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까마귀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3
박지안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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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어린 자아의 번복
주안점 : 시각적 묘사, 하이틴감성
여름밤 납량특집 으로 앉은 자리에서 단번에 읽기 좋은 소설!

<하얀 까마귀>의 주인공 '주노'는 고2 때 친구 '아영'의 자살을 겪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학교도 자퇴하고 폐인처럼 살았다. 주노는 후에 인터넷 방송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삶을 공유하며 유명세를 얻고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거 조작 논란에 휩싸인다. 악플과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에서 주노는 논란을 잠재우고자 IOM2라는 신작 게임 스트리밍 방송에 출연한다.

IOM2는 "유저의 심층 심리를 파고들어 공포의 근원을 건드리는 사이코호러 게임"이다. 플레이어별로 쌓아온 기억이 다르므로 좋게 말하자면 커스터마이징, 까놓고 말하자면 개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VR게임인 셈이다. IOM2를 실행하자 주노는 가장 잊고 싶어했던 고등학교 1,2학년 시절을 배경으로 한 가상현실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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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안 작가가 만화를 전공한 이력 때문인지, <하얀 까마귀>에는 세세한 시각적 묘사가 많은 편이다. 덕분에 주노의 외모라든가, 게임 플레이 화면 등이 생생하게 그려져서 소설에 몰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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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까마귀'라는 소재는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왔다. 까마귀는 원래 흰 깃털을 가진 새였는데, 신에게 거짓을 고한 죄로 인해 타죽어서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까마귀는 주노의 객관적상관물(?)이다. 까마귀는 인생을 늘 거짓말로 분장하면서 살아온 주노의 처지를 대변하며 소설의 결말을 암시한다.

🔖(p53) 까마귀는 대체 왜 신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거야. 아폴론 신에게. 하지만 그 결과는 아무 죄 없는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지.


주노는 끝까지 진실을 마주하지 않고 자신마저 속이려 한다. 그리고 결국 혼수상태와 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주노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일삼고 반성하지 않는, 성숙하지 못한 자아의 소유자이다. 이 비극적인 결말에서 꽤나 고전적인 교훈을 찾을 수도 있겠다. 거짓말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도 그 거짓말에 세뇌되고 괴물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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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흐름이나 메시지와는 별개로 소재가 흥미로웠다. 게임 스트리밍 방송을 하는 BJ가 구설수에 오르고, 해명하고, 몰락하는 에피소드는 현실에서 흔하다. 밀레니얼 세대인 작가는 이런 현실을 SF 세계로 옮기면서 비현실(꿈, 혼수상태)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10대 소녀 특유의 예민한 감성과 외모지상주의 또한 잘 포착해냈다.

개인적으로 '그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해서 읽는 데 약간 걸리적 거리긴 했다. 그보다는 '주노는 ~했다'라고 서술한 문장이 좀 더 읽기 편했는데, 문체를 크게 상관하지 않는 독자라면 완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소재가 살짝 흔한 느낌은 없잖지만 학교폭력을 대하는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태도를 깊이 생각해볼만하며, 장면을 상상하며 몰입하는 재미가 있어서 5점 만점에 3.5점을 주는 것으로 리뷰를 마무리하겠다.


까마귀는 대체 왜 신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거야. 아폴론 신에게. 하지만 그 결과는 아무 죄 없는 사람의 죽음으로 끝났지.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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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가 걸어오다
박신일 지음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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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은혜가 '내려오다'가 아니라 은혜가 '걸어오다'로 표현한 점이 뜻깊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는 높은 곳에서 낮은 인간에게 임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왠지 '걸어오다'라는 단어에서, 그리고 표지 그림에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만큼 연무가 가득해서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등불을 들고 조난자를 구하러 오는 구조자'의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에 훨씬 더 인격적으로 느껴진다. 


야곱은 평생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에게 속고 도망치며 살았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더 믿었기에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 야곱에게도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함께하겠다고 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은 위기를 모면하고 잘 살아가는 듯싶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곤경에 처하고, 또 구조되고, 또 죄를 짓는 일을 반복한다.

 

(p203) 하나님이 이런 야곱을 보실 때 "야곱아, (...)또 시작이구나. 이제는 너를 더 이상 돕지 않겠다"라고 하실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저는 우리 안에 있는 끈질긴 죄성보다 더 끈질긴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죄뿐인 우리를 향해 변함없이 뚜벅뚜벅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걸음입니다.

