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리뷰라는 걸 긁적이는데 내가 쓴 리뷰는 꼭 13세의 일기 같은 느낌인데 이 리뷰는 글을 쓴 사람보다 그 글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간의 습관의 무서움과 양면성의 심리에 대해서 묘사를 하고 있다고 리뷰어는 말하고 있어서 오늘 아침 바다를 보며 주인공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리뷰가 좋아서 리뷰를 다시 리뷰하고 싶다

 

카페에서 고맙게도 서적 코너에 공간을 마련하여 책을 홍보하게 해 주었다. 화려한 잡지책에 밀리겠지만 그래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간의 삶이라는 게 생과 사로 이루어져 있지만은 않아서 그 사이에 작은 틈이 있으면 발을 집어넣고 어이 춥구만, 하며 슬며시 끼어들기도 하다 보면 틈이 벌어져 몸이 반 정도 들어가기도 한다

 

하루키의 잡문집에 - 우리는 결국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라고 쓰여 있다.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가 불안하고 걱정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 사회 시스템이 수용되는 것을 망설이고 거부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두고 하루키는 '전환'이라 했다. 사회 자체가 목적을 상실했기에 그렇게 불안정한 땅 위에서 우리가 불안하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회를 목적을 갖추고 사회적 발전이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지는가 하는 문제에 돌입하면 그것참, 하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금 하는 것을 즐기고 현재를 고민하는 게 개인의 행복에 조금은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든다. 타인에 비해 걱정이 덜 헸던 것 같다. 사진에 미쳐 있던 20대 때에는 카메라를 들고 겨울 여름 훌 떠나 그곳의 사람들을 담으려고 했다. 그때에도 이게 돈이 돼? 이게 자본이 나와? 같은 말을 늘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돈 걱정을 하던 그들과 지금의 나와 격차가 크냐면 그렇지도 않다

 

겨울에는 깊은 산속을 카메라를 들고 헤매다 굴러떨어져 기절을 하기도 했고 산사에서 며칠 머물면서 빗질만 신나게 한 적도 있다. 새벽의 수산물 시장에서 상상이상의 개체가 쌓인 고등어 산 앞에서 한 마리 한 마리 다듬는 아낙네들을 보며 이 위대한 일을 꼭 멋지게 글로 적겠다 다짐한 적도 있었다. 여름에 강원도의 어떤 바다에서 해파리떼를 담기 위해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해파리떼에게 물려 내 꼴이 네뷸라가 되어 며칠 누워있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나에게 있어 큰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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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 카페나 맥주를 마시러 가서는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자주 보는 주인이나 아르바이트 학생이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더불어 그 안에 있는 음악도 묻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는 주절주절 음악이 어떻니 하면서 힘이 빠진 괄약근처럼 줄줄 해버리고 만다.

 

두세 개 정도의 카세트테이프를 놓고 번갈아가 가면서 음악을 듣는데 노래가 끝이 나면 플레이어를 탁 열어서 틱 빼서 착 다시 넣고 툭 버튼을 눌러 음악을 듣는 행위가 재미있는 모양이다.

 

휴대전화로 음악을 듣는 것에 비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나 카세트 테이프가 많고 카세트플레이어가 있으니까 듣는 것뿐이다. 음악이라는 게 음식처럼 추억을 소환하는 연쇄반응을 하기에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으면 이 음악을 열심히 들었던 그때의 랜드스케이프가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유행이라는 게 정말 돌고 도는 것인가를 실감한다. 오늘 이전에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들이 오늘 이후로는 신기해하며 관심을 가진다. 나도 어쩐지 어딘가에서는 또 여봐란 듯이 슬며시 꺼내서 탁 탁 거리며 불편하게 음악을 듣는다.

 

일명 워커맨이 대단히 유행일 때가 있었다. 소니의 워커맨 세계를 위협했던 아이와 워커맨이 있었다. 아이와 워커맨은 몹시 심플하며 리모컨이 달려있고 외향이 정말 예뻐서 누구나 빠져 들만하게 만들었다. 음질도 좋아서 마구 앨범을 구입하고 싶은 욕망이 분출되기도 했다. 이런 세계에 도전장을 내던진 것이 삼성의 마이마이였다. 하지만 그 도전이 쉽게 먹혀들지는 않았다.

 

하루키의 에세이 중에도 워커맨에 대한 글이 있다. ‘오디오 가게에서 산 두 번째 신형 워커맨은 첫 번째에 비해 훨씬 작고, 무게도 절반에 가깝고, 오토리버스 장치가 달려 있는데다 충전도 할 수 있다. 값도 천 번째 것보다 싸다. 한 기계가 사 년 사이에 이렇게나 진보하다니(하루키는 첫 번째 워커맨이 4년 만에 아작이 난 것에 대해서 앞서 투덜거려놨다), 감개무량이라는 좀 과장스럽지만 정말 감탄스럽다. 적어도 인간이 진보하는 속도에 비하면, 그 빠른 속도에 그저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다’라고 했다.

