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루키의 글을 다시 읽었다. 그 글에서 하루키는 독자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사진에서처럼 독자는 취직시험에서 자기 자신을 원고지 4매로 설명하라는 말에 자신은 도저히 자신을 원고지 4매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글이었다. 일본은 원고지가 한국처럼 200자 원고지가 아니라 그것보다 긴 400자 원고지다.

그에 대해 하루키도 자신을 원고지 4매로 설명을 하는 건 힘들다고 했다. 아무리 소설가라고 해도 자신을 그렇게 길게 죽 설명을 하기는 어려운 일인가 보다. 그러니 굴튀김에 대해서 적다 보면 원고지 4매로 설명이 가능하며 그동안에 자신과 굴튀김의 거리감이 나타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굴튀김을 적는 동안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굴튀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적을 때 주로 음식에 관한, 그러니까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한,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을 제외하고 집에서 내가 만들어서 또는 할 수 있는 요리를 해서 먹는 음식의 이야기를 한다.

그러는 동안 나도 잘 모르는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요컨대 예전에는 파스타를 집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는데 만드는 동안에는 콜먼 호킨스의 음악을 곧잘 틀어놓곤 했다. 계속 그러다 보니 관성이 붙어서 파스타를 해 먹을 때는 콜먼 호킨스의 음악을 꼭 틀게 된다. 나는 딱히 재즈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파스타와 콜먼 호킨스는 나라고 하는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어떤 무엇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콜먼 호킨스가 맹렬하게 활동했던 시기의 재즈를 또 찾아보게 된다. 그런 나를 발견한다.

분명 나에게는 있어봤자 쓸모없을 약간의 집착성이나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나의 행동이 '나'라고 인간을 결정짓는 여러 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매사에 귀찮은 것들을 아주 싫어하고 귀찮음 때문에 먼 곳에 상을 받으러 가는 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다. 게으름은 확실하게 인간생활을 불편하게 한다. 그렇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또 다른 방법을 모색한다. 그렇게 철저했던 스티브 잡스도 게으른 사람을 채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여기에 앉아서 저기에 있는 티브이까지 가기 귀찮아하는 사람이 결국 리모컨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귀찮아서 식재료를 구입하러 가기가 마뜩잖을 때는 냉장고에 있는 것들로 음식을 해 먹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해 놓고 보면 보기에도 그렇게 나쁘지 않고 맛도 그럴싸하다. 냉장고에는 일회용 사골곰탕이 몇 봉지 있고 만두가 있고 김치가 있고 먹다 남은 두부가 있다. 사골국을 끓이고 그 안에 열거한 것들을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잡탕 만둣국이 된다. 

이런 맛일 줄은 몰랐다. 데워진 두부가 사골을 빨아들여 스펀지처럼 국물을 죽 짜내는가 싶더니 만두가 터지면서 미묘한 향이 입안에 축제처럼 퍼진다. 허기질 때 잡탕 만둣국은 행복이다. 이럴 때 가장 행복하다. 밥 위에 탕에서 건져낸 김치를 올려 국물을 조금 따른 다음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는다. 누군가는 이런 행복은 금방 지나간다고 말하지만 이런 짧고 한정된 행복이 모이고 쌓여 인간사를 이루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인간사에 나라는 인간이 속해 있다. 그렇지만 자기를 정의하면서 음식을 말하는 것이 정당한지 어떤지 알 수는 없다. 

밥공기의 밥을 반쯤 먹은 다음 남은 반은 냄비에 그대로 말아 버린다. 숟가락으로 뜨거운 잡탕 만둣국에 들어간 밥을 떠먹는다. 한 숟가락 안에 내가 알고 있는 식감이 공존하고 있다. 김치와 만두와 두부는 각각의 음식이지만 이 순간만은 한 곳에서 내 입으로 들어와 공존이라는 묘한 체험을 가진다. 먹다 보면 조깅을 할 때처럼 땀이 난다. 잡탕 만둣국은 그러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잡탕 만둣국도 개인적인 나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게 잡탕 만둣국을 통해서 나를, 자기를 알아간다. 그리고 소설을 쓴다면 이제부터 소설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한 숟가락을 떴을 때 그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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