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평온하게 보이는 날은 코로나 시기에도 늘 그랬다. 자연은 더 푸르러졌고 조깅을 하는 강변에는 뱀과 메뚜기가 늘어났고 몇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제비의 비행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마음은 불편한데 몸만 편하거나, 몸은 불편한데 마음이 편할리 없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세상이 이렇게 평온하게 보인다. 이렇게 평온하면 조금은 불안하다. 알 수 없는 껄끄러움, 침을 삼키면 목이 조금 따끔거릴 정도로 불안하다. 내일이라도 당장 이 평온의 얼굴을 버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전염병 1급에서 2급으로 내려간 지금, 쏟아지는 평온을 보며 지난 2년간의 일들을 떠올렸다. 백신 1차의 후유증으로 2, 3차는 맞지 않아서 작년 12월부터 몇 개월 동안 “저는 백신 1차만 맞은 미 접종자입니다”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12월 한파가 한창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날 엔진오일을 갈아야 했다. 대기를 하고 작업을 하는 동안 실내의 대기실에서 보통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미 접종 자여서 밖에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친구도 1차 접종 후에 비염이 너무 심해져서 2차는 맞지 않으려 했지만 남편과 아이들의 식사를 위해 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이 2차를 맞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은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평온해진 것이다. 어떤 기간 동안, 어떤 장소에서는 분위기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 압도된 공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백신 1차만 맞았고, 3차까지 맞은 어머니도 코로나에 걸려 집에서 격리를 했고 며칠 아파서 고생을 했으며 식사 같은 것을 챙기느라 같이 있었음에도 나는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있다. 내 주위는 대부분 코로나에 걸렸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다. 3차까지 맞은 아는 동생은 서른 살 초반인데 너무 아파서 울기까지 했다. 보통 성인이 되면 슬프거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지 아프다고 해서 엉엉 울지는 않지만 코로나는 그걸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너무 아프고 정신이 가물거려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심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코로나의 후유증이 있다고 했다.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1차 밖에 맞지 않았기에 이론적으로는 걸리게 되면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지만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 역시 조심했는데도 걸리고 말았다. 이제는 코로나에 걸려도 정부 지원금도 받지 못하며, 병원비와 약값도 개인부담이다. 여러모로 별로다. 어떻든 이런 이야기도 지금은 편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분위기의 실타래가 풀려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별거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제목 같지만 진짜 그러하다.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고, 대학교 공연이 열리게 되었다. 버스킹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의 운동회도 마스크를 벗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 역시 기쁘고 들떠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책에서만 보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게 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그동안 2년이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상이 없어지면 인간의 생활이 지옥이 되는지 전 세계사람들이 경험을 했다.


코로나 초기에는 신천지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그러면서 내가 있는 도시에도 첫 코로나 확진자가 신천지 교인이었다. 교인이면서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타 지역에서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이 도시로 들어와서 여러 곳을 다닌 다음 부모님의 집으로 간 것이다. 첫 확진자가 다녀간 빵집과 여러 곳이 확진자의 동선에 들어감으로 강제 폐쇄가 되었다.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 어쩌고 같은 문구가 붙었고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 이건 당시에 낙인과도 같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거지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비난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던 첫 확진자에게로 쏟아졌다. 첫 확진자이자 슈퍼 전파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첫 확진자의 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작은 병원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불똥이 튀었다. 결국 그 병원은 진료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던데 요즘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일하는 건물에도 그 여파가 불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데 몇몇의 확진자가 시내의 서른세 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와 분식집을 다녀가면서 폐쇄를 하고 딱지를 붙였다. 덩달아 확지자가 다녀가지 않아도 그 옆 가게들도 같이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바글바글 해야 하는 저녁 8시의 시내 중심가가 유령도시처럼 변했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면 전부 불이 꺼져있고 학생들로 가득해야 하는 중심가의 거리에 사람들이 싹 빠져버렸다. 이런 모습은 나도 처음 봤다. 이런 현상이 몇 달 가겠지, 했는데 1년이 넘어 이어졌다. 그러면서 장사가 아주 잘 되어서 큰 평수로 장사를 했던 대패 삼겹살부터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맥주 거리에 있던 술집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사라졌다. 내가 일하는 건물도 저녁 8시가 넘어가면 문을 닫고 귀가를 바란다는 번영회의 권유가 있었다. 건물도 저녁에는 유령건물이 되었다. 그렇게 한 번 무너진 상권은 좀처럼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게 된다. 콧물 효과처럼 내려갈 때는 쑥 하며 빠르게 내려가지만 올라올 때는 아주 더디게 천천히 올라온다.