 

오늘날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야곱과 다를 바 없다. 크고 작은 비슷한 죄에 걸려 넘어지고, 부르짖으며 회개하다가도 고통이 잠잠해지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계획대로 살아가려 한다. 이처럼 답답하고 추한 상황을 빅면하면 더 이상 무엇을 구하기도 죄송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야곱의 일생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은혜이다. 기다리시고, 함께하시고,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도 도와주실 것을 기대한다.


(p235) 야곱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된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반드시 새롭게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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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의 전장에서 - 최초의 항생제, 설파제는 어떻게 만들어져 인류를 구했나
토머스 헤이거 지음, 노승영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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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줄평: (💊💊💊💊4.0) 화려한 설파제가 20세기를 감싸네..☆

먼저 '설파제' 와 '항생제'라는 용어 정의부터 짚고 넘어가겠다.

🔖(p17) 이 책에서는 설파제를 '술파닐아미드라는 비교적 단순한 원자 집합으로 그 활성을 추적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약물'을 총칭하여 일컫는다.

🔖(p18) 항생제는 인체에 심한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인체 내의 특정 세균들을 선택적으로 죽일 수 있는 모든 성분으로 정의된다. (...)설파제는 세계 최초의 항생제다.

「감염의 전장에서」는 1차세계대전 이후 의약 연구에 일생을 바쳤던 독일 의사 게르하르트 도마크와 설파제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큰 흐름은 도마크를 따르고 영국의 레넌드 콜브룩, 프랑스의 에르네스트 프루노와 얽히며 미국 FDA와도 설키는 블록버스터급 이야기다.

도마크는 1차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의무병으로 복무하다가 감염병으로 죽어가는 병사들을 보며 인생의 갈피를 잡는다.

🔖(p38) 상처 자체는 전쟁의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 이은 감염은 틀림없이 과학으로 예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이 파멸적인 광기에 맞서리라고 신과 나 자신에게 맹세했다.

이후 도마크는 독일 사기업 '바이엘'에서 연구실을 꾸려 클라러, 미치와 함께 '프론토질'이라는 설파제를 만들어내고 특허를 출원했다. 설파제는 수많은 연쇄구균 감염증, 산욕열, 폐렴, 임질, 수막염 환자들을 "무덤으로부터 낚아챘다". 다만 설파제가 '왜' 그런 효과를 발휘하는지는 아무도 몰랐고 이 유용한 화학물질은 적정용량도 공시되지 않은 채 입소문을 타고 확산되었다.

(후에 항대사물질 역할을 함으로써 표적 미생물이 굶어 죽는다는 메커니즘이 밝혀짐. 자일리톨을 먹고 충치를 예방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

설파제(술파닐아미드)의 핵심은 '황(sulfur)'인데, 도마크가 속한 연구소의 수장 회를라인이 황 함유 아조 염료가 약효를 낼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낸 데서 시작했다.

🔖(p206) 클라러와 도마크가 지침으로 삼은 원리는 가운데의 틀, 즉 아조 염료의 주사슬이야말로 약제가 효력을 발휘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곁사슬, 즉 황 같은 부착물은 이 동력 중심부를 켜는 열쇠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효과는 아조 염료가 아니라 황이 일구는 것이었다. 프루노가 몸담은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이를 발견해내며 설파제 발견과 제약 권리에 대해 독일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설파제가 인기를 얻게 되자 갈등은 심화되었다.

2차세계대전에서는 설파제가 매우 유용하게 쓰였다. 군인은 일반인보다 잘 통제되고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수집/분석할 수 있어서 대규모 인체실험을 시행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결과는 고무적이었다.

🔖(p393) 1차세계대전에서는 독감, 폐렴, 기관지염을 비롯한 급성 호흡기 질환으로 미군 병사 5만명 가까이가 사망했으나, 2차세계대전에서는 참전 군인 수가 두 배로 늘었는데도 1265명만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의 공식 전쟁 기록에 따르면 두 전쟁의 주된 차이는 설파제의 폭넓은 이용이었다.

이렇듯 설파제는 자우버쿠겔(마법 탄환) 또는 파나케이아(그리스신화 치료의 여신)로 취급받았으나 완벽한 만병통치약은 아니었다. 오용/남용 사고가 발생했다. (3부에서 자세히 다룸) 그럼에도 설파제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지대한 유익을 미친 약물로 평가받는다. 의약품 연구방식, 의사에 대한 인식, 국가가 질병통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설파제는 짧은 호시절을 누리고 #페니실린 에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인류의 역사의 특이점이라고 여길만 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마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새로이 알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고뇌와 갈등에 공감하며 느리고 꾸준하고 방대한 의약 연구, 나치에 동조하지 않은 독일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불안하고 폭력적인 시대 속에서 윤리를 지키려고 했던 도마크는 존경받을만 하다.

