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 햇살에 비친 그대의 모습이 아름다워요.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가을이 세상에 내려앉으면 모든 풍경이 비싸 보인다. 푹푹 찌는 여름의 풍경은 더위에 허덕이는 풍경이라 그저 줘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지만 가을의 풍경은 모든 순간을 바꾸어 놓는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저녁에 조깅을 하고 나면 무릎에서 땀이 물처럼 흘렀는데 일주일 만에 기세 등등하던 더위가 가지 꺾이듯 푹 꺾이고 말았다. 습도 때문에 부얘 보이던 하늘도 가스층이 걷혀 파랗게 질린 얼굴을 그대로 드러냈다. 흐린 날에도 여름과는 다른 하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이제 너의 바람과 마음과 무엇과도 무관하게 가을의 모습으로 갈 거야, 흥”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여름이 저 멀리 가는 모습을 보는 건 정말, 몹시, 너무 아쉽고 싫다. 줄이라도 있으면 휙 던져서 잡고 싶다.
어둠이 오는 속도도 빠르다. 고독한 미식가 고로 상이 주문한 음식을 먹어 치우는 속도와 맞먹는다. 하야이. 젠장. 어둠이 빨리 온다는 말은 이제 슬슬 긴팔에 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조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날이 선선해서 강변의 조깅 코스에 나온 사람들이 많다. 본격적으로 달리는 러너들은 여름에도 꾸준하게 나왔으니 여전히 계절과는 무관하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슉슉 숨을 쉬며 달려간다. 그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다. 그 외에도 유모차를 몰고 나온 사람, 어르신들, 손주와 함께 나온 할아버지 등 많은 사람들이 시원해진 날씨에 강변을 찾았다. 주로 운동을 한다. 걷거나 달린다.
한주는 구름이 정말 구름 한 날이다. 구름이 입체감을 장착하고 여봐란듯이 멋지게도 떠 있다. 매일 조깅을 라면서 매일 구름을 본다. 구름은 매일 뜬다. 구름은 비가 오는 날에도 떠 있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같은 구름은 없다. 지구가 생겨난 이래 구름이 보였을 텐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같은 모양의 구름이 없다는 게, 이게 정말 불가사의하다. 하물며 전부 제각각인 인간도 쌍둥이가 있는데.
강변을 따라 죽 달리다 보면 공항에 내려앉는 비행기도 볼 수 있다. 폰으로 이 정도면 아주 낮게 떠 있다는 말이다. 비행기를 타 본지 꽤 되었다. 사진 속의 색감이 마치 80년대 같다. 80년대 하니까 88년도가 배경인 ‘서울대작전’을 봤다. 근데 감독은 일본의 ‘살색의 무라니시’를 보지 않았을까. 80년대라는 건 무라니시가 나오는 그 배경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 남자라면 무라니시의 작품이나 그 이후 나오는 작품을 보지 않는 남자가 없을 것이다.
서울대작전은 분명 ‘베이비 드라이버’를 따라 하려고 했다.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특송’에서는 카 체이싱은 그래도 꽤 좋았다. 서울대작전은 카 체이싱 영화라고 알고 있었는데 영화가 촌스럽다. 촌스럽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영화 속이 더 촌스러워야 영화가 세련되었을 텐데 덜 촌스러워서 영화가 촌스러워진 것이다.
영화 ‘서울대작전’에 대해서 말해보자. 이 영화에서 미장센은 억지로 꾸며 놓은 듯한 80년대다. 더 확실하게 촌스러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영화 ‘써니’의 색감을 흉내 냈고, 80년대의 거리를 복원하려 했지만 ‘응답하라 1988’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영화가 촌스러워졌다.
조크든요,를 따라 한 인터뷰 영상 장면이나, 소맥을 말아먹으면서 이게 소맥이야 하는 장면 역시 억지스럽게 보인다. 게다가 각 그랜저라는 말은 그 당시에 나오지 않았던 말이다. 훨씬 후에 2000년대 정도에 사람들이 초기 그랜저가 그리워서 나온 말인데 영화 속 88년도 해버렸다.
