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친구 녀석이 연락 와서 좀 만나자고 했다. 나는 나 있는 곳으로 오라고 했더니 밖에서 좀 만나자는 것이다. 밖에서 만나서 뭘?라는 생각을 했지만 연락은 아주 오랜만에 온 것이고 그 녀석은 나와 어린 시절에 달동네라 불리는 한동네에서 같이 지낸 친구 녀석이었다. 그 동네는 가난이 습격한 동네로 골목에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였다.
그래서 그 녀석을 밖에서 만났는데 어딘가로 데리고 가더니 빈 점포가 있는 곳에서 치킨집을 하면 어떻겠냐는 것이다. 녀석은 타이어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벌써 십 년 정도 됐다. 직책도 어느 정도 되고 앞으로도 더 진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식당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치킨집을. 이곳에 빈 점포가 났다는 것을 알고 이래저래 나름대로 알아본 모양이다. 치킨도 여러 군데를 알아본 모양이다. 프랜차이즈로 말이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아내도 벌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갑자기 든 생각은 아니었다. 녀석에게는 아이가 셋이 있다. 그중에 둘이 초등학생이다. 곧 중학생이 된다. 그리고 담보로 구입한 아파트의 빚도 갚아야 한다. 각종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을 하다 보니 두 명이 지금처럼 벌어들이는 것으로는 뭔가가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못 한채 그대로 늙어 버릴 것만 같았다. 회사 직원들이 죄다 주식을 하면서 게 중에 누군가는 주식으로 돈을 만지게 되었다. 그래서 덥석 주식을 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손해만 봤다. 회사를 계속 다닌다고 해도 미래가 없다. 회사에서는 명예퇴직을 하면 퇴직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타이어 회사를 다녔다면 자영업을 해도 타이어에 관련된 사업을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같은 말을 했지만 그걸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알아본 것 중에 제일 안정적으로 보인 게 치킨이었다. 몇 달을 다니면서 봐도 이 어려운 시기에 치킨을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치킨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회사원들이 능력을 발휘하며 다니던 회사를 뛰쳐나와 자영업을 할 때 왜 전부 식당을 하게 될까. 우리나라는 알겠지만 식당이 포화상태다. 아니, 과포화 상태다. 박찬일 요리사는 인구 7백만 홍콩에는 식당이 2만 개 정도 있는데 현지에서는 그것도 많다고 걱정을 한다고 한다. 서울에는 12만 개 정도 식당이 있다고 한다.
자영업의 종류는 굉장히 많다. 예전 같으면 전파상도 있고, 철물점도 있고, 가구점도 있지만 요즘은 그런 걸 할 수가 없어졌다. 그런 물품은 대기업 마트 같은 곳에서 대체로 저렴하게 다 판매를 한다. 또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배송까지 완벽하게 해 준다.
그러다 보니 식당으로 자영업을 하게 되고 식당 중에서도 큰 기술을 요하지 않는 기름에 빠진 닭의 유혹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기름의 유혹은 먹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치킨을 만들어서 팔려는 사람들에게 까지 마수를 펼친다. 기름의 유혹은 대단하다. 다수가 소수에게 다가가 입김을 불어넣는다. 마치 그래야 한다고. 그렇게 시작해서 결과가 옳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선택이 반드시 옳은 것이라 부추긴다.
내 경우를 보면 나에게 사람들은 말한다. 왜 그런 소설을 매일 쓰고 있냐고. 현실적인 소설을 쓰라고 한다. 현실을 반영하고 사람들의 공감할 수 있는 소설을 써라고 한다. "너처럼 바다가 끓어오르고, 사람이 수분이 빠져나가 미라처럼 죽어 버리고, 어둠에서 어둠이 새끼를 낳듯 돌출하는 그런 소설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 왜 오래도록 그런 소설이나 쓰고 앉아있냐, 현실적인 소설을 써"라고, 기름의 유혹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런 현실적인 폐부를 찌르는 멋진 소설은 나는 쓰지 못한다. 그건 잘 쓰는 소설가들이 쓰면 된다. 그리고 현실적인 소설은 내가 들어갈 틈도 없이 빼곡하다. 이미 포화상태인, 잘 쓰지도 못하는, 아니 쓰기 싫은 소설은 쓰기 싫은 것이다. 소설은 어떤 순간에도 개성이다. 부동산에 치이고 직장이 힘들고 매일 숨을 쉴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적인 소설이 있는가 하면, 개와 대화를 하고 뇌파 속에 단백질을 밀어 넣는 소설도 있는 것이다.
치킨의 유혹은 대단하다. 한 치킨 집이 탄생하면 어딘가에서 또 다른 치킨 집은 소멸된다. 치킨은 장소만 다를 뿐 늘 엇비슷한 양이 다른 장소로 배달된다. 그렇게 치킨은 순환하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회사, 즉 조직은 사라지지 않고 늘 있으나 조직을 만든 초대 사람들은 지금은 한 명도 없고 그 자리를 세대를 거쳐 사람들이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일본의 한 초로의 소설가가 일본의 돌아가는 꼴이 보기 싫다며 산속에 들어가서 글만 썼다. 그 작가가 은둔 작가로 유명한 마루야마 겐지다. 마루야마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어보면 세 번째 ‘국가는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라는 챕터가 있다. 국가는 존속할지 모르나 국민은 그 사이에서 소거되거나 소멸할 뿐이다. 어느 나라건 국가는 국민 개개인에 관심이 없다.
기름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런 시대의 중심에 있다. 티브이나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두가 맞다고 하는데 나 혼자 아니라며 홀로 서서 무엇을 이뤄내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다. 그런 소수의 사람을 동경하고 또 따라 하다 보면 다수가 되고 그것 역시 기름의 유혹처럼 소수를 따라한 다수가 다 성공의 길에 오르지는 못한다. 기름의 유혹이라는 건 그런 것이다. 외면할 수도 없고 매일 먹을 수도 없다. 눈으로 기름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조차 우리는 알지 못한다. 먹어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더러운 기름은 몸속에 남아 있다가 어떠한 이벤트를 펼치게 된다.
과포화 상태의 음식점이 즐비한 이곳에서 식당을 한다고 하면 대부분 준비가 안된 사람들이 장사를 한다고 말한다. 모두가 엉망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우리 현실의 민낯이라 박찬일은 말한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열약한 사회 구조에서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게 식당이다. 차근차근? 몇 년 준비? 이게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기름의 유혹에서 그건 있을 수 없다. 불확실한 미래에 영화 ‘감기’에서처럼 정부는 국민을 버리지 않았다, 라는 통수권자의 한 마디가 꿈처럼 지나간다.
실제 현실판 오징어 게임인 것이다. 그 속에 자본주의에서 조금 밀린 사람들이 우르르 존속되어있다. 치킨 집은 그나마 대안적인 생각이다. 그래서 치킨집은 오늘도 사라지고 오늘도 생겨난다. 오늘도 우리는 기름의 유혹에 시달리거나 현혹된다. 닭은 물에 빠진 것보다 기름에 빠진 닭이 더 맛있음은 전 세계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