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르르릉
“여보세요.”
나는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 있는 긴 얼굴의 누군가에게 닿았을 테지만 아무런 소리도 말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집으로 온 후 벌써 몇 번째 이런 전화가 오고 있다.
아버지는 자존심 때문에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변호사는 말했지만 실은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집을 나간 이후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는 나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마치 나 이외의, 내 뒤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꼭 나를 가장하고 있는 아버지의 유전자를 잉태하고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타난 아버지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나와 이야기를 하지만 아버지는 지극히 공허와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남은 삶을 세상과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버지 자신의 자기방어 기저를 만들었고 그건 아버지 자신에게 어떤 면으로(생활에 대해서) 미저러블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는 이미 장소를 옮겨 다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전화를 하는 건 아버지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의 착각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공허를 통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전화를 하는 건 벤일지도 모른다. 벤에게서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매일 잠이 들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꾼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쯤 태우는 페이스가 제일 좋다고 했다. 당연하지만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것, 명백한 범죄 행위, 이 명백하고 사실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건 너무나 간단한 것이라 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해미가 그랬다. 원래 없는 것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형태를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없는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 벤이 하는 말을 듣고 어쩐지 해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하는 것. 그건 어쩌면 나는 원래 나오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를 인간이었는데 아버지의 유전자를 옮겨 받아서 후세에 그것을 다시 옮겨주는 어떤 냄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은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포르쉐를 몰고 다니며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늘 유쾌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 알 수 없었고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와인파티를 한다. 일정 시간을 들여 좋은 곳에 위치한 짐에서 운동을 해서 에너지를 소모했다. 여자들이 싫어할 리 없는 종류의 인간이다. 벤이란 그런 인간이다. 그렇게 타고 난 인간이다. 세상에는 그런 인간이 있다. 이미 그런 인간은 정해져 있다. 그렇게 정해져 있는 인간에게 세상의 어떤 틀은 그런 인간을 어쩌지 못한다.
해미도 벤의 주위에 감도는 그런 분위기에 그만 끌리고 말았다. 밖에서 보면 옅은 물이지만 막상 발을 담그면 무릎까지 차올라 놀라게 되는 그런 몹쓸 개울물에 해미는 들어간 것이다.
큰 비닐하우스가 다 타는 데 십 분도 걸리지 않는다. 벤은 대마초를 흡입하고 연기가 뇌를 건드리기도 전에 그런 말을 했다. ‘나’라고 하는 비닐하우스를 만드는데 이만큼의 시간이 걸렸어도 사라지는 건 일순간이다. 십 분 정도 만에 나는 사라질 수 있다. 범죄행위란 해보지 않는 이상 간단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는 없다.
나는 어릴 때 엄마의 옷을 아버지가 태우라고 해서 직접 태운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벤에게 했다. 엄마의 옷을 태우는 꿈을 꾼다. 엄마의 옷은 불이 붙자마자 홀라당 타서 없어졌다. 엄마의 깊은 냄새가 배어있는 옷은 그을음으로 바뀌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홀랑 타고 있는 옷을 지켜본다. 타 없어지는 것, 타고 남은 재도 사라지고 나면 그을음으로 동력 삼아 우리는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추억일지도 모르고 미미하게 남은 그리움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해미를 만나고 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고립이라는 것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홀랑 타서 죽어버리는 것보다 이대로 두 사람의 주위에서 고립된 채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무섭다. 그것이 나에게는 무서운 일이다. 해미는 벤을 만나기 이전에는 나를 좋아했다. 나의 페니스에 콘돔을 끼워주던 혜미의 손길을 나는 기억한다. 보일이의 밥을 챙겨주러 들어가면 집 구석구석 박혀있는 해미의 냄새에 도취되어 나는 자위행위를 했다. 그 순간은 절실하게 해미를 떠올릴 수 있었다.
“한국에는 비닐하우스가 정말 많아요. 쓸모없고 지저분하고 눈에 거슬리는 비닐하우스는 몽땅 내가 태워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그 불타는 비닐하우스를 보며 희열을 느끼는 거예요.” 벤은 말을 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난 다 알고 있어, 하는 표정의 미소.
자신의 손을 심장 가까이 대고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가 있다고 했다. 그건 뭘까. 그건 정말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태.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건 형이 판단하는 거예요?”
“나는 판단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이는 거죠. 그것들이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걸. 거기에 옳고 그름은 없어. 자연의 도덕만 있지.”
“자연의 도덕이요?”
“자연의 도덕이란 동시 존재 같은 것이에요. 나는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는 거”
나는 지금 벤과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나는 여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모습이 여기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면 나는 여기에도, 지금 잠들어 있는 해미의 몸속에도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구치소에도 있다.