나머지 하나는 문장과 단어의 난도가 어려운 데다가 생소한 지명, 0에 수렴하는 세계사 지식 때문에 페이지를 빠르게 넘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책의 앞부분에 1차/2차세계대전 당시 전선이 표시된 지도가 삽입된다면 이해하기 좀 더 수월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나처럼 꼼꼼히 독서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예습/복습용으로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을 읽으면 좋을듯하다.



1차세계대전에서는 독감, 폐렴, 기관지염을 비롯한 급성 호흡기 질환으로 미군 병사 5만명 가까이가 사망했으나, 2차세계대전에서는 참전 군인 수가 두 배로 늘었는데도 1265명만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의 공식 전쟁 기록에 따르면 두 전쟁의 주된 차이는 설파제의 폭넓은 이용이었다. - P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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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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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 4.5) 높은 곳에 서는 이유는 추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람을 느끼며 도약하기 위해서이다. 


서사구조 간단 분석/요약

1️⃣ 발단 : 언니가 살려낸,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과 죄책감을 지고 살아가는 '유원'

2️⃣ 전개 : 자유롭고 주체성 있어 보이는 '수현'과 수현의 동생 '정현'을 만남

3️⃣ 위기 : 수현, 정현과 친해지는 한편 '아저씨'가 끊임없이 '나'와 가족들을 괴롭힘

4️⃣ 절정 : 아저씨와 수현, 정현의 관계가 밝혀짐. '나'는 더 이상 아저씨를 속으로만 혐오하는 소극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고 거절함

5️⃣ 결말 :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정'을 이해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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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1) 아파트 8층에서 초등학생이 크리스털 트로피를 던져 길을 가던 육십 대 여성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2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트로피에 맞았는데 중태에 빠졌다고?


🔖(p12) 언니의 생일과 기일은 사흘 간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부턴가 언니의 생일만 챙긴다.


'나'(유원)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 언니 '예정'을 잃는다. 담뱃불이 튀어 화재가 난 상황에서 언니는 '나'를 물에 적신 이불로 감싸 아파트 11층에서 던지는데, 나는 살아남고 언니는 연기에 질식되어 죽는다.

잃은 건 언니뿐만이 아니었다. 생전 언니를 알던 사람들은 유원에게 네 언니가 착하고 대단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며, 같은 학교 아이들은 사정을 알고 수군거리며 배려해준다.독립된 개인 '유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늘 언니의 모습에 투사된다. 예정언니의 친구 '신아'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한다.


🔖(p62) 원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린다. (...)순간순간 나를 놀라게 하는 건 원이의 목소리. 보고 싶었어, 하며 그 애가 나를 껴안았을 때 그 애 안에 예정이가 살아있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예정언니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는 인물도 있지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저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나'를 받아내다가 불구가 된다. 트럭 기사였던 아저씨는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여 십 년이 넘도록 엄마와 아빠에게 돈을 빌리러 온다. '나'는 이런 주변사람들이 답답하고 혐오스럽다.


'유원'의 정체성은 늘 '사고'와 '언니'라는 키워드로 특정된다. 그런데 '수현'이라는 아이만은 달랐다. 옥상에서 우연히 만난 수현의 첫인상은 조심성 없는 발소리에 품이 큰 체육복을 입은 자유로운 아이였고, 유원을 그저 싱겁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p51) 그래도 신수현이 나를 김세진의 짝이라는 것 말고 그 이상으로 아는 체하지 않아서 약간 호감이 갔다.


유원은 점차 수현과의 관계에서 공유하는 이야기가 많아지고 덤으로 수현의 동생 '정현'과도 친해진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친구를 사귄 유원은 죄책감과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현이 아저씨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마음이 혼란해진다. 더 큰 문제는 아저씨와 수현과 '나'가 삼자대면하면서 불거진다.


🔖(p168) 지나칠 정도로 수현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나보다 더 아저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p183)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그러면 나는 죽었겠지. 잔인한 말이었지만 수현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빠를 참아왔듯이 수현이 나라는 존재 또한 참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유원은 아저씨를 만나 오랜 관계를 청산하고, 아저씨와 수현은 다른 사람임을 깨닫는다. 


🔖(p195-196)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 잖아요. 죄송해요.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레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들어요." (...)아저씨는 저런 눈을 하고 있구나. 목소리만큼 크고 위협적이지 않았다. 누렇고 흐리멍덩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주었다.


