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루 종일 바닷가를 어슬렁어슬렁거렸다. 바다는 참 묘하다. 사람의 마음과 비슷하다. 같은 바다가 없고 변덕도 심하고, 이거다 싶으면 어느새 모습을 바꿔버리거나 심술을 부리고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울어버리고 예상치 못하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바닷바람은 차지만 햇살이 따뜻한 것이 겨울에서 봄으로 옮겨가는 애매한 계절의 시점이다. 기시감이 들고 그럴 때면 허니와 클로버를 시작하는 타케모토의 내레이션이 떠오른다. ‘25년 된 집, 벽이 얇아 소리가 다 새고, 입주자는 전원 학생, 아침 햇살이 눈부신 동향. 작년 미대에 합격해 도쿄에 왔는데 학교 주위에는 밭 천지라 깜짝 놀라고 지은 밥이 맛이 없어서 깜짝 놀라고 공중목욕탕 입장료가 비싸서 놀라고 많은 숙제에 놀랐지만 지금은 모두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타케모토의 말처럼 지금 이 애매한 계절도 곧 일상이 된다.


애매한 시점을 지나고 나서 나는 자유와 모험이 있는 일탈보다는 반복과 단조로움이 단단하게 있는 일상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일상에 집 근처의 바닷가도 있다. 오랜만에 하루 종일 바다 근처를 배회하며 바다를 지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바다를 몇 시간이고 바라보는 것 따위 하지 않았는데 그거 참 기묘하다. 그래도 매일 오전에 30분 정도는 바다를 늘 보고 있으니 바다도 나의 그런 수고를 알아주기를 바랄 뿐이다.


바다를 배회하며 사진을 찍다가 지치면 앉아서 리스트의 순례의 해 2년 중 ‘단테를 읽고’를 죽 들었다. 백건우 버전이다. 요즘 아내 때문에 말이 많지만 나는 백건우 버전의 리스트가 좋다. 다행히 아이패드로 들으면 야외에서 마치 피아노 연주를 듣는 착각이 든다. 다행스러운 것은 일행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체로 지금까지 일행은 나의 조금은 이상할지 모르는 행동이나 말도 대체로 좋아해 주는 것 같다. 그것이 참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나의 말과 행동에 현실감은 비교적 소거되어 있다. 그래서 때때로 먹고사는 것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늘 불안하다. 

 

'단테를 읽고'를 백건우와 조성진, 두 버전으로 번갈아가며 계속 들었다. 조성진이 젊어 힘 있게 연주할 거라는 생각이었는데 벗어났다. 조성진은 유약하지만 부드러웠다. 마치 나비가 호수의 수면 위에서 살짝 발을 담그듯 '단테를 읽고'를 끌고 나간다. 꼭 38시간 불면으로 보낸 후 샤워를 하고 창을 투과한 빛을 받으며 극세사 이불로 몸을 감싸는 기분이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눈을 감으면 내 손이 단편이 되어 허공을 휘젓는다. 허공에는 그 사람이 남기고 간 편린이 조각이 되어 먼지처럼 날아다닌다. 꼭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에 비해 백건우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으니, 라는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트린다. 강렬하고 힘 있게 '단테를 읽고'를 치고 나간다. 격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란 다란 다란 다란 다라 라라라라(이래서 뭔 설명이) 하며 끌어올리는 부분은 정말 좌심방에 펌프질을 강하게 한다. 숨이 차오른다. 험난한 산속의 지형을 위협스러운 존재를 피해 달리는 것처럼 나는 숨이 타오른다. 크레바스를 넘고 해협을 맨몸으로 건넌다. 그건 마치 인생의 축소이기도 하다. 다라 라라라라라 가 줄어들어 갈 때 길고 넓은 평온한 강이 나타난다. 그제야 나는 숨을 천천히 쉬고 먼 곳의 자연을 눈으로 본다. 숨이 잦아든다. 연주 하나를 듣는데 이런 상태로 내 몰고 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건우의 리스트 '리베스트라움'을 듣는다. 꿈속을 거니는 기분. 바다가 곡에 맞게 춤을 추고 춤에 맞는 선율을 백건우는 연주한다. 일행은 이런 나의 이야기가 지루하지는 않은 것 같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참으로 고독한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 고독의 정점으로 오르기 위해 등을 구부리고 외롭게 피아노와 싸우거나 또는 친하게 지내야 했을 것이다. 외톨이로 피아노와 지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연주들. 바다를 보며 그런 연주를 듣는다는 것 역시 어떤 면으로 행운이다.


겨울의 바다에서 따뜻함이 느껴지는 게 봄이다. 완전한 봄으로의 초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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