보면 되겠다. 하지만 강지영은 ‘다른 하늘 아래 당신의 하늘, 나의 하늘’ 같은 영화에서는 멜로 연기를 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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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인이 주인공으로 나오기가 참 어렵다. 사실 한국 영화에서도 외국인이 주연을 한 경우는 거의 없다. 다니엘 헤니가 김영철과 함께 한 마이 파더가 있었지만 살인마의 실화 이야기라고 혹평에 욕을 먹고 기억에서 소멸했다. 그런 영화가 있었다. 한국 영화에 외국인이 조연으로는 등장을 많이 하지만 주연이나 원탑으로 영화를 끌어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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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강지영은 열심히 하고 있고 그 노력을 인정받고 있다. 레온에서 강지영은 몸속에 다케나 나오토가 들어와 그 사쵸의 흉내를 내는 연기가 웃음을 유발하다. 그리고 강지영의 오버에 지칠 때면 나오토의 몸 속에 들어가 버린 강지영을 흉내 내는 나오토의 연기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캡처에서처럼 실제로 이런 느낌,이라며 화면 전환을 하는데 강지영과는 다른 웃음 유발의 코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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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영은 영화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하아?’를 자주 하는데, 정말 현지인처럼 ‘하아?’를 한다. ‘하아?’ 이 말을 잘 해야,  찰지게 해야 일본인 같다. 영화 속에서 일본인에 섞여 어색하지 않게 말하는 건 ‘하아?’에 달려있다. 물론 순전히 나만의 생각이다. 이 ‘하아?’를 어색하게 하면 영화 속에서 일본인 같지 않아 보이며 영화의 흐름도 끊어진다. 이 ‘하아?’를 일본인처럼 하려면 연습만으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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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에 대해서 잘 이해하려면 교열 걸에 나오는 이시하라 사토미의 ‘하아?’를 떠올리면 된다. 사토미의 ‘하아?’는 정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하아?’가 아닌가. 한쪽 입꼬리가 좀 더 위로 올라가며 미간을 찡그리고 ‘하아?’, 이렇게.  일본 남자배우로는 기무라 다쿠야의 ‘하아?’도 좋지만 근래에는 형사 유가미에서 키미키 류노스케의 ‘하아?’ 정도를 떠올리면 되겠다. 류노스케는 아역배우 출신으로 차곡차곡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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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아?’에는 짧은 시간 안에 배워서, 또는 연습해서만은 되는 게 아니다. 이 ‘하아?’를 영화 속에서, 영화 속 캐릭터에 맞게 해야 현지인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레온의 강 짱, 강지영은 정말 영화 속에서 타카나시 레온 같다. 영화 레온은 팝콘무비로 보면 괜찮은 영화다. 일본식 오버가 영화 가득하지만 그 때문에 이런 일본식 판타지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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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네 편의 옴니버스 공포영화로 구성되었다. 1시간 2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속에 네 편이 들어있다. 이 영화의 제목을 모르겠다. 화면은 넷플릭스의 화면 같다. 넷플릭스는 넷플릭스 특유의 화면이 있다. 마치 교촌치킨 만의 실내장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는 영화가 끝나고 중간을 이어주는 공간에 또 다른 시그널 화면 같은 것이 있는데 인형극처럼 보이는 것으로 이것 역시 공포스럽다. 일본의 기묘한 이야기의 미국식 공포 영화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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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시간 안에 공포영화를 압축해서 넣었기에 상상력을 가동해야 한다. 멍하게 보다 보면 뭐지? 하게 된다. 그러니 머리를 굴려야 하고 초현실적인 내재적 감성도 끄집어 내야 한다. 총 네 편이지만 첫 번째 옴니버스 영화 ‘상자’를 리뷰하려고 한다. 캡처한 화면이 뒤로 갈수록 징그러우니 싫어하는 사람은 뒤로 가기를 누르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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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대니의 가족은 전철에서 상자를 든 한 남자의 옆에 앉게 된다. 대니는 남자에게 상자에 대해서 묻고 엄마와 누나는 성가시게 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괜찮다고 하며 상자는 선물이라고 한다. 대니는 남자에게 상자 안을 볼 수 있냐고 하고, 엄마와 누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남자는 대니에게 상자 안을 보여준다. 상자를 본 대니의 얼굴은 대번에 굳어지고 남자는 가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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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누나가 대니에게 상자 안에 대해서 물어보니 대니는 기억을 못 하는 투로 대답을 하고, 저녁에 밥을 먹는데 대니는 밥을 먹지 않는다. 대니는 음식 꾸러기인데 먹지 않는다며 누나도 약을 올린다. 누나는 맛있게 밥을 먹는다. 대니는 이제 가서 놀아도 되냐고 묻고 나머지 가족만 밥을 먹는다. 대니는 그다음 날에도 음식을 거부한다. 학교에서 피자를 먹었는데 대니는 피자도 먹지 않았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고 밥을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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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날에도 대니는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고 밥을 먹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대니가 꽤 부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대니를 의사에게 데리고 가려 하지만 넘어간다. 그리고 그다음 날 대니가 좋아하는 스파게티를 내놓았는데도 먹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부모는 데니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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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밤 데니는 누나와 그 상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 뒤로 누나도 음식을 거부한다. 이제 식탁에는 아이들이 빠진 두 사람만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된다. 불안했던 아빠는 대니의 방에서 조용히 그 상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아빠도 음식을 거부하게 된다. 엄마를 제외한 이제 모든 가족이 식사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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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든 엄마가 눈을 뜨니 아빠와 아이 둘이 엄마의 팔과 다리를 잘라서 접시에 담아서 맛있게 먹는다. 