남자들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 놓고 춤을 추고 그래, 창녀나 옷을 그렇게 벗는 거야.
내가 왜 그런 말을 해미에게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 해미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는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흔적도 없고 가방도 두고 아프리카에도 가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에 동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휴대전화로 해미에게 온 전화로는 해미라는 것을 알 수는 없었다. 마치 생령이 나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메타포를 던지고 간 것 같았다.
윌리엄 포크너가 그랬다. 인간의 오류는 몰라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설령 나의 착각이라 할지라도 나는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어릴 때 해미에게 못생겼다고 말했다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없는 것일 뿐 내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해미가 잘못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나의 착각일 것이다. 해미는 그런 말을 나에게 들었고 나는 그런 말을 해미에게 해 버렸다. 어린 해미에게 나는 상처를 준 것이다. 해미는 그 상처를 입고 어딘가에 풀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렸다. 나는 해미에게 그 상처를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해미를 찾아야 했다. 나는 해미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 해미의 미소와 담배피우던 모습과, 나에게 말을 할 때 눈빛과 나를 잡아주던 손길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꿈을 꾸면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있는 어린 나를 바라보는 꿈을 꾼다. 그 비닐하우스에 불을 낸 사람은 나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불을 낸 것처럼 희열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다. 그 어린 종수를 나는 쳐다보는 꿈이다. 어린 종수는 어린이 되어 버린 어른 유전자의 종수를 태우며 희열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꿈을 꾸고 나면 개운하지 않게 일어났다. 마치 잠이 들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끌고 꿈속으로 들어가 꿈속과 현실이 뒤섞여 몹시 불편한 현실의 자투리처럼 느껴졌다.
나는 비현실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면서 현실의 비닐하우스를 찾아 다녔다. 벤이 태웠을 비닐 하우스가 있는지. 그는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며 희열을 느낀다고 했다. 바람에 힘 없이 날리는 쓸모 없어진 현실의 비닐하우스 속에 들어가 있으니 결락감이 몸으로 파고들었다. 결락은 차갑고 무서워서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덜덜 떨렸다.
낡고 못쓰게 된 비닐하우스를 바라보고 있으니 비닐을 통해서 내 모습이 읽어졌다. 그리고 해미의 모습도. 변변찮은 동네의 변변찮은 집에서 변변찮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변변찮은 유전자의 모습이 비닐하우스 속에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을 해도 결국에는 몹쓰고 볼품없는 비닐하우스가 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원래대로, 원래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비닐하우스는 태워지기를 바라고 있다. 포근하면서도 불안한 비닐하우스는 언젠가 태워질 것이다. 아주 빠르고 깨끗하게, 십 분만에 타 없어질 것이다.
너무 가까워서 놓칠 수 있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일 수 있다. 벤은 그렇게 말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물을 놓치고 해미를 놓쳤다.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인다. 해미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너무’라는 부사는 너무 어둡고, 너무 크고, 너무 깊은 것과 어울렸던 부정적인 투영을 나타내는 부사다. 해미는 나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해미를 놓치고 만 것이다.
해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해미가 전화를 한 것인지, 해미인지 아니면 해미를 가장한 누군가인지 알지 못한다. 해미의 방은 나와 해미가 나눴던 그 방이 이미 아니었다. 서울타워의 유리에 비친 햇빛이 아슬하게 들어왔던, 위태로운 해미의 숨결이 남아있는 방이 아니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보일이처럼 영원히 보이지 않게 되기 전에 해미를 찾아야 했다.
문득 해미가 아주 가까이 있는 비닐하우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벤의 집 화장실에서 해미의 손목시계를 보고 나는 깨달았다. 해미 이전의 해미들이 서랍속에는 가득하다는 것을. 정말 너무 가까이 해미가 있어서 놓친 것이다. 이 세계는 수수께끼 같은 곳이다. 혼잡한 세상 속에서 나 하나쯤 타 없어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도 없다. 쓸모없는 유전자를 물려받은 냄비에 지나지 않는 육체는 타 없어지는 게 맞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해미는 안 된다. 해미에게 창녀라고 해서 상처를 줬던 것도 사과를 해야 한다. 벤이 끼어들면서 상처받은 내 마음도 털어놓고 싶다. 해미를 찾아야 한다. 이제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더 잠자고 싶다고 말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찾아야 한다.
애초에 집으로 전화를 건, 수화기 너머 긴 얼굴의 사람은 해미일지도 모른다. 해미는 거기에 있으면서 내가 있는 곳에 전화를 한 것이다. 나에게 무엇인가 말을 하기 위해서, 나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서, 나에게 입은 상처를 제대로 나에게 표현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태우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태우고 나면 그 후에는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