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영화는 달려라 하니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극장에도 비슷한 시기에 걸렸고, 또 비슷한 시기에 오티티로 풀렸다. 100미터가 달려라 하니에 비해서 훨씬 재미있다. 너무 미안한 말이지만 달려라 하니 극장판은 이 영화 [100 미터]의 십 분의 일 만큼도 따라가지 못한다.
영화 속 25년의 서사를 이렇게 잘 풀어냈다. 100미터 단거리 하나에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대부분의 감정을 표현했다. 마지막 고통을 딛고 토가시가 전국 대회에서 출발하기 직전에는 보는 내가 조마조마했다. 보는 이들로 그런 마음을 끌어냈다.
만화 주제에 잠깐의 기쁨을 맛본 후 무너지는 감정의 장면은 몰입 그 자체였다. 불안은 극복하려는 게 아니다. 단거리를 달리는 것뿐인데 그 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선수들에게 존재한다. 그러나 불안을 극복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안은 더 들러붙는다.
경쟁자를 이겼을 때의 기쁨보다 졌을 때 받아들이는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 패배했다고 느끼지 않는 것, 결코 좌절하지 않는 것, 졌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고,라며 말하는 토가시가 이미 눈물을 흘리며 무너질 때 마음이 아프다. 어째서 달려라 하니에서는 이런 절박함이 없었을까.
천재들이 한 번 패배로 굴러 떨어지는 삶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찾고 싶지만 현실은 너무나 냉정하다. 1등이라고 생각하면 특등이 나오고, 오늘 최상의 컨디션인데 더 한 컨디션의 놈이 나타나고. 그러나 붕괴 속에서 자신을 잡아가는 모습이 마냥 슬프지는 않다. 그래서 좋다.
현실이 뭔지 모르면서 현실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 현실을 적확하게 꿰뚫지 않으면 도망을 쳐도 그게 도망이 되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정지 상태밖에 되지 않는다. 도망을 치더라도 현실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도망을 칠 수 있다면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 100미터 경주.
이 안에 희망, 실망, 영광, 좌절, 피로, 만족, 초조, 성취, 희로애락 이 모든 감정이 다 있다. 이 영화에는 빌런이라도 스테레오 타입이 없다. 전부 그 캐릭터에 몰입하게 만든다. 하니의 주나비 일당은 그냥 스테레오 타입이다. 게다가 100미터에 나오는 캐릭터의 운동화를 봐라, 어떤지.
토가시를 보니 우리나라 양예원이 생각났다. 초신성이라며 천재가 나타났다고 초등학교 때부터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중학교 때까지도 천재 양예원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후, 방치된 채 지금은 거의 소식도 알 수 없다.
현재 양예원은 전담 코치도 없이 강원 소속인가? 거기서 뛰고 있지만 초등학생 수준밖에 안 된다. 근래 양예원의 인터뷰를 보면 그 모든 걸 인정하면서 무너진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덤덤하게 이야기하는 양예원은 100미터에서 주인공 토가시처럼 보였다.
극복을 해서 자신을 좋아하는 팬들을 위해 다시 일어서겠다는 인터뷰였다. 달리는 속도가 아닌 달리는 이유와 방향에 대해서 말하는 양예원은 100미터 주인공 토가시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100미터는 너무 좋은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