엄마는 마치 마취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살아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영화 속 하나의 장치다. 이 장면은 암시로 보인다. 장면이 바뀌고 맞이한 크리스마스에는 엄마를 제외한 모두가 마를 대로 말라빠진 미라의 모습처럼 보인다. 결국에는 병원에서 모두가 죽는다. 그리고 엄마는 전철을 돌아다니며 그 상자를 든 남자를 찾는다. 그 상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고 싶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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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단편 공포영화의 맹점은 상상력을 건드리는 맥거핀과 트리거의 활용이다. 상자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 대니를 비롯한 가족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서서히 공포를 준다. 익숙한 것이 어떤 무엇인가를 통해 낯선 것으로 바뀌게 되면 우리는 대단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점프 스케어보다 이런 종류의 상상력의 공포가 좋아서 그런지 4편 중에 ‘상자’편은 몇 번을 봤다. 인육을 먹는 장면이 환영처럼 지나간 것을 보면 상자 속의 ‘그것’은 식사를 거부하게 하고 인간을 먹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거나, 그렇게 하게끔 하는 ‘어두운 존재’가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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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니를 비롯한 나머지는 음식은 거부하지만 인간은 먹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은 스웨덴의 장편영화 ‘렛미 인’을 봐도 잘 나타난다. 비록 자신은 이엘리에게 물려 이종이 되었지만 인간을 죽이기를 거부하고 창을 통해 투과된 햇빛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재가 되는 장면이 있다. ‘렛미 인’은 참 슬프고 어둡고 여운이 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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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옴니버스 식 네 편의 단편영화는 각각의 색깔을 확실히 지니고 있다. 세 번째 영화는 10분 미만인데 공포가 확 등장했다가 휙 가버린다. 마지막 단편영화는 미국식 종교 이야기다. 그동안 공포영화를 아주 많이 봤는데 꽤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다. 상자 속의 선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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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고 끝나갈 무렵 레이디 버드는 성장하여 크리스틴이 된다. 그리고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크리스틴이 엄마에게 전화를 할 때를 기점으로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보고 난 후, 같이 성장해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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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제대로 된 성장통의 영화다. 특별하지 않고 하천의 개울물이 흘러가듯 흐르지만 그 속에서 방황과 고통을 받고 상처를 주며 우리 모두는 그렇게 성장해왔기 때문에 레이디 버드를 보고 있으면 정말 나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그래서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으로 성장했을 때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묵직한 무엇이 울컥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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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버드의 장면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반짝이고 보석 같은 것으로 꽉꽉 채워져 있다. 청춘일 때 느꼈던 처절한 상처가, 곪을 대로 곪고 곯아서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내모는 자신 속의 자신을 어쩌지 못했던 그때의 상처가 레이디 버드를 보며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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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보다 더 싫은 이 지긋지긋한 세크라맨토를 떠나고 싶은 크리스틴은 더 싫은 가톨릭 고등학교를 일 년이나 다녀야했다. 크리스틴에게 최고의 적은 엄마이다. 시시때때로 사사건건 따지고 들고 괴롭히는 사람은 엄마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낮은 크리스틴은 이름을 레이디 버드로 바꾸고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 일연의 일들이 시시하기만 하다. 특별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크리스틴의 모습에서 그녀의 세계는 엄마, 남자친구, 그리고 절친에서 행복함을 느끼면 되는 것이지만 잘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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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창피하게 생각하여 학교 몇 블록 전에서 내려달라는 크리스틴을 보면서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고 보듬어 주는 모습에서 영화의 태도가 굉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항에서 운전을 하면서 웃으며 우는 엄마의 모습에서 그 태도는 더 확실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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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 온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이 되었을 때 운전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에서 성장한 모습이 스크린으로 뿜어져 나오면서 이제 크리스틴은 뉴욕에서 더욱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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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이 참 예뻤다고 엄마에게 전화를 하며 말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의 청춘을 투영시킬 수 있었다. 크리스틴의 그 아름다움이 너무나 찬란하여 갈등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데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은 버려야 할 자신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서, 부모가 지어준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일부, 아니 전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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