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이다. 날은 어둡고 커튼을 걷지 않고, 강아지가 짖지 않고, 시계를 보지 않는다면 시간을 알 수 없는 날이다. 비가 내리면 빗소리를 듣는다. 세계가 변하건 변하지 않건 머리를 감고 이를 닦는 것처럼 비가 내리면 그 소리를 듣는다. 빗소리를 집중해서 들을 필요는 없지만 시간을 들여 빗소리에 집중을 해보면 상당하다. 그러니까 리듬이 있다. 언젠가 집중해서 들어봄직한 리듬이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영화에서처럼 이렇게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아니, 여행을 갔는데 이렇게 비가 세차게 내린 적이 있었다. 일행과 함께 남이섬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비가 굉장히 와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른 오전으로, 남이섬으로 가기 위해 산을 넘어가는 와중에 엄청난 비를 맞았다. 산속으로 2차선 도로가 있었는데 폭우 때문에 도로가 물에 잠겨 다시 차를 낑낑 돌려 되돌아 나와야 했다. 이미 한 시간 이상 산속을 달렸기 때문에 다시 한 시간을 들여 돌아 나와야 했는데 비가 상상 이상으로 오니 너무 겁이 났다.


비는 그야말로 억수같이 퍼부었고 차 천장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굉장했다. 옆으로 보이는 개울물이 불어서 굉장히 무서웠다. 집 안에 있어도 폭우가 쏟아지면 두려운데 산속에서 작은 차 안에 있으니 그 공포가 배가 되었다. 음악도 끄고 와이퍼의 동작을 3단으로 하고 오는데 일련의 모든 행동이 아무 소용이 없게 만들 정도로 비가 내렸다. 그저 감각으로 핸들을 돌려야 했고 감각으로 시야를 확보해야 했다. 비가 그만큼 세차게, 많이 내렸다.


산속에 난 작은 도로 위에 있어서 더 두렵고 무서웠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하고 찝찝했는데 도로에 물이 고인 곳에서 차 시동이 꺼진 것이다. 완전 영화에서의 상황이었다. 일행이 무서워했는데 나도 무서웠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산속의 도로에서 시동이 꺼진 차에 갇혀 있는 건 꽤나 큰 공포였다. 보험회사에 전화를 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내려서 영화처럼 보닛을 열었는데 저 앞쪽에서 자동차 한 대가 앞이 보이지 않는 빗속에 빠르게 오고 있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지만 비가 억수같이 오는 도로를 조심조심 운전을 해서 산속에서 겨우 나오게 되었다. 아무튼 한 시간은 훨씬 더 걸렸다. 갔던 길을 돌아서 오다 보니 식당이 한 군데 문을 열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오전 10시쯤이었다. 주차를 하고 우리는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가 너무 쏟아져 여행객들이 없어서 손님이 우리 둘 뿐이었다. 주인 내외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로 지금은 반계탕 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반계탕을 주문했는데 만두까지 주었다.


반계탕의 국물이 체내에 퍼지니 퍼붓는 비와는 상관없이 몸이 나른해졌다. 닭고기의 살을 뜯어먹고 일행은 호기롭게 소주까지 한 잔 마셨다. 식당은 안에서 밖의 개울이 다 보였는데(구조를 간단하게 말하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홀이 있고, 문 맞은편에는 개울로 나가는 문이 있고 그 문으로 나가면 개울가에 평상을 쳐 놓고 거기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어쩌다가 주인 내외와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비 때문에 손님들은 없고 네 명이 나란히 앉아서 개울에 비가 쏟아지는 풍경을 보게 되었다.


주인 내외의 자식들은 다 장성해서 출가를 했다. 건강한 집안의 기분 좋은 노부부였다. 이야기를 실컷 하다가 한 십분 정도는 누구도 말을 하지 않고 비가 개울에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건 정말로 목가적인 풍경으로 타닥타닥 하는 빗소리와 두두둑 하는 빗소리 그리고 쏴아 하는 개울의 소리가 마치 콰르텟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반계탕은 조미료가 많이 들어갔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에 식은 우리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었고 만두는 만들어 놓은지 시간이 좀 되어서 집어 들었을 때 허물어졌지만 맛이 좋아서 다 먹어 버렸다. 주인 내외는 마음씨가 좋아서 머물렀다가 비가 그치면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출입구 쪽이 아닌 개울 쪽 처마 밑의 평상에 우리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거기에 앉아서 우리는 시간을 들여 비가 내리는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갈 때 다시 들러 반계탕을 먹으려 했지만 그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이 길이 확실해서 이 길로 죽 들어왔는데 그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여름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반계탕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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