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때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면 끌려 다니는 수준이었다. 여기저기 기웃기웃 구경하는 나는 팔뚝을 잡혀서 할머니의 빠른 발걸음에 그림자처럼 끌려갔다. 할머니는 머리에 필요한 몇 가지가 입력이 되어 있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고 나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품목이 있는 점포로 발길을 바로 옮겼다. 할머니는 참 신기했다. 그렇게 많은 물품을 수첩에 적어 놓지도 않고 머릿속에 기억한 것으로만 착착 구입을 했다. 구입을 할 때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비슷한 물품 중에 비교를 해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딱 보고 바로 집어서 가격 흥정을 해서 바구니에 넣었다. 그렇게 할머니에게 질질 끌려다니다 보면 오후 5시가 된다. 겨울의 전통시장에 저녁이 어스름 몰려온다. 해가 힘을 잃고 사람들의 그림자는 나처럼 길게 늘어졌다.

 

할머니는 모든 물품을 다 확인한 다음 시장의 순대 파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작은 간이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순대를 시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까만 순대가 우리 앞에 놓였다. 할머니는 먼저 어묵 국물을 먹이고 이쑤시개로 콕 집어서 빨간 소금에 살짝 찍어서 후후 불어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뻑뻑한 것 같은데 부드럽고, 당면이 씹히는 맛, 소금 덕분에 짭조름하면서 세상 맛있는 순대가 추위에 언 몸이 조금씩 녹았다. 오물오물 먹고 있을 때 할머니가 또 한 번 어묵 국물을 먹여 주었다. 호로록 앗 뜨거. 할머니는 웃으며 후후 불어서 주었다. 아 맛있다. 할머니는 내장이나 간 같은 건 넣지 말고 순대만 한 접시 시켜서 시장통의 바닥에 작은 의자에 앉아서 나와 나란히 먹었다.

 

추억의 맛 속에는 ‘순대’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순대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맛으로 변신을 했지만 가장 생명력을 가지는 순대는 그저 순대다. 손으로 직접 만든 맛있는 순대보다 그저 공장에서 떼와서 시장통에서 솥으로 쪄서 파는 순대. 이쑤시개로 콕콕 집어서 소금 약간 찍어서 먹는 순대. 할머니에게 한 없이 어리광을 부리며 먹었던 순대. 그 순대가 추억 속에서 당당하게 ‘맛’으로 자리 잡고 있다.


쩝쩝거리며 순대를 맛있게 먹고 있으면 순대 장사 아주머니가 아이구 잘 먹네, 라면서 순대를 조금 더 썰어 주었다. 할머니는 고맙다시며 바로 나온 뜨거운 순대를 콕 집어 빨간 소금에 찍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시장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질문했다. 저 아저씨는 뭐 팔아요? 왜 저렇게 소리 질러요? 털장갑은 어디에서 팔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내가 묻는 말에 다 대답을 해주었다. 그것이 정확한 대답인지 아니면 할머니 뇌피셜로 하는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할머니는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야, 순대는 장에 찍어 먹어야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순전히 나의 추억 속 순대는 빨간 소금에 찍어 먹던 순대였다. 야야, 순대는 떡볶이와 같이 먹어야지.라는 말을 요즘도 듣지만 혼자서 가끔 순대만 담아와서 소금에 살짝 먹기도 한다. 그 옛날 할머니가 소금에 살짝 찍어서 먹여주던 순대의 맛은 안 나지만 추운 겨울에 조깅을 하고 시장통에서 한 번은 앉아서 먹었던 순대는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시장통에 가면 모두가 입을 한 일자로 다물거나 큰 소리를 지르며 삶의 현장에서 무엇을 위해서 저리도 악을 쓰는 걸까, 같은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카메라를 들고 시장에서 삶의 현장을 담으려고 자주 갔었다. 전통시장의 사람들을 보면 불안과 결락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신성한 노동의 대가를 얻어가는 사람들.


어금니로 순대 구석구석 씹으면 순대 속의 양념 먹은 당면이 팍 터지면서 질감이 혀끝을 타고 강타한다. 시장통에 부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앉아서 먹는 순대의 맛을 식힐 수는 없다. 좀 웃기지만 이는 개인적인 서사로 기억된다. 순대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못 봤지만 순대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재잘재잘하며 순대를 먹는 장면은 언제나 따뜻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