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르고르 란티모스의 금기를 깨버린 란티모스식 영상은 불쾌한 골짜기를 걷는 느낌이지만 멈출 수 없다. 세상의 모든 통로와 단절된 생활을 하던 아이들은 어른이 되었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아이 때 멈춘 후 그대로다.
그럼에도 본능은 살아있어서 육체를 탐하고 접촉에 의한 흥분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형제자매들 지간에도 금기를 넘어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마당에서 물을 틀어 놓고 놀 때에는 어린이들처럼 에너지를 전부 소진시켜 가며 논다.
나지 말아야 할 곳에 난 송곳니가 내내 신경 쓰이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교육을 받고, 매일 고양이가 괴물이라고 듣게 되면 고양이가 진짜 괴물로 여긴다.
단순히 친구 같은 개로 키우길 원하십니까? 주인을 지켜주고 명령에 복종하는 그런 개를 원하지 않으세요?
대사는 영화를 관통한다. 송곳니는 요르고스를 파격적인 감독으로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된 영화다. 송곳니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억압적인 독제체제 속에서 히틀러처럼 끊임없이 라디오를 통해 세뇌당하고 학대당하면 사람들이 바보가 되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대들지 않고 그저 먹을 것만 주면 말 잘 듣는 바보들이 국민이면 최고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의미는 축소해서 보면 한 가정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절대권력을 이야기한다. 가족이란 너무나 애매한 집단이다. 가족은 공포와 슬픔을 동시에 지닌 정의할 수 없는 조직이다. 가정집의 대문이 닫히는 순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 계급이기 때문이다. 교육문제, 부동산문제, 성차별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다. 자본뿐만 아니라 문화,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라고 정희진 여성학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친밀한 사람에게 ‘가족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특별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재하는 가족은 특별함을 일찌감치 지나쳐 온갖 문제가 산적한 집합체가 되어 있다. 우리들 내면에 간직된 상처의 가장 깊숙하고 거대한 상처는 대부분 가족으로부터 얻은 것이라고 김소연 시인은 말한다.
이 영화는 불쾌함의 연속이다. 벌을 줄 때에도 가그린을 먹이고, 영화를 봤다는 이유로 비디오테이프로 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물건의 이름도 전부 다르게 말을 하고, 고양이를 죽인 아들에게 고양이가 괴물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아버지는 밖에서 일부러 고양이에게 공격당한 것처럼 옷을 찢고 피를 얼굴과 옷에 묻혀서 들어온다.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이런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가족을 사회에서 매장을 시키고 집 안에 매몰시키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인데 아버지는 지치지도 않고 하는 것에 놀라게 된다.
아들을 위해 데리고 오던 여자가 오지 못하자 여동생과 누나 둘 중에 하나를 고르게 하는 장면도 불쾌하다. 나지 말아야 할 곳에 비어져 나온 듯한 송곳니를 빼는 장면도 불쾌하다.
결국 영화는 불쾌하게 끝이 난다. 그럼에도 끝까지 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우리 인간이 불쾌한 골짜기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