또한 유원은 '아저씨를 대하는 태도'를 전환하는데, '정현을 대하는 태도'와의 대조가 특히 '우산'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p198) 아저씨는 종이 백에 있던 접이식 우산을 펴 내게 건넸다. 우산살이 하나 부러져 한쪽이 구부러진 우산이었다. 손잡이 부분은 녹슬어 있었다.


🔖(p200) 정현은 파라솔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커다란 우산 속에 있었다. (...)비가 사선으로 내리니 피할 수가 없었다. 울고 있어도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현 역시 수현만큼이나 자기 아버지를 증오하고 멀리하는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그리고 잊으려고 노력한 게 기특한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p215)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도 종종 있잖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돌멩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그냥 그런 상태인 거야. (...)거기에 내가 넘어져서 긁히고 베여도 화를 내는 게 무의미한 거야. 내가 돌멩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거고, 돌멩이가 내 감정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더 무의미한 일인 거야."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나'의 생일에 맞추어 수현과 정현은 생색을 내며 '나'를 남해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무서움 대신 설렘, 기대감, 전율을 깨닫는다.


🔖(p221)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다리가 후들가리고 식은땀이 나는 건 잠재의식 속에 사고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p223) 패러글라이더와 함께 나는 10미터 가량을 달렸다. (...)주춤할 틈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차, 하는 순간 나는 이미 날고 있었다. 어딘가의 바깥에서 드디어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p224)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언니의 용기를 닮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해 준 언니를.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천천히 지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허탈하지 않았다. (...)수현과 정현이 나에게로 달려왔다. 무사히 돌아온 나를 부둥켜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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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상당히 힘빠지는 일이다. 유원은 그걸 십 년 넘게 당해왔으니, 만성적인 피로와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다. 공부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늘 언니와 비교하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이런 일상에서 수현이 구원자처럼 등장하고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아저씨와의 불편한 관계를 끊어내고 어깨를 편 유원이 기특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유원의 독백이 달라지는 걸 느끼며 뭉클하기까지 했다. #패러글라이딩 은 유원이 수현, 정현과의 관계를 통해 내면이 성장했다는 징표이자 비유로 보인다.


🔖(p117) 나는 엄마의 하나 남은 딸이자,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이다.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


🔖(p216)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223-224)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풀어서 밑으로 던져 버렸다. 몸이 더 가벼워졌다. 공중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잠시 빙글빙글 돌았다. 바다 표면과 부딪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까스로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여담으로 사전서평단을 신청할 때 제목 '유원'의 뜻을 유추해보았는데 '신아'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p160) "예정이가 너 오랫동안 기다렸거든. 유치원 때부터. 한자로 원할 원에다가 영어로도 원트는 바라다라는 뜻이라면서 꼭 유원이어야 한다고 했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기다림에서 시작했지만 파생되었다기보다는, 이제는 독립된 '유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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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에게 웅진 모두의 그림책 30
전이수 지음 / 웅진주니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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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림책은 오랜만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려운 한자어가 잔뜩인 책을 읽다가 머리가 아팠는데, 따뜻한 그림과 글을 보니 마음이 풀리는 듯하다.

<소중한 사람에게>를 출간 전에 미리 읽어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가제본 책이라 조금 아쉽긴 했다. 맑은 날 공원에 나가서 자연광에 그림을 비추며 리뷰에 쓸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그래도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나를 소중하게 여겨줘서 고마워요 작가님!

일곱 단원으로 구성된 그림과 글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아래와 같이 골라보았다.

🔖위로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삼촌을 캐묻기보다는 그저 어깨를 빌려주는 이수가 고맙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외로워도 내색하지 않고 힘들어도 참는 데 익숙해지는 줄로만 알고 살아왔는데... 어른이 아이에게서 위로를 받는다니 어색하지만 한 번 기대본다.

🔖우태의 눈물
노키즈존에 대한 단상을 읽고 새삼스레 반성하게 되었다. 어린이가 커서 어른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 옆에 있는 그림을 살펴보면 앞서가는 이도 뒤따라가는 이도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발이 하나 없는 동물과 눈을 감은 동물이 함께 살아간다는 건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걷는 것이라고 이수는 말한다.

🔖모두
"한 사람의 아픔을 다른 사람들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엄마
비뚤어진 채로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게 엄마는 원망과 미안함이 섞인 애증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이수가 엄마를 대하는 마음을 보고 나도 태도를 조금은 고쳐보기로 했다. 분명 나도 어릴 때는 남김 없이, 숨김 없이 엄마를 사랑했고 지금도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데... 변한 건 나뿐이다. 다시 사랑하기로 노력해봐야지. 가정의 달, 5월에 깊이 생각하고 읽어보기에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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