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봄의 느른한 봉제선이 만져진다
어느 마당에서는 곡 풀려나갈 것 같은 실밥처럼 목련이 진다
심재휘 – 높은 봄 버스 중에서
라는 시가 어울리는 오늘이다. 목요일 아침, 일어나서 이 시를 읽었다. 긴 버전이 있는데 읽고 나면 겨울을 지난, 아직 뜨거운 봄 햇살이 오기 전의 기분 좋은 홑이불을 얼굴에 비비는 기분이 드는 시였다. 목련이 지고 있다. 목련이 지고 나면 세상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뜨거운 계절 속으로 들어간다.
복도를 나서는데 복도에 꽃향기가 확 났다. 프리지어 향이라고 하기에는 진하고 장미향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수줍은, 꽃향기가 이렇게 복도에 확 나니 나는 그대로 잠시 서서 향기를 맡았다. 그것이 나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좋은 냄새가 나면 그대로 멈춰 서서 잠시 맡고 있다. 장점은 혼자라서 그 좋은 향을 방해받지 않고 맡을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누구와 함께 라면 꼭 왜 멈추냐는 소리를 듣는다.
4월은 분명 잔인한 달이다. 흐리고, 뿌옇고, 비 오고, 돌풍에 황사에, 초미세먼지가 최악 수준에 하늘하늘 예쁜 꽃잎은 한 번의 비로 죄다 떨어져 버리고, 매일 쏟아지는 뉴스에는 온통 거짓말을 늘어놓는 기사들뿐이다.
언젠가부터 표현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아무 말이나 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책임 없는 표현은 자유롭게 해서는 안 된다. 4월 16일에 실시간으로 고층에서 뛰어내려 극단적 선택을 한 여고생의 사건이 있었다. 거기에 대고 416인데 물에 빠져 죽어야지 왜 뛰어내려서 죽나. 같은 댓글이 달렸다. 이런 댓글이 익명을 내걸고 엄청나다. 이런 것도 표현이랍시고 자유를 말한다. 이것이 자유일까.
태영호는 재산이 20억이나 된다. 그게 북한의 정보 제공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예전에 황장엽이 40억 정도를 정보 제공료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재산도 많은 사람이 김구 선생과 김일성을 동일한 시기에 활동한 것처럼 말을 했다. 김구 선생이 김일성에게 영향을 받다니, 김구 선생과 김일성은 나이 차이가 거의 40살이나 난다. 김구 선생이 한창 일 때에 김일성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국회의원이나 되어서 표현의 자유랍시고 하는 걸까.
가만 생각해 보면 그 짝의 머리가 좋은 누군가가 태영호에게 이렇게 말을 했을 수도 있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을 해서 재선, 3선을 유지하려면 어떻든 사람들에게 이름 석자를 각인시켜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이 사고를 한 번 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아무리 좋은 법안을 내고 통과시키고 좋은 일을 해봐야 국민들은 관심이 없고 이름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고를, 큰 사고를 한 번 치면 사람들은 그 국회의원을 욕할지라도 기억을 한다. 이게 한국사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때의 발언은 잘못했다고 넘어가면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이고 넘어간다. 사람들은 단순하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대중은 개돼지다. 그걸 알아야 한다고 누군가 말을 해줬고 태영호는 한 수 더 떠서 한 번의 사고를 치는 게 아니라 거의 매일매일 발언을 할 때마다 사고를 친다. 어떻든 이렇게 되면 신문 1면에 실리게 되고 네이버 정치 부분을 모조리 차지하게 된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된다. 그 당의 대표는 누군지 몰라도 태영호는 알게 된다. 태영호가 국회의원이 된 강남에서 한 아주머니를 붙잡고 여기 국회의원 탈북한 사람이에요,라고 했더니 정말요?라고 한 이야기가 있다.
존재감이 없기는 야당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답답한 경우가 있을까. 야당에게는 자유를 좀 표현하라고 하고 싶다. 어제는 올 들어 가장 최악의 대기질이었다. 정말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잔인한 4월이지만 오늘은 아파트 복도에 꽃향기가 났다. 인공적으로 좋은 냄새를 제외하면 자연적으로 좋은 냄새는 꽃향기밖에 없다. 그 외의 좋은 냄새는 대부분 인공적인 향이다. 꽃향기도 가까이 가야만 맡을 수 있는 꽃이 있고, 멀리 있으면 은은하게 향을 풍기는 꽃이 있다. 봄이 되면 매년 프리지어를 한 다발 구입해서 집에 두고 향을 맡았는데 작년에는 건너뛰었다. 이럴 때는 단순한 게 좋다. 좋은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나아지고, 좋은 시를 읽으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최고야,라고 생각한다.
비가 온 날이다.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나왔는데 비가 그쳤다. 아무리 비가 와도 나처럼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미친 사람들은 꼭 있다. 올해는 2월에 하루 빼고는 매일 달렸다. 그래봐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다.
비가 오니 꽃잎이 전부 비바람에 떨어졌다. 흐드러지게 피더니 흐드러지게 떨어졌다. 그 위에 이렇게 서 있으면 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면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장르는 로맨스일 것 같지만 스릴러. 꽃잎이 떨어지는 봄에만 살인을 저지르는 한 사이코패스의 이야기.
노을이 예쁜 날이었다. 자연은 늘 경이로운 색감을 보여준다. 하늘의 색과 노을의 색과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경계의 색이 예술품처럼 펼쳐진다. 매일 볼 수 없어서 이 아름다운 마법의 풍경이 펼쳐질 때면 한참을 바라보다가 조깅을 한다.
흐린 날이다. 해도 뜨지 않고, 비가 그친 뒤 반나절이 지난 저녁이다. 아직 유채가 곳곳에 있고 가만히 있으면 쌀쌀한 날이다. 그러나 조깅을 하고 10분이 지나면 땀이 난다. 그런 날이다. 봄날, 4월의 흐린 날은 그런 날이다.
위의 날과 같은 날일까. 강물의 파동이 없고 아주 고요한 날이다. 보통은 낚시꾼들이 나오는데 쌀쌀해서일까, 비가 온 탓일까. 낚시꾼들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보는 딱 이 뷰가 좋다. 양 옆으로는 아파트단지가 죽 이어지지만 정면으로는 아파트가 없는. 그래서 양 옆의 아파트 단지를 잘라낸 사진도 괜찮을 것이다.
비록 향기는 없지만 봄이면 거리 곳곳에 이렇게 형형색색의 꽃들이 사람들을 반긴다. 예전에는 도로에 이렇게 꽃을 심어 놓으면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은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거리의 꽃들도 곧 시들 테니 예쁘게 피었을 때 많이 봐두자.
달렸다. 신나게 달리고 싶은데 이제 마음대로 신나게 달려지지가 않는다. 힘들다. 그래도 힘들기 직전까지는 신나게 달렸다.
올해 들어 가장 최악의 미세먼지 때문에 엄청나게 뿌연 하늘이 펼쳐진 날이다. 이 날은 조깅을 하며 숨을 쉬면 미세먼지의 맛도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맛이 꼭 귀지의 맛이다. 오래된 비누맛, 길가의 섞은 그루터기의 맛. 영화 인 더 더스트 같은 날. 잔인한 사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