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만 읽다가 눈을 돌린 책들이 음식에 관한 서적들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 견문록'이라든가,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소설가 한창훈의 '허기질 때 바라로 가라'나 식품공학 박사 최낙언의 '감각, 착각, 환각' 그리고 박찬일 요리사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보통날의 파스타' '와인 스캔들', 맛 칼럼니스트 박상현의 '규슈의 음식문화' 등 음식에 관련된 책들을 읽었다. 음식은 인간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에 음식 이야기에 관한 책들은 정말 재미있다. 우습지만 소설처럼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여러 음식에 관한 책들 중에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미각의 제국’에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이 책이 흥미로운 건 음식 서적인데 음식에 관한 사진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읽고 있으면 그 음식의 이미지가 머리에 몽글몽글 떠 오른다. 사실 대체로 음식 이야기에 관한 책에는 음식 사진은 없다. 음식 자체를 설명하는 책자에는 음식 사진이 있겠지만 음식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책에는 활자가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미각의 제국에 나와있는 매화차에 대한 부분이다. 매화차는 자연주의 요리연구가라 불리는 방랑식객 임지호 요리사의 매화차에 대한 이야기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가 임지호를 만나서 매화차에 대해서 듣는다.



이하 책의 내용.


내가 들은 임지호의 요리 철학이다.


“맛에는 순수한 맛과 변형된 맛이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요리는 자연을 다치지 않고, 그 재료의 원초적인 맛을 그대로 먹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수한 맛입니다. 순수한 맛은 순수한 마음과 통합니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은 정신적인 행위입니다. 마음을 열고 풀잎을 보면 풀잎과 제가 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저와 일체가 된 풀잎을 무념무상의 지경에서 요리합니다. 그러면 이 음식을 먹는 사람도 이 음식과 일체가 되고.... 즉, 요리사-요리-손님이 일체가 되는 겁니다. 사람을 보면 느낌이란 것이 있지요. 음식에도 이런 느낌이란 게 있습니다. 음식을 제대로 먹으면 그 음식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지요.”


어느 해 초여름 그의 식당에서 법을 먹고 차를 나누었다.
매화차였다.


“지난 이른 봄에 남쪽 바다를 갔어요. 언덕에 보니 매화가 만발하였더군요. 바닷가 바로 옆 언덕의 매화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저걸 따서 매화차를 만들면! 그래서 그곳에서 하룻밤을 잤지요. 매화가 향을 잘 간직하게 하려면 해가 뜨기 전에 따야 하거든요. 다음날 새벽 매화 밭은 해무가 잔뜩 끼었더랬습니다. 그 해무 머금은 매화를 따서 방안 구들 위에 올렸지요. 천천히 물기만 살짝 날려야 하니까요. 그렇게 만든 차입니다.”


천보자기를 풀자 그 안에서 한지가 나왔고 그 한지 안에는 옅은 홍색의 매화 몇 잎이 담겨 있었다.


많이 보았자 열댓 잔 나올 듯한 양이었다.


새벽 해무를 해 집으며 매화 꽃잎을 조심스레, 그것도 아주 조금, 욕심내지 않고, 자연이 하는 것처럼 아주 조금 따는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의 매화차에는 남녘 먼바다의 향이 오롯이 담겨 있었고, 나는 그가 음식으로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매화차는 어느 봄날 매화 만발한 바닷가 언덕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 언덕에 그와 내가 함께 있었다.





이 챕터를 읽으면 음식을 대하는 요리사의 마음에 물욕이 걷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요리사가 만든 음식을 먹고 평을 해놓은 서평자 역시 음식과 일체가 된 듯하다. 임지호는 음식으로 순수의 시를 만들어내고, 황교익은 그 순수의 시를 먹고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남녘 먼바다의 향이 오롯이 담겨 있는 매화차를 표현한 황교익은 맛의 평론가를 넘어 이미 시인이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백석과 서정주가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것 같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철학을 확립하고 뚜렷하게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요즘처럼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 마저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를 사용한다던지, 욕심에 눈이 멀어 괴물이 되어가는 모습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이런 글을 읽으면 마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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