2020년 여름까지는 전문가들의 입에서 야외에서는 거리두기를 하고 혼자일 경우에는 마스크는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조깅을 하러 나가면 운동을 하러 나온 어르신들이 마스크를 그때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확진이 되면 죽음 내지는 생사를 오가는 대단한 바이러스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전문가들의 발언도 달라졌고 야외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작년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오는 어르신이 있었다. 그 어르신은 70대임에도 탄탄한 근육으로 비슷한 연령대의 부러움을 사는 어르신이었다. 독불장군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운동하는 시민을 위해 시에서는 무료로 시원한 생수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 어르신은 밤이 되면 집에서 들고 온 커다란 생수 통에 얌체처럼 물을 받아서 갔다. 그렇게 두통씩 받아갔다.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여러 번 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100미터 떨어진 곳에 공중 화장실이 있는데 벤치 바로 옆 풀숲에서 오줌을 갈긴다. 매일 그런다. 날이 따뜻해지거나 여름이면 오줌 지린내가 아주 심하게 난다. 안하무인인 것이다. 늘 맨발로 운동을 하는데 운동을 하다가 물을 머리에 뿌리고 가래까지 늘 뱉는다. 카악 퉷. 마스크는 전혀 하지 않고 2021년 겨울이 오기까지 그랬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도 늘 그랬지만 코로나가 온 이후에는 거기에서 오직 한 명, 그 어르신만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 노인인데 근육이 좋고 덩치가 있으면 걸음걸이가 다른 어르신들과 다르다. 양팔을 조금 벌리고 거만하게 걷는다. 그런 걸음걸이가 있다. 아무튼 자신의 집인 양 그렇게 마스크도 없이 운동을 하고, 누군가와 시비가 붙거나 자신이 타고 온 자전거를 세우다가 자신의 힘에 자기가 넘어졌을 때에도 어딘가를 향해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땅이 이래서 자전거를 세우다가 넘어졌다는 것이다. 땅은 평평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어르신이 보이지 않은 지 몇 개월째다. 겨울부터 보이지 않는다. 매일 나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운동중독 어르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매일 다니는 길목이 꿈속에도 나타나고 나는 그 거리를 걷고 있다. 꿈속에서 매일 다니는 길목은 현실과 조금 달라 보였다.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길목의 길은 더 길고 더 넓고 더 재미있었다. 같은 길목이지만 꿈속에는 현실보다 소거되어 있는 부분도 많았다. 낯설지 않은데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 이 길목을 매일 걸어 다녔다. 꿈인데 냄새까지 났다. 길목의 냄새, 추억이라 불리는 오래된 냄새가 길목에서 폴폴 풍긴다. 코로나 시기에 달리진 나의 생활 반경의 풍경을 묘하자면 그렇다.


모든 것이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 그것이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코로나 시기의 지금, 현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우리는 대체로 잊어버리고 그것이 올바른 흐름이지만 코로나 초기를 생각해보면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백화점에서 직원이 마스크를 쓰고 고객을 응대한다고 손님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컴플레인을 걸기도 했고, 편의점에서 마스크를 써 달라는 소리에, 또는 12시 넘어 편의점 내에서 먹는 행위가 안 된다는 말에 아르바이트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우유나 물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초기의 마스크 대란은 어떠한가. 마스크를 구입하려고 민증을 들고 약국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약국은 미어터졌고 약국과 손님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는 줄 서는 것이 싫어서 한 번도 약국 앞에서 줄을 서있지 않았다. 코로나가 덮치기 전에 초미세먼지 때문에 94 마스크 두 박스를 구입해 놓았다. 그래서 걱정이 덜 했다. 그랬는데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다닐 수 없고, 어딘가에도 마스크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는 첫 시행이 시작되었다. 동네의 독거노인분들이 약국에서 줄을 서지 못해 마스크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어서 거기에 다 나눠주고 나니까 정작 내가 해야 할 마스크가 없었다. 그때 그 계기로 일하러 나가지 않고 그냥 일주일 정도 집구석에서 소파와 한 몸이 된 적도 있었다.


어떻든 그런 우주의 시간 같은 흐름을 거쳐 지금 평온한 시기에 이르렀다. 어제까지의 풍요로움이 오늘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연애시대 은호의 말처럼 고요한 물과도 같은 일상에 작은 파문이라고 일라치면 우리는 쉽게 허덕인다. 우리 인생은 너무 약하여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과 같다. 우리는 이를 2년이나 직접 경험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힘들어서 질 수 있지만 내일이 되어 다시 오늘을 맞이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한 발 나아가 있다. 인생이란 꼭 이기기 위해 치열하기보다 덜 지기 위해 일상 하나하가 소중하게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아도 된다 뭐 어때. 하는데 까지 열심히 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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