 

최근의 과학기술이나 IT 기술을 보면 4년이 뭔가, 1년 만에 항상 새로운 기술이 쏟아지고 그것에 대한 발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발전하는 과학으로 아직까지 날씨를 잡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돌고 도는 유행처럼 아주 예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다. 70년대 초 대한민국의 하늘은 지금처럼 먼지가 가득하여 일하고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들의 코밑이 새카맣게 되어서 얼굴을 잘 씻어야 한다고 했던데.

 

유행이 지난 워커맨이 신기한 것처럼 요즘 하늘도 신기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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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넘기지 마세요. 무서운 장면을 캡처했음.

 

한국에는 공포영화라고 부를 만한 영화가 없을까,라고 하는 공포영화 마니아에게는 흡족할 한국의 공포영화다. 물론 마나아라면 이 영화는 봤을 것이다. 14년에 나온 영화로 아직 한국에서는 이만큼 무섭고 고어적이고 경악스럽고 상상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자극을 주는 공포물은 나오지 않는 듯하다.

 

이 영화에서 주연은 이름이 알려진 고은아지만 또 다른 주연인 연송하가 열연을 했다. 연송하가 이 영화의 이야기를 죽 이끌어 가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연송하가 영화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영화가 어떤 식인지, 영화는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전부 보여준다.

 

영화는 청소년 관람불가다. (내용은 알아서 찾아보기 바랍니다) 욕설이 난무하고 비제이로 접속자 수와 ‘좋아요’를 받기 위해 금기를 넘는다. 그 수위가 상상의 경계를 넘어가는데 거기에 작은 화면으로 보는, 관음의 병에 걸린 시청자들의 본능을 자극하고 본색을 드러나게 한다.

 

이런 현상은 요즘 방송 취지를 망각하고 청취율 질주를 하는 골목식당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음식 루저로 보이게 만들어 비슷한 서민이 루저로 보이는 화면 속 식당. 주인을 씹는다. 한 개인을 욕하는데 대중이 모니터로 결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폰을 들고 골목식당에서 루저에서 벗어난 곳을 찾아가 다시 개인 방송을 한다. 개인방송이라도 광고가 끼어 들고 자본이 들어오고,,, 여기서 사람들은 흑과 백으로 갈린다. 중간은 없다. 모두가 우르르 씹고 욕을 하는 것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는 대단하다.

 

그러니까 가난하게 자란 아이가 성공을 하여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갑을 관계를 확실히 맺는 것과 흡사하다.

 

영화의 미장센은 눈에 드러나는 타격은 없다. 소리와 어두운 화면 구성 속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에 따라 보는 이들이 상상을 하게 만든다. 그 상상은 몇 분 후 그대로 현실이 된다. 배가 갈리고 그 속에서 장기가 밖으로 나오고 고은아는 아파하다가 몸이 반으로 잘린다. 물론 타격이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보는 이들의 상상으로 그 장면이 연출되게 만들었다.

 

연송하는 살인마에게 잡혀 살기 위해 살인마에게 몸을 팔기로 한다. 하지만 욕망은 결국 죽음으로 가고 만다. 이 영화를 보면 거대한 도심지에 있는 수많은 모텔은 고립이며 고독, 폐쇄, 개인의 욕망이 집합된 하나의 또 다른 세계다. 마치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알파빌’ 같은 곳이다.

 

치안이 잘 되어 있는 서울의 거대 도심 속 모텔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 일단 터지고 나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욕망을 푸는 곳, 지하에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그래서 인간도 알지 못하는 지하실과 하수구들, 꽈리처럼 꼬인 전선들이 인간을 공격한다.

 

폭력이 마치 정당화되어 벌어지는지는 도심 속 고독의 공간에서 그 모든 것을 라이브로 생방송을 하는 모습은 14년이나 지금이나 5년후나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깉다. 욕망과 본능을 제도가 막을 수는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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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빅은 참 한결같은 그룹이다. 멤버의 변화 없이 지금까지 주욱 같이 왔다. 미스터 빅의 보컬인 에릭 마틴의 목소리는 너무나 매력적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목소리에 이렇게 잘생긴 얼굴에 무대매너까지 좋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에릭 마틴은 스튜디오 버전과 라이브 버전의 목소리가 거의 변화가 없는 정말 희한하고 요상한 사람이다.

 

에릭 마틴은 소녀소년 같은 얼굴에서 점점 더 멋있어져서 그런지 여자들의 애정공세는 현재에도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에릭 마틴의 목소리에 한껏 빠져든 나는 어떤 소설 속에서도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학교 축제 무대에 올라 에릭 마틴의 노래를 부른다고 써 버렸다. 미스터 빅이 ‘투 비 위드 유’로 한국에서, 아시아에서 인기가 있을 때 이게 무슨 록이야! 했던 록 마니아들이 많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미스터 빅의 고출력 고사운드 록이 앨범에는 가득하다. 그들은 메탈밴드였던 것이다.