아무튼 80년대 정서나 감성이 영화에서 혀끝으로 할짝거리는 수준이라는 게 아쉽다. 카 체이싱이 영화 내내 나 올 줄 알았는데 아쉽다. 포니를 끌고 도심지를 누비는 강렬한 80년대 카 체이싱을 볼 줄 알았는데 아쉽다. 200억이면 카 체이싱 장면에 돈을 더 써도 되지 않았냐 싶은 게, 그게 아쉽다는 말이다. 좋은 하이스트 무비가 될 뻔했는데 그게 아쉽다.
유아인의 연기를 보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문소리와 김성균의 연기를 보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다. 오정세의 연기를 보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멋진 연기자들을 데리고 이 정도밖에 못 해냈다는 게 아쉽다는 말이다. 그래도 후반부에 소방차의 노래와 함께,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와 함께 달리는 카 체이싱은 또 신난다. 그런 영화가 ‘서울대작전’이었다. 영화에서 MBC는 MBC라 표기하면서 영웅본색은 쌍웅본색이라 표기한 건 다 뜻이 있겠지. 민호둥절한 영화 서울대작전.
영화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요 며칠 동안 저녁에 조깅을 하면 잠자리들이 아주 많아졌다. 사실 잠자리들은 지지난주, 폭염이었을 때도 저녁에는 꽤 많이 나와서 투명하게 날아다녔다. 고추잠자리들이 하늘을 장식했다. 가을이 오고, 잠자리가 눈에 보이면 어김없이 다자이 오사무의 수필 ‘아, 가을’이 떠오른다. 다자이 오사무는 가을을 말할 때 ‘잠자리, 투명하다’라고 했다. 가을이 되면 잠자리도 쇠약하여 너훌 너훌 날아다니는 것만 같은 모습을 오사무는 말하고 있다. 잠자리의 모습이 가을 햇살에 투명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 멋진 말 ‘가을은 여름의 타고 남은 것’라고 했다.
다자이 오사무 – 오, 가을
본직이 시인이라면 언제 어떤 주문이 있을는지 모르므로 항상 시제를 준비해 놓아야 한다. [가을에 대하여]라는 주문을 받으면, 그래 좋아, 하면서 [가]의 서랍을 열고, 가 줄의 여러 개 노트 중에서 가을 부문 노트를 꺼내놓고는 침착하게 그 노트를 살핀다. 잠자리, 투명하다,라고 쓰여 있다. 가을이 되면 잠자리도 나약해져서 육체는 죽은 채 정신만으로 비틀비틀 날고 있는 모습을 가리켜 한 말 같다. 잠자리의 몸이 가을 햇빛에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 이라 쓰여 있다. 초토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 이라고도 쓰여 있다. 코스모스, 무참하다,라고도 쓰여 있다.
언제였던가, 교외의 메밀국수집에서 국수를 기다리는 동안 식탁 위의 낡은 화보를 열어보았더니 그 속에 처절한 사진이 있었다. 전체가 타버린 들판, 바둑판무늬 유카타를 입은 여인이 달랑 혼자서 피곤에 지쳐 주저앉아 있었다. 난 가슴이 타들어갈 만큼 딱한 여인을 사랑했다. 무섭도록 욕정마저 느꼈다. 비참과 욕정은 표리인 모양이다. 숨이 막힐 만큼 괴로웠다.
그리고 밑으로 다자이 오사무의 코스모스에 관한 글이 이어진다. 다자이 오사무의 글은 공허가 있고 그 공허 속에는 허무가 가득하다. 그리고 황량함이 마지막으로 허무의 자리에 차고 오른다. 이번 여름에도 폭염이었다. 폭염 속에 모든 것이 다 타고 남은 것이 가을로 이어진다.
폭염에 활활 타오르는 저 하늘,
붉은색으로 세상을 다 태운 여름이 울고,
우는 틈을 타서 가을은 몰래 숨어 들어와 치장을 하고 교활한 악마처럼 잠자리를 투명하게 비춘다.
가을은 저 여름이 온전히 타고 남은 것.
타고 남은 재를 뚫고 그을음에 붙어 코스모스가 피고 나면 가을은 무섭도록 나를 노랗게 물들인다.







나는ㄴㄴㄴㄴ 조깅을 했을 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