 

부드러운 것 같은데 갈라지는 허스키가 끝에 살짝 묻어나는, 아무튼 에릭 마틴의 목소리는 잘 담근 갓김치 같은 그런 맛이 나는 소리였다. 미스터 빅은 지금까지도 투어를 계속하고 있다. 일본은 뭐 수도 없이 갔고 우리나라에도 작년까지 왔다. 기타를 치는 폴 길버트, 일명 길벗 아저씨는 꼭 코미디언 같은 얼굴로, 코미디언 같은 표정으로 연주를 하는데 기가 막힌다. 마르고 목이 길어서 꽤 멋있어 보여야 하지만 길벗 아저씨는 그냥 친근하다. 미스터 빅이 최고를 달릴 때 부산 공연을 와서 드릴로 막 연주를 하고 이빨로 막 그냥.

 

에릭 마틴은 나이는 들었지만 살도 찌지 않고 목소리 또한 변하지 않고 무대 매너 역시 청중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음악을 즐기는 것 같다. 베이스에 빌리 시한 역시 변함이 없다. 길벗 아저씨도. 단지 드럼을 치던 펫 토페이가 2018년 2월에 사망함으로 드러머가 바뀌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 빅의 시끄럽고 사운드가 강한 음악이 좋지만 ‘저스트 테이크 마이 하트’같은 노래가 에릭 마틴의 목소리를 잘 담아냈다고 본다. 그러니까 에릭 마틴이 ‘졋 텍 마 핫’하면 앞 줄의 여자들이 꺅 하며 사르르 무너졌다. 여러 공연이 그렇지만 미스터 빅의 공연을 보는 관객들의 표정은 정말 ‘행복해’이다. 그건 아마도 미스터 빅이 지금까지 주욱 끌고 온 그들만의 에너지가 공연 중에 팬들에게 막 뿌려져서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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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위 맘스틴은 잉베이 맘스틴, 잉위 맘스테인 같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며 서로 자기가 알고 있는 이름이 맞다며 잉위 맘스틴의 팬들은 서로 우기기도 했었다. 잉위 맘스틴은 잘 생긴 얼굴로, 날씬한 근육질로 늘 바로크 시대의 레이스가 달린 의상을 입고 기타를 미친 듯 연주했다. 마치 들판을 뛰어다니는 백마처럼.

 

2015년에 서울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역시 육중해진 몸이었다. 하지만 실력 만은 출중했다. 요즘 보면 마를린 맨슨도 섹시함은 몽땅 사라지고 항아리 같아진 몸으로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뭔가 딱해 보인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수만은 팬들이 응원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이승환은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잉위 맘스틴의 음악을 제대로 듣는 건 역시 음악감상실에서였다. 요즘에도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이동을 할 때에도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음악을 듣지만 리스닝보다는 히어링 같은 개념이다. 그저 듣는다,라는 의미다. 적어도 음악감상실에서 듣는 잉위 맘스틴의 음악이라는 건 몸이 음악에 잠기고 음악에 머리가 감싸이고 온 정신이 음악에 맡겨지는 느낌이었다.

 

집중적으로 음악을 들으려고 했다. 음악밖에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음악을 듣는 것이다. 다른 건 전혀 필요 없고 필요하지도 않았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정도 듣고 싶은 음악을, 오로지 음악을 듣는 것에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음악감상실 정도는 없어지지 않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가 음악을 들으러 갑니까? 온천지가 음악인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도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아직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음악 따위 카페에서 들으면 되잖아요, 할지도 모르지만 음악을 들으러 카페에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극장처럼, 수많은 가수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면 음악 감상실에서 먼저 틀어준다. 오로지 음악에 몸을 맡기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라는 것이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천장, 벽면, 바닥 그리고 앉아 있는 의자에서 세밀한 리듬까지 나온다. 그러면 집이나 차에서 또는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과는 다른, 확실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

 

오래전에는 음악을 들으려면 음악이 있는 곳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음악은 대부분 귀족문화였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당연히 음악이 있어야 했고, 음악을 연주하려면 악기와 악사가 있어야 하고 그 공간이 있어야 가능했는데 일반 서민들은 그런 곳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많은 음악가들이 귀족의 녹을 받으며 음악을 만들었고 그 대부분이 귀족 음악이었다. 베토벤도 모찰트도 바그너도 대부분 그랬다.

 

사람들이 공연장에 품을 들여가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오케스트라를 듣는 건 분명히 그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음악 소리를 크게 해도 와서 시끄럽다고 조용히 해 달라고 하는 요즘이다. 음악이 소음과 비슷해져 버린 건 주위에 너무 많은 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서 들리는 음악은 그저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감상실에서는 오로지 음악이 흐른다. 침대처럼 편한 소파에 앉아 흐르는 음악을 듣는다. 때로 잉위 맘스틴 처럼 강력한 기타 연주는 몸을 부르르 떨게도 한다. 음악에는 어떤 그런 마력이 존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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